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진짜 안 맞는다.
김민규는 사실 그 말을 아주 지겹도록 들어왔었다. 그리고 김민규 또한 그 말을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주 지겹도록 체감해왔다. 김민규는 정말로 권순영을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사소한 것부터 가끔은 커다란 것까지, 권순영과 김민규는 정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맞질 않았다. 어쩌다 우연히 가닥이 맞는가 싶다가도 그런 평화는 십분을 채 넘긴 적이 드물었다. 그정도로 김민규와 권순영은 상극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릴 때의 김민규가 권순영은 유독 자신만 미워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걔는 진짜 잘생기긴 했는데 내 취향은 아니야. 김민규는 그 말을 인정하는 데에도 또 한참을 써야했다. 취향이고 자시고, 그냥 이정도면 나 싫어하는 거 아니냐고. 김민규는 이렇게까지 사람 취향이 다를 수 있으며, 또 더 나아가서 권순영의 그 모든 행동에 사실 악의가 없었다는 걸 인정하는 데에 꼬박 십 년을 써야 했다. 그냥 단어 그대로 정말 다른 것 뿐이라서. 나를 막 정말로 아주 미워하고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냥 정말 조금 안 맞아서. 그래서 그런 거라고. 김민규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데에 십 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태운 거였다.
그래서 사실 권순영이 아주 술에 취한 어느 날 제게 세븐틴의 기둥이라느니, 될 놈이라느니 하며 온갖 술주정을 부렸을 때 조금은 가슴이 일렁였던 것도 같다. 아, 이 형도 이런 구석이 있었나? 이 형의 진심은 이런 거였나? 정말로 내가 싫어서 그래왔던 건 아니구나. 가만 생각해보면 얼추 연차가 차며 둘이 사사건건 맞지 않아 틱틱대며 투닥댔던 일은 정말 많이 줄었던 것도 같고. 김민규는 그래서 이제는 조금 권순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었다. 앞으로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전의 관계가 별로였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제는 권순영의 마음을 조금은 알게 되었으니까. 그럼 예전과는 또 다른 기억들을 쌓을 수 있지 않겠느냐고. 김민규는 정말로,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근데 그건 오산이었다.
김민규는 평생 권순영을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딱 바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
민규야. 나 세븐틴 탈퇴하려고.
같은 말을 하는 권순영의 마음을, 도무지 알 수 있을리가 없으니까.
012★PLANET
영원히 별, PLANET
김민규
어쩌다 여기까지 왔나. 김민규는 당최 그것부터가 이해되질 않았다. 분명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맞는 멤버 몇이서 저녁을 먹으러 갔었고. 먹다보니 또 분위기를 타서 그게 술 몇 잔이 되었고. 한 잔이었던 것이 두 잔이 되었다가, 기왕 마시다보니 또 하나 둘 제 이야기를 꺼내게 되었고. 오가며 쌓이는 이야기만큼 또 얼큰히 술잔도 오고 받아 딱 기분 좋게 취했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다른 멤버들은 이미 자리를 정리했거나 취해 뻗었거나 둘 중 하나였고, 어쩐지 이상하다 싶게 그 때까지도 취하지 않은 권순영만 멀뚱멀뚱 반대편에 앉아서 김민규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 형이 웬일로 이렇게 안 취했지. 술을 안 마셨나? 그럴 리는 없는데.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권순영이 평소처럼 떠들지 않고 얌전히 제 얼굴만 빤히 보고 있는 게 지나치게 어색한 느낌이라. 사실 덧붙여, 권순영이 아직까지도 자리를 뜨지 않고 가만히 앉아선 김민규와 단 둘이 남아있는 이 상황부터가 낯설어서. 김민규는 눈을 굴려 제 얼굴을 가만 응시하는 권순영의 시선을 애써 피하곤 급히 입을 떼었다. 형, 혹시 다 마셨어? 다 마셨음 일어날까? 아까 쿱스 형이 나가면서 계산했던 거 같긴 한데. 아니면 내가 계산하고 올게. 혹시 빼먹은 거 없나 함 챙겨보고 있어봐. 분명 그렇게 말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던 것 같은데. 민규야, 하고 부르는 권순영의 한 마디 때문에 모든 동작이 그대로 멈췄던 것도 같다.
