떡은 사람이 될 수 없지만 사람은 떡이 될 수 있다는 옛 지구인들의 격언이 생각나는 아침이었다. 민규는 오랜만에 경험하는 숙취에 머리를 부여잡았고 침대에서 몸을 뒤척였다.
아무리 취해도 택시를 불러서 집으로 갈 정신 정도는 남겨 놓는데 어제는 워낙 정신이 없어 그것조차도 남겨 놓기 어려웠던 것 같다.
평소 버릇대로 아무 것도 입고 자지 않은 탓에 항온기에서 뿜어져 나온 바람이 시원하게 맨다리에 닿았다. 어제 술을 진탕 마시고 누군가와 밤을 보낸 것이 분명한데 아침에 일어나니 간밤의 기억이 알코올과 함께 대부분 휘발 되었는지 이렇다 하게 머릿속에 남은 것이 없었다.
“ 아이구우- 민규야- 민규야- ”
남처럼 불러보지만 그렇다고 제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민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 팔을 뻗어 옆자리를 더듬어봤지만 온기 식은 침대시트만 손 끝에 스칠 뿐, 어제 손 안에 착- 감기던 말캉한 감촉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 갔네- ”
귀를 쫑긋 세워봐도 다른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고생(?)을 하였으니 아침까지 함께 있었다면 맛있는 밥을 먹이고 집에도 데려다 줬을 텐데, 급히 사라진 그가 야속하기도 하고 괜히 아쉽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다가 문뜩 떠오른 생각에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 아차! 내 지갑! ”
민규가 어제 밤의 남자를 떠올리려고 노력하다 문뜩 그 사람이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는 게 문뜩 떠올랐다. 보통 스테디한 파트너들과 밤을 보냈던 탓에 소지품에 대해서는 따로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잠든 사이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 큰 덩치가 무색하게 파드득거리며 날쌔게 침대를 벗어났다. 매사에 철두철미하려 노력하지만 그럼에도 자잘한 사고를 하나씩 달고 다니는 민규인지라, 혹시나 싶은 마음에 바닥에 떨어져있는 자신의 옷더미를 급히 뒤졌다.
돈을 잃는 것 보다 스마트워치 같이 퍼스널 디바이스를 분실 했을 때 발생하는 불편함이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기에 만약 가져갈 거면 돈만 가져가라며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민규의 소지품들은 모두 온전히 잘 있었다. 민규는 괜히 엉뚱한 사람을 오해한 것이 미안해 자신의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한차례 푸닥거렸더니 술기운이 조금 가시고 서서히 현실 감각이 돌아 오기 시작했다.
현실도피는 방탕한 어제 밤으로 충분했고, 오늘은 벌어진 일을 수습해야 했다.
‘ 8시.. 조금 있다가 체크아웃 하자. ’
조금 더 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다시 눕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졌다. 민규는 대충 옷을 주워 소파 쪽으로 던졌다. 풀썩- 하고 소파 위로 떨어진 옷과 반대로 테이블 위에 있던 무언가가 허공을 팔랑- 하고 날았다.
메모와 우주 공용지폐 몇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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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남자가 두고 간 것 같았다.
대부분의 것을 칩으로 거래하고 지폐나 동전을 거의 쓰지 않는 요즘 시대에 아직도 지폐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라니!
민규는 어제 만난 이가 굉장히 낭만적인 아날로거 이거나 기계와 친하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며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워들었다.
지폐는 그렇다 치고, 음성 메모도 아니고- 영상 기록도 아니고 친필 메모라니! 비록 호텔에서 제공하는 종이와 볼펜으로 쓴 것처럼 보이지만 어쨌든 어제의 낭만적인 아날로거에 대해 호감도가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무언가 중요한 내용을 숨기고 있다는 듯 반으로 접혀있던 메모의 내용은 별거 없었다.
[호텔비]
민규는 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며 지폐를 쥐고 우왕좌왕 하기를 잠시, 상대에게 잘해주지를 못할 망정 폐를 끼쳤다는 생각이 밀려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민규는 돈을 꼭 돌려줘야겠다 생각하며 어제의 기억을 더듬었지만 그 사람에 대해 딱히 뚜렷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을 되살리려 노력할수록 그 사람의 얼굴보다는 남자의 희고, 선이 가는 몸만 물 흐르듯 떠올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눈으로 사진을 찍은 듯 떠오르는 장면은 침대 위에서 내려다 본 잔 근육이 잘 발달된 하얀 등과 잘 조여진 허리의 선.
한번 그쪽으로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각지지 않고 부드럽게 떨어지던 어깨선, 근육의 결이 그대로 느껴지던 마른 등과 허리를 잡았을 때의 말랑한 감촉이 함께 떠올랐다.
그리고 골반에 자리잡은-
“ 호랑이 문신- ”
민규는 남자에게 작은 문신이 있음을 떠올렸다.
‘ 허리 문신으로 사람을 어떻게 찾아. 벗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
아침부터 엉뚱한 생각을 한 탓에 괜히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쓸며 술을 만취할 때까지 마셔댄 자신을 탓하며 침대 위에 벌렁 누웠다.
어제 밤, 상심한 자신을 위로하고 온기를 나눠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한다는 부채감도 잠시, 푹신한 침대 위에 묻힌 몸이 노곤해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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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야 지구의 환경이 회복되어 범우주적인 유명 관광지가 되었지만, 과거에는 생명체의 생존이 어려울 정도로 환경이 파괴되어 화성으로 사람들이 대거 이주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우주로 진출하여 많은 성공과 실패의 고배를 들이켰고 지구에 남은 사람들과 다른 진화의 길을 걸으며 스스로를 테라인이라 칭했다.