나 너랑 하고 싶은 얘기 있어서 일부러 남아 있었는데.
우리 둘이서만 한 잔 더 하면 안 돼?
천하의 권순영이 날 쳐다보면서 그렇게 말하는데, 그럼 그걸 또 어떻게 빼냐고. 그래서 옮기게 된 자리였다. 권순영은 웬일로 기특하게 너랑 가고 싶어서 찾아둔 술집이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한 잔도 마시질 않아서 운전도 할 수 있댔다. 심지어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두 명 예약인데요, 하며 눈에 띄지 않는 룸으로까지 걸음하는 모든 과정이 죄다 자연스러웠다. 뭐지. 이 형이 원래도 이렇게 세심했었나, 원래도 이렇게 잘 챙기는 사람이었나 싶었다. 내심 이렇게까지 해서 나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뭐였는지 궁금도 했다. 그리고 정말 솔직하게 덧붙이자면, 기대도 했었다. 최승철도 윤정한도 홍지수도 아니고. 아니면 그렇게 친하게 지내는 96 형들도 아니고. 굳이 나를 딱 골라서, 나랑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까지 하면서 하고 싶은 말이 도대체 뭐냐고. 내심 나를 그렇게 가깝게 여겨줬었나, 또 그렇게 믿어줬었나. 술 기운이 조금 오른 김민규는 정말로 그런 생각까지도 했었다. 그래서 제게 말을 걸어오는 권순영이 어쩐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안주가 나오자 권순영은 괜히 맞은 편에 앉아 지난 날의 얘기를 했다. 왠지 김민규가 좋아할 것 같다며 권순영이 시킨 요리는 이 식당의 일품요리였다. 김민규는 순순히 그걸 집어먹으며 권순영이 주저리 떠드는 지난 날들의 얘기를 모두 고분고분 들어주었다. 우리 진짜 새삼스럽다, 그치. 예전에는 이런 거 먹는 거 상상도 못 했는데. 세상 진짜 좋아졌다... 권순영은 그런 말들을 하면서 온갖 옛날 기억들을 다 꺼냈다. 이제서야 그나마 추억이라고 미화할 수 있을 만한 것들도, 결국엔 또 어영부영 모두가 함께였어서 이겨낼 수 있었던 것들도 죄다. 하여튼 그 때 김민규 진짜 말 안 들었어. 하고 권순영이 농담조로 웃으며 말을 건네기에, 김민규도 따라 피식 웃으며 무슨 지는 되게 착했던 줄 알아... 하고 핀잔을 주며 대꾸하였다. 권순영도 그 말에 따라 웃기에 김민규는 그냥 비실비실 미소를 건 채 다시 음식을 집어들었다. 권순영은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물잔을 몇 번 입에 대었다 뗐다 할 뿐이었다.
하여튼 그 때 애들 진짜 웃겼는데.
나 사실 내심 속으로 생각했다? 얘네들을 진짜 어떡하지, 하고.
잘 할 수 있을까. 하면서. 걱정도 되고 겁도 나고. 다들 괜찮을까 하면서.
그렇게 어영부영 본 게 벌써 십 년이네.
김민규는 이때까지도 권순영이 무슨 의도로 이 말을 꺼냈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그러게, 십 년도 훨씬 더 되지 않았나? 징글징글하다, 진짜. 하면서 여전히 농담조로 그 말을 받아칠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이제 다들 잘 하잖아. 욕심도 그만큼 늘고, 실력도 그만큼 늘고. 다들 나이 좀 먹고 머리 굵어져서 그런가봐. 그런 김민규의 말에 권순영은 들고 있던 물잔을 내려놓으며 민규의 이름을 불렀다. 민규야. 아까랑은 비슷하면서도 퍽 차분해진 말투에 김민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권순영을 마주보았다. 그 때까지도 권순영은 그냥 가만히 웃고만 있었다.
그치. 이제 다들 잘 하더라고. 엄청엄청.
그래서 이제 괜찮을 거 같더라고.
뭐가 괜찮은데? 라고 되묻지는 못했다. 권순영의 다음 말이 이어진 건 그 말이 끝난 직후였으니까. 김민규가 도무지 의중을 알 수 없는 그 말을 갸웃거리며 곱씹고 있을 때였으니까.
민규야.
나 세븐틴 탈퇴하려고.
김민규가 권순영을 영영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그 때의 일이었다.
*
에이, 형. 빈 말로라도 그런 농담 하지마. 하나도 재미 없어. 그렇게 가볍게 말하고 넘겼어야 했는데. 김민규는 도무지 입을 달싹거릴 수 없었다. 권순영이 너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민규는 우습게도 권순영은 늘 뻔하기 때문에 참 알기 쉽다고 생각해왔었다. 거짓말도 제대로 못 하고, 신나거나 슬프거나 화나거나 그 감정이 죄다 얼굴에 투명하게 비치기 때문이었다. 그 말간 얼굴을 하고서 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해서 곱절로 화가 났던 것들도 있을 정도로 그랬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의 권순영은, 정말 갑작스럽게도 처음 그 메로나 연습실에서 보았던 무서운 군기 잡는 선배 시절보다도 더욱 멀리만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분명 웃는 얼굴을 하고서, 그 크지 않은 눈을 적당히 접어 올리고선. 늘 쉴새없이 말을 뱉어내던 입꼬리도 적당히 올리고서 평이하던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도. 십 년이 훌쩍 넘는 세월보다도 더욱 아득히, 정말 까마득히 멀리 있는 것마냥...
왜?
그래서 김민규가 가까스로 입을 열어서 뱉은 말은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정색이라도 했어야했는데, 아니면 하다 못해 서운하다고 투정이라도 부렸어야 했는데. 그래야 그 얼토당토 않는 권순영의 말이 술자리에서 어쩌다 흘러 나온 허튼 소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질 못했다. 간신히 왜? 하고 묻는 김민규의 말에, 권순영은 별 반응도 않은 채 여전히 잔잔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서는 또 선선히 대답을 뱉는 것이다.
그게 있지, 민규야.
형이 사실은 외계인인데...
지구 생활은 이제 정리해야 할 것 같애서.
나 정말로 가야할 것 같더라. 김민규는 그 말에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그 말을 듣고서야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분노였다. 농담으로라도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을 사람이 뱉은 질 나쁜 발언에, 권순영이 세븐틴을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느꼈던 동반된 어리벙벙하고 괴상한 이질감조차 묻혀버릴 정도의 차가운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형 지금 나랑 장난해? 짜게 식은 김민규가 권순영을 노려보며 뱉은 말은 그것이었고, 권순영은 여전히 그 웃는 낯짝으로 아주 고요하게 김민규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게, 민규야. 장난이면 좋을 텐데. 안타까운 듯 덤덤하게 말하는 그 어투에 김민규는 기어이 테이블을 한 번 쾅 내리쳤고, 권순영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나 한 번 으쓱했다.
형. 아무리 그래도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어.
난 그래도 요새 좀 형이랑 나랑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하. 근데 아닌가보다. 내가 착각했네.
형은 무슨, 무슨 사람이 그렇게 우스워? 할 말 있대서 또 무슨 중요한 말인가, 아님 형 속 얘기라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고 믿은 내가 등신이지? 나는... 형이 그래도 정도는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
형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김민규가 뱉어낸 그 말에는 지난 세월 동안 봐온 권순영의 모습이 꾹꾹 눌러담겨 있었다. 변하지 않을 거라고 굳게 약속한 줄만 알았던, 일종의 암묵적인 금기와 같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에 대한 배신감과 비슷한 마음일지도 몰랐다. 형. 형이 같이 아이돌 하자며. 이제와서 그런 말 할 거면 왜 연습생 때 나를 그렇게 붙잡았어? 그렇게 그만두고 싶었으면 재계약할 때는 또 왜 가만히 있었어? 술에 진탕 취한 그 날에, 그런 좋은 말들을 왜 나에게 형의 진짜 속마음인 마냥 털어 놓았어. 하다못해 다른 표정에 다른 말투에 다른 내용이었으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도 않았을 텐데.