대부분의 테라인들이 모험가임과 동시에 사업가인 것처럼, 한 명의 성인으로서 독립한 민규는 뛰어난 사업 수완으로 성공적으로 사업체를 이끌었고, 이후 경제적으로 목표한 지점에 도달하자 자신의 꿈을 위한 모험을 시작했다.
가장 첫 번째 한 일은 모성인 지구에 입성하여 스톡카 레이스팀*을 인수하는 것이었다.
민규는 할아버지 생전에 함께 본 F1 경기 영상에 저당 잡혀 지금까지 많은 경기를 보며 레이스에 대한 꿈을 키웠고, 자신만의 팀을 만들어 서킷에 서기 위해 달려왔었다.
*스톡카 레이스: 양산형으로 생산된 자동차를 경주용으로 개조하여 진행하는 자동차 경주
물론 자신이 드라이버가 되어 달릴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취미와 운전 실력은 별개의 문제였고, 거기에 체격까지 커 경량화가 관건인 레이싱 경기에 핸디캡이 너무 컸다.
민규는 자신의 사업체를 임원들에게 맡겨둔 채, 오너로서 팀의 성공적인 출범을 위해 근 1년을 꼬박 밤낮 없이 매달려 있었다.
“ 잠,잠시만요! 대표님! ”
민규가 오너로 있는 레이싱팀에서 갑작스런 방문에 놀란 매니저가 급히 움직였더니 애꿎은 의자만 쓰러졌다. 모든 사태의 원흉이 구치소에 들어간 탓에 홀로 화를 삭이고 있었는데 오늘에야 면상을 보고 따질 수 있으니, 이제 갈 곳 잃은 화가 제자리를 찾아갈 시간이었다.
“ 한스! ”
민규가 소파에 앉아있는 팀 드라이버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2미터가 살짝 넘는 민규와 지구인인 한스와 체격 차이가 워낙 커 그의 발이 땅에 닿지도 못하고 허공에 버둥거렸다.
“ 네가 그러고도 선수야?! ”
“ 제발 진정하세요! 이것 좀 놓고 말해요- 네? ”
뒤따라 들어온 매니저가 민규를 부여잡으며 말렸다.
“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경기가 3달 밖에 안 남았는데 도로에서 레이싱을 해? 그것도 음주 상태로? “
민규는 서킷에서 연습을 하지 왜 거기서 달렸냐며 절규했다. 그는 팀의 성공을 위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 최신 기술을 장착한 레이싱 카, 최고의 엔지니어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스타 드라이버 한스를 영입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였었다. 그의 팀은 많은 이들이 이번 시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것이라 예상하는 팀 중에 하나였고, 민규 역시 그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지난 주, 한스가 불미스러운 사고를 일으키며 선수자격 정지를 받으며 모든 노력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민규는 숨이 막혀 새파래지진 한스의 얼굴을 보며 내팽개치듯 멱살을 거칠게 풀었다. 한스는 험한 일을 당했다는 듯, 잠시 비틀거리다 힘 없이 소파에 주저앉아 고개를 떨궜다.
민규가 터져 나올 것 같은 화를 억누르며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
평소에 듣지 못했던 차가운 민규의 목소리에 놀란 한스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바닥만 바라보며 말했다.
“ 오너, 난 그냥… ”
한스의 입에서 그날 밤에 있었던 기가 막힌 일들이 줄줄 흘러나왔다.
술집의 직원과 시비가 붙어서 내기 레이싱을 했다니? 자신의 상식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 팀 드라이버라는 사람이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까지 무책임 할 수 있어! ”
민규의 화가 다시 불을 뿜었다.
한스는 민규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어떻게든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그의 분노는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 당신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우리 팀은 이제 끝장났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해?"
민규는 계약서 사본을 꺼내며 당신에게 위약금과 손해배상 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 내 잘못만은 아니야! 그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구! ”
명성을 잃었는데 돈까지 잃게 생기니 흥분한 한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는 우리 팀을 견재한 사람들의 질 나쁜 함정에 빠졌을 지도 모른다며 변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질 나쁜 함정에 빠졌더라도 술을 마시고 핸들을 쥔 것은 한스 본인이었다.
한스의 바보 같은 말들을 계속 들으려니 민규 자신도 똑같이 바보가 되는 것 같아 한숨을 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민규의 머릿속에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잠깐, 잠깐만. 네가 레이싱에서 졌다고?”
한스는 잠시 멈칫하며 말했다.
“ 그래, 뭐 어쨌든 그랬어. 하지만 그날 내가 술에 취해서 그랬지 평소의 내 실력이었으면 어림도 없어.. ”
한스가 무슨 말을 하든 듣고 싶었던 말만 정확히 잡아낸 민규가 눈이 반짝이며 놀랍다는 듯 다시 되물었다.
” 그 사람이 프로 드라이버를 이겼다고? “
민규는 갑자기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져 나왔다. 한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웃음이 나와? 이 일 때문에 내 커리어는 끝났다고!"
한스가 민규의 태도에 불만을 터뜨리던 말던 그는 이미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경기가 3달 남은 시점에 계약을 하지 않은 드라이버를 구하는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순 없었다.
‘ 그 사람을 찾아야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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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는 Sector 17에 있는 Bar Gillette의 문을 열었다.