난생 처음보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 내일 뭐 먹을래? 같은 말투를 하고서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뱉으면.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래서 김민규가 그렇게 꾹꾹 마음을 눌러담아 토해낸 일갈에는, 사실 헛소리를 해서 미안하다고 빨리 사과하라는 의중이 조금은 묻어있을지도 몰랐다. 김민규는 이런 권순영은 하나도 몰랐다. 이런 상황 역시도 도무지 알지를 못했다. 아니,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김민규에게는 그런 두루뭉술한 감정과 자글거리며 끓는 마음과는 별개인, 권순영이 얼른 그 말을 부정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고 있었다. 야 미안하다 민규야, 까지는 바라지도 않으니까. 어우 취했나. 별 소리를 다 했네. 라고 무심하게 대충 대꾸해도 되니까. 아무튼 적당히 이 상황이 마무리만 된다면 그 이후로는 정말 권순영 상종 못할 사람이라며 지긋지긋하게 화를 내든, 아니면 뭐라 더 쏘아붙이든. 그렇게 해버리면 되니까...
하지만 권순영은 언제나 김민규의 생각 밖에서 노는 사람이니까.
권순영은 여전히 그 의중 모를 이상한 표정을 짓고서, 이제는 아예 그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휘어져라 웃는 얼굴을 하고서.
김민규가 은연 중에 바랐을 그 여러가지 말들 중 단 하나와도 비슷하지 않은 말들을 뱉어내고야 말았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아니, 사실은 그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이지... 내가 너무 분위기를 잘못 잡았나? 그래도.
네가 아니면 안 되더라. 민규야.
나중에 생각 바뀌면 연락해주라. 김민규는 권순영의 말을 듣다 말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였다. 김민규는 정말 개쩌는 숙취와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애써 몸을 일으키려다가도, 아주 지끈대며 존재감을 뽐내는 제 두개골 때문에 김민규는 결국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관두어야 했다. 이따 스케줄 갈 때 컨디션이라도 한 병 사가야겠네. 하필 오늘은 오후에 단체로 고잉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그 말은 어제 그 난리를 치고선 다시 멀쩡한 낯으로 권순영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김민규는 오른손을 들어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애써 꾹꾹 눌렀다. 그래, 이 두통이 사실 아주 숙취 때문은 아님을 인정해야겠다.
어제 무슨 정신으로 집에 들어왔는지를 모르겠다. 먼저 집에 도착해있던 전원우가 멤버들이랑은 잘 놀다 왔냐고 묻기에, 어영부영 대충 괜찮았다고 답하고는 냅다 씻으러 화장실로 향해버렸던 것도 같다. 한참 동안 찬물을 맞으며 권순영의 말들을 곱씹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말도 안되는 것 뿐이었다. 관두기는 뭘 관둔다고. 아니, 애초에 외계인 타령은 또 뭐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믿는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권순영이 이번에도 도를 넘은 장난을 친 것이 분명했다. 아주 실례되고 무례할 말들을 잔뜩 늘어놓으면서까지 지독하게 고약한 농담을 하고 싶었던 것이 뻔했다. 삼십분 가까이 김민규가 찬 물을 맞으면서 내린 결론은 아무래도 그것 뿐이긴 했다. 그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말이 되지를 않아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 생각 끝자락 마다마다 달라붙는 건 그 난생처음 보는 이상한 권순영의 웃는 얼굴이라.
김민규는 그저 참담한 마음으로 샤워기의 물을 껐다. 도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김민규는 전원우와 함께 촬영장으로 향하면서도 한 마디 입을 떼지를 않았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편의점에 컨디션을 사러 가면서도, 촬영 대기실에 도착해서도 핸드폰에 고개를 쳐박고는 한 순간도 얼굴을 들지 않았다. 바지 주머니에는 원쁠원이라 하는 수 없이 하나 더 생겨버린 컨디션이 굴러다녔다. 어제 그런 말들을 내뱉아놓고도 연락 한 통 없는 권순영이 내심 야속하기만 했다. 권순영은 오늘도 촬영에 지각할 모양인지 열두명이 모두 모이고 촬영 예정 시간이 가까워지도록 대기실에 얼굴 하나 내비치질 않았다. 카톡은 여전히 잠잠하다. 주변은 각자의 얘기를 하느라 떠들썩하기 짝이 없다. 권순영. 그놈의, 권순영.