- 딸랑~
놋쇠 방울이 몸을 떨며 손님이 왔음을 알렸다. 민규 역시 머리 위에서 울리는 맑은 소리에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 아직도 이런걸 쓰는 데가 있다고? ’
역사 다큐멘터리에서나 볼법한 물건을 봤더니 가게 안에 꾸며진 것들이 마냥 신기하게 보였다. 레트로 컨셉인지 21세기 풍으로 꾸며진 실내와 그 시절의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한쪽 벽에는 당시 유행하던 아이돌의 영상이 한쪽 벽에 송출되고 있었다.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쉽게 발을 들이지 못하고 문 앞에서 어정쩡하게 서 있던 민규의 뒤로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 거- 길 막지 말구 좀 비켜보슈 ”
특이한 말투에 화들짝 놀란 민규가 뒤돌아보니 작은 얼굴의 반을 가리는 고글을 쓰고, 분홍색 밀리터리 조끼를 입은 사내가 서있었다.
“ 아, 죄송합니다. ”
“ 뭐여- 처음 보는 총각이네? ”
사내가 고글을 고쳐 쓰며 민규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어왔고, 누군가가 먼저 말을 걸어오니 마음이 편해진 민규가 활짝 웃으며 처음 온 것이 맞다며 맞장구 쳤다.
‘ 그런데, 이 사람은 아니겠지? ’
만약 한스를 이긴 실력자가 이 남자라면 당장 스타일부터 바꿔줘야 할 것 같다 생각하며 눈앞에 서 있는 이를 탐색했다. 그는 자연스럽게 바 테이블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혼자 온 거라면 이 쪽으로 앉는 게 안전할 거라 추천했고 민규는 그의 말에 따라 바 테이블의 스툴에 앉았다.
친근한 태도로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그는, 이 가게의 주인이라 밝히며 자신을 마스터 라고 불러 달라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자주 보자고 너스레를 떨며 색이 예쁜 논알콜 칵테일을 환영주로 내어주었다. 예상치 못한 친절에 마음이 녹진해진 민규가 내부를 둘러보며 가게의 컨셉이 좋은 것 같다며 칭찬했고, 마스터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K-pop을 컨셉으로 한 것이라며 한참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민규도 마스터의 말들을 별스럽지 않게 맞장구 치며 낯선 곳에 왔다는 경계를 완전히 허물어 뜨렸다.
“ 에구- 나만 너무 떠들었네.
이제 다 놀아 것 같으니, 잘생긴 손님도 여기 온 이유를 말해줄 수 있을까? ”
민규가 주문한 브랜디를 앞에 내밀며 마스터가 말했고, 예상치 못한 질문에 괜히 민규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조금 전까지는 시끄러운 음악이 흘러나온 것 같았는데 어째 지금은 그 소리도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았고, 잔뜩 예민해진 탓인지 어두운 가게 안에 서 있는 마스터의 고글이 차갑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민규는 문뜩 지금 아니면 말할 타이밍을 찾기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브랜디로 입을 축이고 말했다.
“ 사실, 제가 사람을 좀 찾고 있는데요- ”
“ 그래? ”
아까 전에 밝은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낮게 가라앉은 진지한 말투.
오팔색으로 차갑게 빛나는 고글이 마스터의 낯선 이를 향한 경계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았다.
민규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마스터에게 자신이 이 곳을 찾아온 이유를 이야기하려던 때-
“ 마스터- 고글에 램프꺼요. ”
손님이 눈부시겠다며 바 안쪽에서 술병을 들고 나오는 남자가 말했다.
“ 아이구 깜짝이야! 순영이 언제 왔어- 에구 이게 언제 켜졌냐아~ ”
빛나는 고글 아래에 마스터의 입이 시원한 곡선을 지으며 미소 지었고, 못 본 척 숨죽이며 구경하던 가게 안의 손님들은 마스터의 능청스러운 말과 민규의 벙찐 표정을 번갈아 보며 깔깔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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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에게 힝! 속았지! 하며 시원하게 웃더니 가게 안쪽으로 쏠랑 들어가버렸다. 마스터에게 순영이라 불린 남자는 여전히 얼이 빠진 표정으로 앉아있는 민규에게 지구에는 냉수 먹고 정신 차리라는 속담이 있다며 차가운 물을 민규에게 내밀었다.
“ 일종의 이벤트예요. 마스터가 새로운 손님에게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
마스터가 준 음료에 기분을 고조시키는 천연 허브가 들어있어서 평소와 다른 몰입감이 있었을 거라며, 합법적인 성분이니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덧붙였다. 민규는 기가 막혀 반사적으로 흘러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거두며 여기는 뭐 하는 곳이냐고 물었고, 순영은 그를 잠시간 응시하더니 자신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마스터가 실없는 장난을 치고 떠났지만, 아직 용건을 해결하지 못한 민규는 이 사람에게라도 물어야겠다 싶어 표정을 진지하게 고치고는 며칠 전 가게에 일어난 소란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왔노라고 말했다.
“ 헤에- 그 노란 머리가 당신의 직원인가요? ”
직원.. 일반적인 오너와 직원 관계는 아니지만 비슷한 계약관계에 있으니 대충 비슷할 터였다. 민규는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정말 실례가 많았다며 말을 이었다.
“ 저희 측이 큰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곳 직원분께도 사과를 하고 싶은데 잠시 뵐 수 있을까요? ”
“ 흐음, 그게 다예요? ”
민규가 질문을 했는데 어째 답변이 질문으로 돌아왔다.
이것 말고 이 가게에 내가 다른 용건이 있어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덧붙였다.