결국 촬영을 시작하기로 한 세 시가 되었다. 이제 다들 촬영 들어가실게요. 스탭 분의 낭랑한 목소리에 주변 멤버들이 하나 둘 자리를 옮길 준비를 한다. 그제야 핸드폰에서 고개를 뗀 김민규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본다. 없다. 그 동그랗고 말간 얼굴이 아직 없다. 권순영이 오지 않은 거다. 개인 스케줄은 당연하거니와, 단체 스케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지 않던 권순영이. 촬영 시작을 지연시키기는 커녕 어떠한 이질감도 없이 다들 녹화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모습에 김민규는 냅다 옆에 앉아 있는 이석민을 붙잡고 물었다. 석민아. 순영이 형은? 그 형 나만 빼고 너네들한테 연락 돌렸어? 오늘 못 온다고?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영 이상하다.
순영이 형이 누구야?
이석민은 그 맹탕한 얼굴을 하고선, 정말 진심으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마냥 대꾸를 하는 것이다. 아, 우리 이번에 새로 들어온 매니저 형? 그 형 오늘 사정 있어서 영진이 형이 대신 하기로 하셨잖아. 김민규는 이 말을 들을 때까지도 대화의 흐름을 하나도 이해하지를 못했다. 에이, 무슨 소리야. 그거 말고... 우리 순영이 형 있잖아. 호시 형. 그 형 오늘 스케줄 빠진대? 어제 나랑 술 먹을 때 보니까 뭐 쫌 이상하긴 했는데. 그렇게 답을 해도 여전히 변하는 건 없는 것이다.
민규야.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그렇게 되묻는 이석민에게 김민규는 뭐라 대답해야했지? 순영이. 권순영... 호시 형 말이야. 이 반응 뭐지? 우리 벌써 고잉 촬영 시작했어? 아니잖아. 김민규는 반쯤 얼이 빠진 채로 되는 대로 단어들을 뱉어냈다. 미적거리는 김민규에 주변으로 멤버들이 조금 더 모였다. 자꾸 눈 앞에 어제 그 되도 않는 소리를 뱉어내던 권순영 얼굴이 일렁거렸다. 쎄했다. 이상했다. 어제부터 다들 왜 이러지? 다들, 이렇게, 얼토당토 않는 것들만 하면서. 다들 왜 이렇게...
형 정말 미안한데. 나 아까부터 듣고 있긴 했거든?
근데 형 지금 진짜 뭔 소리야?
그리고 이어 들려오는 목소리에 갈 길 잃은 김민규의 눈동자는 기어이 부승관에게로 향했다. 부승관은 진심으로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김민규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어쩐지 알 수 없는 걱정까지 서려 있었다. 김민규는 뭐라 뻐끔거리며 입을 열려다가 도무지 나오는 말이 없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형 나 재미없어... 어어, 아니 나 쫌 무서울라 그러거든? 왜케 진짜 진지하게 막, 어? 그러지? 진짜 뭐 있는 것처럼? 김민규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이을 수 없었다. 나머지 열 한 명의 눈동자가 죄다 자신에게로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 치의 장난도 없다는 진심 가득한 눈빛. 굉장히 진지하게, 누구는 나를 걱정하고 누구는 나를 이해하지 못한 듯이 보는 그 시선들. 단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열 하나의 눈빛들이 진짜 숨통을 콱 쥐는 느낌이 들어서.
아니, 아니야. 내가 착각했나봐 형들. 잠시만...
김민규는 그 말 하나를 간신히 남기고 급히 자리를 뛰쳐나갔다. 설마, 진짜? 에이. 아니잖아. 김민규는 그 때까지도 사실 현실 감각이 죄다 죽어있었다. 아니, 애초에 이게 현실인 게 말이 안 되잖아. 어제 권순영이 지껄었던 개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리는 기분이었다. 나 세븐틴 탈퇴하려고. 그렇게 말하던 권순영 얼굴이 진짜 이상했는데. 왜? 하고 되물으면, 지구 생활은 이제 정리해야 할 것 같다던 권순영 말들이 되게 기도 안 차는 헛소리들이었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래야 되는 게 맞는데.