“ 만약 파손된 기물이 있다면 보상하겠습니다. ”
순영는 잠시 묘한 표정을 짓다가 어깨를 한번 으슥하더니 민규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 반가워요. 제가 손님이 찾는 그 사람이에요. ”
사과는 받은 걸로 할게요. 이제 됐죠? 하고 생긋 웃는데 날카로운 인상이 180도로 변했다. 순식간에 순하고 귀여운 인상으로 변한 남자가 민규의 손을 위아래로 몇 번 흔들더니 악수까지 했으니 화해한 거라며 말하는데, 그것이 친절한 듯 하면서 묘하게 선을 긋는 느낌이었다.
민규는 이게 아닌데 하며 다시 심기일전 해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 저 그런데 그날 저희 직원 분과 함께 자동차를 운전하셨다고 들었는데 맞을까요? ”
순영은 흥미 없는 이야기라는 듯 칼로 얼음을 깎으며 그렇다고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 운전을 한 게 아니라, 술을 마시고 핸들을 잡은걸 추적해서 잡은 거예요. 경찰에 신고도 제가 했고요. "
사이 좋게 운전을 한 그런 관계가 아니라며 말을 덧붙이는데, 민규는 바른 마음에 프로 드라이버를 이기는 실력까지 갖췄다고 칭찬하며 원한다면 프로로 활동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겠다고 말했다. 순영은 이 사람이 제대로 내가 한 말을 들은 게 맞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 하다가 딱 잘라 말했다.
“ 관심 없어요- ”
민규는 순영의 거절에 아랑곳 하지 않고 드라이버로서 누릴 수 있는 수 많은 것들을 나열하며 설득하려 했지만 어째 말이 길어질수록 순영의 표정은 더 나빠졌다. 그는 물질적인 것이 동기가 되는 사람이 아닌가 보다 생각하며 그의 재능을 칭찬하는 방향으로 바꿨지만 이번에도 흥미를 끌어오는데 실패했다.
“ 저기 근데요. 제가 진-짜 관심이 없거든요. ”
순영은 민규의 이야기가 피곤한 듯 한숨을 푹 쉬며, 이렇게 계속 영업을 방해할 거면 나가라는 가시라는 차갑게 축객령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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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이 아무리 관심이 없다고 말해도 거기서 포기할 민규가 아니었다. 흥미가 없다면 흥미를 만들어주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는 멋지게 개조된 레이싱 카 사진을 보여주고 기능들을 설명해주었고, 다음 날은 팀의 피트에 초대할 테니 시승하러 오라며 차 키를 바 테이블 위에 슬쩍 올리며 귀엽게 유혹했다. 그 다음 날에는 감독과 팀원 몇 명을 데리고 와 우리 팀이 얼마나 단단한 결속을 가지고 움직이는지 증인들의 힘을 빌어 어필했다. 그 뒤로도 순영이 출근하는 시간부터 퇴근하는 시간까지 가게에 머물며 소소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브랜디를 마시거나, 때때로 가게 일을 도우면서 순영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거절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 얼굴 도장을 찍으며 살갑게 구는 민규를 보는 순영도 마음도 복잡해졌다. 결국 두손 두발 다든 순영이 팀 피트에 방문하여 테스트 주행을 한번 해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민규에게 큰 기대를 하지 말라 덧붙이며,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자신의 실력이 뛰어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기회,
민규는 자신의 감이 틀린 적이 없다며 당신 대단한 선수가 될 거라며 추켜세웠고,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바로 연습용 서킷을 장기 예약했다.
사실 민규의 감은 틀린 적도 많았고, 더불어 자잘한 실수는 더 많았다. 단지 틀렸어도 틀린 일로 끝나지 않게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 무탈하게 오늘날까지 올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가 민규의 호언장담을 진짜 믿고 팀 피트에 방문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들어 올 때처럼 마음대로 나갈 수 없을 거라 부분이었다.
테스트 드라이버로 연습용 서킷에 방문한 날, 순영은 정말 딱 한번 테스트만 하고 끝이라고 거듭 말하며 강조했다. 민규와 팀원들은 흘러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서킷을 돌다가 그만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돌아오면 된다며 그를 안심시켰다.
민규팀의 경주 차량은 스톡카 레이스 전용으로, 양산형 자동차를 경주용으로 개조한 모델이었다. 다행히 양산형 자동차의 기본 구조는 그대로 가지고 있어, 순영은 몇 번의 시뮬레이션 주행만으로도 금방 감을 익힐 수 있었다.
이후, 주행에 자신감이 붙자 주저 없이 서킷 위에 올라 섰고,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팀원들은 익숙하게 경험한 일이었다.
길게 뻗은 서킷 위를 달리다 보면 속도가 주는 공포감보다 한계를 넘어섰다는 즐거움이 더 크기 때문에 서킷에서 내려오기 쉽지 않았다. 그날 순영은 머신에 연료가 떨어져 서킷에서 멈출 때까지 달렸고, 민규가 몰고 온 견인차 뒤에 매달려서 팀피트로 복귀했었다
평균 랩타임은 작년 시즌에 5위를 했던 선수의 기록과 같았다.
그렇게 속도와 스릴에 매료된 순영은 민규의 팀 드라이버로 하나의 시즌을 함께 보내기로 계약하고, 3개월간 집중적인 트레이닝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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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의 팀이 출전하는 GASCAR 레이스는 지구에서 열리는 여러 스톡카 레이스 중에 규모가 가장 큰 경기이다. 가솔린 연료의 시대가 지고 전기차가 대중화되며 스톡카 레이스 팀 역시 기술의 고도화의 흐름을 타고 많은 변화를 맞이했다.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머신의 성능과 더불어 드라이버의 주행능력에 따라 승패가 결정되던 가솔린의 시대와 달리, 차량에 장착된 AI 네비게이션의 주행 서포트에 따라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AI 운영체계에서 가장 중요시 하게 여기는 부분이 사람의 생명을 보호한다는 점에서, 드라이버에게 위험 부담이 있는 주행을 권하는 네이게이션은 존재 할 수가 없었다. 또한 차량 안에 최고의 조언자가 동승한 것과 같으니 드라이버들 역시 앞 차의 추월 가능성을 점치며 스스로를 시험에 들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러한 이유로 과거 보다 박진감은 좀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팬들은 서킷을 찾아 최고의 머신들이 펼치는 경기를 보기 위해 인산인해를 이뤘고 많은 방송사들이 중계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
경기의 메인 스폰서 광고가 끝남과 동시에 카메라 램프에 붉은 빛이 들었다. 화면에 캐스터의 얼굴이 비춰지며 시청자 실시간 채팅이 육안으로 읽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 GASCAR 레이스 2294 시즌 17번째 경기, 잠시 후 이곳 영국의 실버스톤 서킷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저는 채널SVT 캐스터 윤정한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스포츠 전문 기자 조슈아 기자님과 함께합니다. "
" 반갑습니다. 조슈아입니다. 오늘도 쉽고 명쾌한 해설로 여러분과 함께하겠습니다. "
채널 SVT의 보도본부의 간판 윤정한 아나운서와 조슈아 기자가 화면에 동시에 잡히니 시청자 채팅에 글자보다 토끼나 사슴 같은 이모티콘이 줄이어 올라갔다.
" 요즘처럼 중계가 즐겁고 기다려졌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자님께서는 어떠세요? ”
“ 저 역시 그렇습니다. 천재적인 주행능력을 가진 스타 드라이버의 탄생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일은 흔하게 경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시청자 분들께서도 아마 저희와 크게 다르지 않으실 거라 생각합니다. ”
두 사람이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 맞습니다. 어제 예선도 서킷의 호랑이, 권순영 선수가 대단한 주행을 펼쳤습니다.
오늘 스타팅 그리드 순서는 7번, 지금 화면에 잡히는 호랑이 무늬로 랩핑된 차량입니다. ”
중계 스튜디오를 비추는 화면 아래로 작게 경기장을 비추던 화면이 전체 화면으로 전환 되었다.
“ 기자님, 저는 권선수가 이전에 레이스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
“ 레이스 경험뿐만 아니라, 데뷔 전에도 자동차 관련 일을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 시즌을 시작으로 커리어를 하나씩 쌓아가는 신예입니다.
어제 예선에서 랩타임 5분 09초로 20명의 선수 중 7위를 차지하면서 오늘 레이스에서 7번 그리드를 차지하였습니다. "
“ 기자님, 어제 권순영 선수가 Q3에서 1위로 달리다가 속도를 줄여서 7위로 결승선을 넘는 모습이 개인적으로 참 인상 깊었습니다. ”
“ 호랑이는 앞에 사냥감이 있어야지 전력질주를 하니, 권 선수 역시 7번 그리드에 선 이유가 있겠죠. ”
경기장을 넓게 비추던 화면이 전환되며 두 줄로 나열하여 스타팅 준비를 마친 차량들을 비췄다. 곧 경기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 오늘 경기에 참석한 모든 선수가 안전하게 완주하길 바라면서, 말씀 드린 순간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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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는 헤드셋을 고쳐 쓰며 조금 전 중계 방송을 떠올렸다. 자신은 이번 시즌의 폭풍의 눈을 이끌고 있는 팀의 오너가 되어있었다. 그것은 첫번째 경기부터 지금의 17번째 경기까지 드라이버가가 입는 경기복만 봐도 충분히 증명되는 부분이었다. 스폰서 마크가 하나도 없었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아는 쟁쟁한 회사들 마크의 와펜이 경기복 가슴팍에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라 굴지의 자동차 회사로부터 내년 시즌에는 개조할 차량과 엔진을 지원하겠다는 러브콜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민규 역시 자신의 팀이 실패 하지 않을 것을 확신을 가지고 일을 벌렸지만, 이렇게까지 잘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저 서킷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자신의 드라이버 덕분이었다.
‘ 잘해도 너무 잘해. ’
민규는 순영의 차에 달린 카메라로 주행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7번째 순서에서 출발한 차는 벌써 4번째 순서의 차량과 서로 추월을 하며 경합 중이었다. 사람들은 순영이 무언가 큰 뜻을 품고 어제 예선 1등에서 7등으로 속도를 감속한 줄 알고 있지만 결단코 의도한 결과는 아니었다.
‘ 기계치인데 너무 잘해. ’
순영은 레이싱카의 네비게이션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도합 16번의 경기를 치뤄냈다.
순영이 네비게이션보다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차량 조작을 복잡해질 수록 랩타임이 늘어나서 고육지책으로 네비게이션 모드를 끈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다른 선수들과의 차별점이 되어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낸 것이었다.
네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순영은 AI가 절대로 권하지 않을 위험하고, 불안정한 주행을 감행했다. 이건 겁이 없는 것과 조금 다른 문제가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과감한 주행이었다.