김민규는 급히 인터넷을 켰다. 뜨는 창에 몇 번이고 오타를 내가며 호시 두 글자를 검색했다. 뜨는 게 없다. 일본어 호시나 몇 개 나오고 말았다. 이번에는 권순영이라고 쳐봤다. 역시 나오는 것이 없다. 웬 옛 정치인들이나 나올랑 말랑 했다. 김민규는. 김민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세븐틴을 검색했다. 세븐틴 멤버들의 이름이 줄줄이 떴다. 데뷔일도 로고도 전부 기억하던 그것들인데, 그 사이에 박힌 제 이름까지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전부 그대로인데. 그 사이 호시 두 글자만이 없다. 권순영만이 없다.
진짜로 권순영이 없다.
권순영이 그 개소리를 늘어놓으면서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이 가슴에 쿵 떨어졌다. 나 정말로 가야할 것 같더라. 권순영은 나 이제 가려고, 도 아니고. 잠시 다녀오려고, 도 아닌 가야만 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심지어 제 반응을 예상한 양 덧붙이기까지 했다. 네가 그렇게 대답할 줄은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만약에 생각이 바뀌면 연락해달라고 했다. 기다리겠다고까지 했을까? 그건 김민규가 중간에 뛰쳐나가서 알 도리가 없었지만. 아무튼 김민규는 빌어먹게도 그제야 알아버린 것이다.
권순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권순영은 정말로 가야하는 거다.
더 정확하게는, 이딴 게 바로 그 간다는 말의 의미였던 거다.
김민규는 그 때, 정말로 왜냐고 되물었어야만 했다.
*
이 세상에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물으면, 그에 대한 김민규의 답은 글쎄요. 딱 이 세 글자 정도였다. 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있어도 있는 대로 말이 되고 없어도 없는 대로 말이 되고. 그렇지 않을까요? 아무튼 뭐든 나랑 크게 관련 있는 얘기는 아니잖아요. 김민규는 정말 그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런 질문은 고잉에나 가끔 토론 주제로 나올법한 질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가끔 한솔이 같은 애들이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큼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리 없다며 열띤 주장을 펼쳐놓아도, 김민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흘려 듣기만 했었다. 근데 권순영이 외계인이랜다. 근데 그것도 진짜로 외계인이랬다. 그래서 이제 지구 생활은 정리하고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탓인지는 몰라도, 지금의 권순영은 진짜로 세상에서 아주 영영 다 지워져서 죄다 잊혀버렸다. 십 년 넘게 동거동락한 멤버들도, 어쩌면 가족들도. 아니. 애초에 가족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근데 그런 주제에 김민규만 권순영을 안댄다. 걔랑 볼 꼴 못 볼 꼴 다 보며 동거동락한 시간이 십 년이 훌쩍 넘는데. 그런 놈이 외계인이랜다. 그래서 아주 다 세계에서 훌쩍 떠나야 한다는데. 근데 하필 나만 걔를.
나만 걔를 기억한다.
왜 하필 내가?
김민규랑 권순영은 사실 그렇게 딱 엄청 잘 맞는 존재들도 아니었잖아. 요새야 뭐, 가끔은 조금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쩌다 권순영이 건네주는 말이 제법 다정의 형태를 띠기는 했지만. 그래도 제일 자주 싸우는 둘을 꼽는다면 항상 우리였고, 애초에 권순영도 나보다는 윤정한 같은 형들을 더 아끼면서 쫄래쫄래 따랐는데.
왜 하필 나일까.
내가 아는 권순영은, 그냥 김치 퍼먹는 걸 좋아하고 호랑이에 집착하는 좀 바보 같고 사고뭉치에 고집불통인 햄스터 닮은 형이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안 맞는 그런 형이었는데.
그래도 언제나 진심을 다할 줄 알고. 그래서 더 순진한 부분도 있고, 또 그래서 스스로를 불태울 줄도 알고. 그만큼 땀도 눈물도 열정도 많은
정말 딱 그런 존재였는데
어쩌다가?