‘ 마치 사냥감을 쫓는 호랑이처럼 달리지. ’
순영이 네비게이션 모드를 사용하지 않으니 팀 감독과 오너인 자신이 더 바빠졌다. 노면 상황이나 주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이변들을 확인하고 예측하여 순영에게 알려주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어제 예선도 감독과 자신이 경기 상황을 지켜보며 꼬박 2시간 가까이 매달렸고, 순영 역시 두 사람의 말에 잘 집중하여 1위로 달리고 있었으나, 마지막 랩을 돌 때 도대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는지 순영이 네비게이션 모드를 켰고 순식간에 7위로 순위가 밀려나버린 거였다.
“ 순영씨- 잘하고 있어요.
전방 이상무, 쭉 달리시면 됩니다. ”
민규가 마이크를 켜고 순영에게 서킷 상황을 알렸다. 순영 역시 알았다고 답하며 스타팅 4번 차량이 커브를 돌기며 감속할 때 서킷 바깥쪽에서 안쪽으로 대각선으로 깊게 파고들어 추월해버렸다.
AI 네비게이션이 절대 추천하지 않을 경로였고, 그것은 AI가 아닌 민규도 같았다.
피트 박스에 앉아있던 감독과 민규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순영의 곡예운전에 놀라 동시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감독이 헤드셋을 벗어 목에 걸며 민규에게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오너, 나 심장병이 생길 것 같아요. ”
그건 민규 역시 다르지 않았다. 분명 드라이버를 영입한 건데 평화로운 자신의 피트에 호랑이 한마리가 들어온 기분이었다. 소년시절의 작게 반짝거리던 꿈은 서킷을 자유로이 달리는 작은 팀을 꾸리는 것이었지, 이렇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상위포식자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 내가 꼭, 꼭 말해볼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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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영이 헬멧을 벗으며 피트 안에 비치된 마사지용 간이 베드에 벌렁 드러누웠다. 다행히 큰 이변 없이 안정적으로 완주한 순영이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며 그의 17번째 레이스가 끝났다. 17번 동안의 누적된 승점은 레이스에 참여중인 20명의 선수 중에 3번째로 높았다.
이것이 그의 첫 데뷔 시즌이라 생각하면 엄청난 결과였다. 초반에 레이스에는 중상위권의 순위에 안정적으로 안착하더니 5번째 레이스 이후로는 5등 아래로 내려온 적이 없고, 10번째 레이스 이후부터는 3등 아래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높은 승점과 반대로 경기가 거듭될수록 네비게이션을 사용하지 않는 순영의 피로도가 매우 큰 상황이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민규는 얼음 주머니를 몇 개 챙겨 순영의 베드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 컨디션 어때요. 괜찮아요? ”
민규는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며 수건을 덧댄 얼음 주머니를 이마와 몸 이곳 저곳에 대어주었다. 얼핏 봐도 몸에 예쁘게 핏되던 순영의 경기복이 헐렁해진게 뚜렷하게 보였다.
레이스 초반에 비해 순영이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민규의 걱정이 배가 되었다.
사람들은 다른 운동 경기에 비해 의자에 앉아 운전을 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덜 힘들 것이라 생각하지만, 정작 선수들은 속도와 중력에 짓눌려 레이스를 마치면 평균 2kg 정도의 체중이 감소를 경험하곤 했다.
대답할 기운도 없이 축 늘어져서 얼음 주머니만 안고 얼음이 차가워- 하고 중얼거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히 속이 상했다. 그에게 자신의 팀의 시트를 주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고생을 시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순영만 데뷔한 것이 아니었다. 민규 역시 오너로서 팀을 운영하는, 두 사람 모두의 데뷔시즌이었다.
“ 미안해요. 많이 힘들어요? ”
생각만 한다는 것이 민규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절로 나와버렸다. 드라이버와 오너 사이는 계약관계로 미안하고 말고의 관계가 아니었고, 다른 팀만 봐도 기량이 떨어지면 언제든지 드라이버의 시트를 뺏어 부품처럼 교환했다.
하지만 민규는 순영에게 그렇게 매몰차게 대할 자신이 없었다.
“ 민규씨가 뭐가 미안해요.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 ”
순영이 눈도 못 뜨고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민규의 말에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마음이 찡해진 민규는 2주 뒤에 있을 18번째 경기에는 리타이어 시켜 순영을 쉬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시즌의 경기는 총 24회, 20명의 선수 중에 네비게이션도 없이 오직 본인의 힘으로 운전하는 선수는 순영뿐이었고, 민규는 순영을 부품처럼 대할 생각이 없었다.
“ 순영씨, 다음 경기는 우리 리타이어 하는게 어때요? ”
민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순영이 눈을 뻔쩍 뜨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 왜요? ”
자신이 경기 중에 실수한 것이 있느냐며 걱정하는 그에게 민규가 그런 게 아니라 체력 회복의 위해 한 텀 쉬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순영은 별일 아닌 걸로 리타이어까지 하냐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겠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은 리타이어 말고 그냥 집에 너무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댔다. 민규도 마음 같아서는 쉬어 라며 집에 보내고 싶었지만 곧 시상식이 있을 예정이라 그리 말할 수가 없었다.
순영은 리타이어에 대해 생각해보겠다고 말은 저리 했지만, 리타이어를 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왜냐하면 이 것이 2번째 권유였기 때문이었다. 민규는 지난 10번째 경기에도 리타이어를 권했었지만 자기를 못 믿는 거냐며 그의 말에 섭섭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순영을 모르는 이가 보아도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는데 경기 동안 무슨 마술을 부렸는지 그날 경기에서 첫 1위를 거머쥠과 동시에 한동안 병원신세를 졌었다.
민규는 순영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선수와 오너로 대하면 섭섭해 했고, 그렇다고 인간적으로 다가서면 묘하게 벽을 치는 느낌이었다.
“ 시상식 빨리 하라구 해요. 나 진짜 집에 가고 싶어요. ”
자세가 불편했는지 간이 베드에 몸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다가 벽쪽으로 다리를 올리고 뒤집어 누워 집에 보내줘어 하고 노래를 부르는 팀의 드라이버의 모습이 피트 밖 취재진의 카메라에 잡힐까봐 덜컥 겁이 나 민규는 벌떡 일어나 베드 옆 커튼을 쳤다.
아무리 갓 태어난 애처럼 말을 안 들어도 사람을 칠 수 없으니 커튼이라도 쳐야겠지 않냐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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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민규가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온전히 순영의 탓을 하기에는 팀의 오너로서 순영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23번째 레이스까지 팀을 끌고 온 민규의 잘못도 있었다. 두 초보 드라이버와 오너는 데뷔 시즌에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특히 다른 팀이 왜 네비게이션 모드를 사용하여 운전을 하는 이유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네비게이션은 드라이버의 피로도를 줄여 시즌을 안정적으로 끌고 가는 가장 강력한 지원군이었다.
순영은 23번째 레이스 중 가슴 통증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며 피트인하였다. 민규와 감독이 레이스를 포기하라고 강권하였지만 이를 뿌리지고 서킷에 오른 지 20분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순영은 병실의 하얀 천장을 보며 자신의 아둔함을 탓했다. 서킷 위에서 기절하여 민규 곤란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겨우 피트인 하였지만, 순영을 운전석에서 끌어내린 것은 새파랗게 질린 민규였다. 그 혼몽한 정신에서도 손을 벌벌 떨며 조심스럽게 헬멧을 벗기고 답답한 경기복을 벗기던 민규의 크고 투박한 손이 다 느껴졌었다.
‘ 그때는 셔츠 단추를 다 뜯어 놓고는.. ’
순영은 민규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지만 이내 고개를 털며 그 상념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상대는 기억도 없는데 자신만 품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떨쳐 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끌려오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순영은 펍에서 마스터와 대화하고 있는 민규를 발견했을 때만해도 자신만 그 밤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구나 하며 내심 설레어 했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수록 민규가 아무 기억도 없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적지 않게 자존심이 상했었다.
분명 그날 밤에 민규는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굴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도 없는 사람을 상대로 헛물을 켜는 취미가 없어 그가 하는 모든 제의를 거절하였지만 이 눈치 없는 남자는 도통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매일 얼굴을 보니 미운 정까지 쌓여 큰일이 날 지경이었다.
순영은 한숨을 푹 쉬며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민규의 권유에 시작한 드라이버의 길이었지만, 싫었다면 23회까지 경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었다.
이번 실책으로 민규의 팀에서 다음 시즌에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할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다른 팀에 입단하여 커리어를 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 근데 다른 팀에는 어떻게 지원하는 거지? ‘
아직 경력이 1년 채 되지 않은 병아리 드라이버라 운전하는 것 외에는 여전히 업계 돌아가는 사정에 대해서는 이렇다 하게 아는 것은 없다. 그래도 경기에서 몇 번 입상했으니 이력서에 몇 줄 쓸게 있어 순영은 조금 안심도 되었다.
순영은 레이싱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사람이 여기까지 왔으면 대단한 일 아닌가 하며 부둥부둥 스스로를 달랬다. 분명 민규가 이러한 생각을 알았다면, 상위권에서 단 한번도 내려오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 줄 아냐며 일장 연설을 했을 터였지만 순영은 알리 없었다.
- 똑똑
병실 밖에 누군가가 왔는지 노크소리가 들렸다.
순영은 첫 리타이어의 좌절감을 아직 떨치지 못한 상황이라 다른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잠든 척하고 있기로 마음 먹었다.
“ 순영씨? ”
문이 살짝 열리며 민규가 고개를 살짝 내밀고 자신의 이름을 조심히 불렀다.
아니나 다를까 지금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순영은 자신의 탁월한 판단을 칭찬하며 눈을 꼭 감고 고른 숨소리를 내도록 신경 썼지만 왠걸, 금방 떠날 줄 알았던 민규가 문을 살짝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먹을 것을 사왔는지 부스럭거리면서 냉장고 문을 열어 정리하는 소리가 살짝 들려왔다. 순영은 저걸 다 정리하고 나면 가겠구나 싶어 낙관적으로 마음 편히 생각하는데, 민규의 자박자박 하는 작은 발소리가 자신의 침대 쪽으로 가까워지더니 뚝 소리가 그쳤을 때 잠시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 순영씨, 진짜 자요? ”
순영은 속으로 그럼 가짜로 자겠니 라고 답변하며 민규의 말을 못 들은 척 괜히 뒤척이며 몸을 돌려 누웠다. 하지만 그런 순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민규가 좁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촉즉발의 긴장감, 순영은 등 뒤로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도 뜨지 못하고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에 의해 입원복 상의를 살짝 걷어 올려졌다.
“ 뭐, 뭐하는 짓이에요! ”
순영이 치한을 만난 사람처럼 펄쩍 뛰며 옷자락을 부여잡고 일어나 앉았고, 민규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다 안자네요 하며 불퉁하게 말했다.
“ 놀래서 깬 거예요! 놀래서! ”
민규의 말에 괜히 민망해진 순영이 지지 않고 바락 반박했다.