나는 이 모든 게 진짜 다 그냥 막연하고 막막하고 갑작스럽고
하나도 현실 같지 않은데
김민규는 무슨 마음으로 촬영을 마쳤는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다. 화면에 담겼을 김민규의 모습은 아마 굉장히 얼뜨기 같이 보일테지만 그건 아무래도 신경쓸 바가 아니었다. 김민규는 촬영이 끝나자마자 냅다 아무렇게나 인사를 던지고는 화장실로 뛰쳐가 핸드폰을 들었다. 아직까지 카톡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권순영과의 카톡방을 누른 김민규는 권순영과 나눈 대화를 차마 올려다보지도 못했다. 한참을 거기에 머무르며 오래 고민한 끝에야 간신히 겨우 한 마디를 보낼 수 있었다.
형
나 이제 형 말 믿어
김민규는 그 카톡을 보내는 순간까지도 이 연락의 1이 영영 지워지지 않으면 어쩔까 싶어 애가 닳았다. 걱정이 무색하게, 권순영은 아주 금방 김민규의 연락을 읽었다. 금세 흔적도 없이 지워진 숫자 1의 위로 권순영의 답이 새겨졌다.
그래?
그럼 민규야 우리
애슐리 털러 갈래?
나 너랑 그거 꼭 해보구 싶었어...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에 김민규는 그대로 주르륵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이 형은, 이 형은 정말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지금 세상이 이 지경이 난 걸 형은 알고 있어? 아니. 이 지경이 날 거라는 걸 사실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근데 왜 형은 전부터 자꾸 이 모든 게 지극한 일상인 것마냥 이런 말들만 뱉어, 나한테.
아무래도 김민규는 영영 권순영을 모를 듯 싶었다.
*
김민규는 그렇게 애슐리에서 권순영과 만났다. 도대체 왜 애슐리여야 하는지는 정말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나랑 꼭 그걸 하고 싶었다는데 그럼 또 뭘 어쩌겠는가. 김민규는 그 답을 받고서 십오분 정도를 더 고민하다가 권순영네 오피스텔에서 가장 가까운 애슐리의 좌표 하나를 덜렁 보냈다. 답장을 받은 권순영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지금 출발할게. 그렇게 담백하게 답하는 것이 전부였기에, 김민규는 행여나 권순영이 먼저 도착해서 오래 기다리기나 할까 답을 돌려받자마자 급히 운전석에 앉았던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애슐리에서 권순영이 갑자기 사라져버린다거나, 혹은 다시는 마주할 수 없게 된다거나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김민규는 행여나 사람들에게 들킬까 검은 볼캡을 최대한 눌러 쓴 채 권순영 같은 동그란 머리통을 찾자마자 그리로 급히 뛰어갔고, 권순영은 숨까지 헐떡이는 김민규를 보고선 적당히 웃으며 오래 기다리지 않아 괜찮다는 말을 덧붙일 뿐이었다. 얼른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에게는 이제 더 이상 어떠한 모자도 마스크도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입고선 챙이 큰 모자를 꼭꼭 눌러 쓴 김민규와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 김민규는 형 모자... 까지 습관적으로 이야기를 꺼냈다가 아차 싶어 다시 말을 거두었고, 권순영은 또 허허실실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말 끝을 잡아채서 듣고 싶지도 않던 답을 돌려주었다. 나 이제 일반인이랑 다를 바 없어서 괜찮아. 김민규는 그 말에 굳이 대답을 달지 못했다.
김민규와 권순영은 아무튼 어렵지 않게 자리에 앉았다. 직원 분이 자신을 알아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법 구석진 자리를 배정받게 되어 다행이었다. 김민규는 내심 권순영이 무슨 말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애슐리라는 장소가 솔직히 무슨 얘기를 나누기에 적절한 장소는 아니겠지만. 나름 권순영의 말 같지도 않은 진실을 김민규가 드디어 인정하게 되었고, 또 아마도 유일하게 그 진실을 알고 있을 사람으로써 김민규는 권순영이 제게 무슨 말이라도 해줄 줄 알았다. 근데 권순영은 그게 아니었나보다. 자리에 앉자마자 권순영은 김민규의 손을 잡고 이끌더니 접시 가득 음식들을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여기 퀸즈라서 맛있는 거 많겠더라. 그렇게 말하며 제 접시 위에 뭔 랍스터를 한가득 올려주는 권순영을 보며, 김민규는 이 형이 정말 진짜 밥 먹으러 온 거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권순영이 드디어 입을 뗀 것은 적어도 세 접시를 가득 비우고 난 뒤였다. 이제 식단 관리도 안 해서 좋다는 너스레를 떨며 김치투움바리조또를 한가득 먹어치운 권순영은 그제야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김민규를 슬쩍 바라보았다. 민규야. 나한테 혹시 묻고 싶은 거 있어? 뭐 제대로 입에 대지도 못한 김민규는 그제야 입술을 달싹이며 성대를 긁었다.