“ 그래요. 그렇다 치고, 순영씨 나 알죠? ”
순간 순영이 입이 꾹 다물어졌다. 무언가 생략된 말이지만 어떤 의도로 하는 말이지 정확하게 전달되었다
“ 아, 알죠. 우리 팀 오너잖아요. ”
순영이 도로록 굴러가려는 눈동자를 붙들고 민규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 흠, 그래요? 사실 제가 전부터 찾고 있는 사람이 있었는데- ”
민규가 씨익 웃으면서 순영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고, 순영은 몸을 슬금슬금 뒤로 물지만 얼마 안가지 환자 베드의 머리 부분에 등에 닿았다.
더이상 도망 갈 곳이 없었다.
“ 순영씨랑 똑같은 문신을 한 사람이거든요. ”
민규가 손바닥으로 순영의 골반을 덮듯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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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는 팀 피트로 돌아온 순영에게로 급히 뛰어 갔다.
차 문을 열고 그를 끌어내려 보니 몸에 열이 올라 불덩이였다. 순영이 더 이상 경기를 진행할 수 없는 상태라 판단한 감독은 협회에 리타이어를 알리며 메디컬 팀 지원을 요청했다. 그 동안 민규는 순영의 경기복을 벗고 얼음 주머니를 대어주며 순영의 몸에 끓는 열을 식히려 노력했지만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열기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민규는 순영의 상의를 벗기고 응급처치용 알콜 소독제를 꺼내 수건에 적셔 등에 대었다. 순식간에 밀려오는 냉기에 순영이 바르작 거리며 얼음 주머니들을 피해 몸을 움직였고, 민규가 품 안에 순영을 고정하듯 안고 자신과 순영 사이에 얼음주머니를 끼워 도망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냉기에 정신이 좀 들었는지 순영은 민규의 어깨에 힘없이 고개를 묻고 연신 경기를 포기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이는데, 순영의 말이 너무 아파 자신의 팀이 무어라고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지 속이 상해 미칠 지경이었다.
민규나 순영, 둘 다 레이스가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다.
민규는 하기 싫다는 사람을 어렵게 드라이버로 데려왔으면 경기가 있는 날이든 없는 날이든 성실히 케어 했어야 했는데, 시즌에 집중하지 않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찾느라 허비한 시간들이 아깝고 면목이 없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민규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순영의 등을 두드려주며 내가 더 미안하다 그 말 밖에 모르는 앵무새처럼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잠시 후 메디컬 팀이 환자 이송용 카트 끌고 나타났다. 민규는 감독에게 정리를 부탁하고, 그 길로 민규가 순영의 보호자로서 병원까지 함께 이동했다.
“ 제가 순영씨 환자복을 갈아 입혔어요. ”
모르는 척 잡아떼는 순영에게 민규가 말했다.
그리고 말하지 않고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속인 사람처럼 된 순영은 이 상황이 억울했다.
“ 제가 민규씨에게 말을 안 한 것은 맞는데, 민규씨가 저를 찾아다니는 줄도 몰랐어요.
그리고 솔직히 아무 것도 기억 못하는 사람한테 우리가 원나잇 했다고 말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요? ”
순영이 민규에게 이 모든 것은 기억을 못하는 너의 문제이지 자신의 탓은 아니라며 명확하게 입장을 전했다. 재계약은 고사하고 이런 분위기라면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인사조차 못하는 사이가 될 것 같았지만 미안하지 않은 일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 내가 기억 못해서 미안해요. 순영씨 ”
사과의 말은 민규의 입에서 나왔다. 민규는 품 안에서 지갑을 꺼내 순영이 남겨둔 메모와 지폐를 꺼내 보여주며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이걸 핑계로 다시 만나고 싶어 늘 가지고 다녔다고 말했다. 민규의 말에 순영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헷갈리기도 했다.
기쁜 듯 하면서도 짜증도 났다.
“ 민규씨 바보예요?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요? ”
순영은 그날 자기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냐며 툴툴거렸다. 순간 민규는 얼굴만 기억나지 않았지 함께 보낸 밤은 기억난다고 말을 하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순영의 몸 만 노리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민규는 불쌍한 척 눈썹을 축 늘어뜨리며 그날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과음을 해 실수를 했다고 말하며, 그럼에도 그날 순영이 준 따뜻함이 마음에 남아 찾고 있었노라고 말했다.
민규의 말이 정답이었는지 순영의 얼굴이 금방 풀어졌다.
지극히 일 적인 관계로 끝이 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지금 막 좋은 스타트를 했음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순영은 민규 쪽으로 몸을 붙이며 짧게 입맞췄다.
“ 이거 기억나요? ”
순영이 눈을 활처럼 휘며 귀엽게 웃으며 민규에게 물었다.
그런 순영을 보니 문뜩 민규는 그날 밤 무척 귀엽다고 느꼈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과 똑같았다.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까맣게 잊었는지 새삼 알콜의 무서움을 실감하며 짐짓 기억나지 않는 척 고개를 살랑 살랑 흔들었다.
“ 그럼 이건요? ”
순영이 민규의 목에 팔을 감고 자신 쪽으로 당기며 누웠다. 이번에도 민규가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리며 불쌍한 강아지처럼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순영이 아이처럼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 별수 없네요. 내가 다시 알려줘야겠네. ”
순영이 민규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입술에 짧게 입 맞추려 떨어지려 했지만, 이번에는 민규가 놓아주지 않았다.
FIN. 피트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