형. 형이 돌아간다고 한 거...
그게 이렇게 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계속 같이 있었던 멤버들도 다. 정말 모조리.
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의미였어?
그럼 권순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또 살짝 웃으며 대답하는 것이다. 응. 그런 거야.
내가 그렇게 했어.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의 표정은, 아. 또 지긋지긋하게도 그 얼굴이었다.
*
Q. 형은 언제 지구에 온 거야?
A. 몰라, 기억 안 나. 암튼 돌도끼로 사냥하던 시절은 아니었을 걸. 너도 세 살 때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못하잖아. 넘어가자.
Q. 지구에는... 왜 온 거야?
A. 그냥 재밌을 거 같애서...라고 말하면 별로야? 근데 진짜야. 내가 쫌 심심한 거 못 견디는 거 알잖아. 내가 태어난 별은 진짜진짜 재미 없는 곳이었거든. 이래저래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지, 뭐. 근데 살다보니까 여기가 젤 재밌어가지구. 지구가 야아, 도파민 천국이야. 알아? 인터넷이며 뭐... 아무튼 문명이 대박이라고.
Q. 가족들은 어쩌고?
A. 아마 다들 고향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원래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어서 걱정 하나도 안 하실 걸. 혹 하나 뗐다고 생각하시겠지. 혼자 냅둬도 알아서 잘 살 놈인 거 제일 잘 아실 거고.
Q. 어쩌다 외계인이 아이돌까지 하게 된 거야.
A. 글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네. 근데 내가 아이돌 안 하기에는 쫌 재능이 아깝지 않냥.
Q. 어어... 그래. 일단 형이 돌아가려고 하는 건 알겠고. 그럼 언제 돌아가야 해?
A. 그건 잘 모르겠어. 아마 너무 무더워지기 전에. 밤이 가장 짧아지기 전에. 아마 그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거야. 너도, 나도.
Q. ...이해는 안 되지만, 아무튼. 그럼 이제 좀 진짜 묻고 싶었던 걸 물어볼게. 형은 왜 돌아가야 하는 거야?
A. ...그게. 좀 웃긴 이야긴데. 막차다.
Q. ......예?
A. 서울 지하철 언제가 막차더라. 열두 시? 그거 놓치면 아침 첫 차 타야 하잖아. 대충 그런 거야. 지구랑 내가 사는 별이랑, 왕복 우주선이 아주 자주 있지는 않거든. 이번이 막차 같은 거야. 이거 놓치면 좀 오래 기다려야 해. 그래서 그래. 막차랑 첫차 사이 간격 원래 쫌 길잖아. 그런 거지.
여기까지 물은 김민규는 말을 조금 골랐다. 김민규는 아직, 권순영이 가장 처음에 했던 자신이 모두의 기억을 직접 지웠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민규는 처음 권순영의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졌음을 깨달았을 때 뭔가 굉장히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었다. 세상에서 무언가의 존재가 통째로 사라지는 건. 그리고 그걸 자신 혼자만이 아는 것은 굉장히, 굉장히 이질적인 느낌이었으니까. 그런데 권순영은 아주 담담하게 제가 직접 그리 되도록 하였다고 했다.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다. 평상시의 농담 따먹기와 다르지 않은 말들만을 가득 늘어놓았다. 죄다 장난스러우면서도 아주 말이 안 되지는 않게. 그렇게 뱉어지는 말들은, 어느 쪽이 정말의 진심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가볍기만 했다. 그래서 김민규는 이번에는 권순영의 눈을 피하지 않은채 최대한 담백한 목소리를 꺼냈다.
그게... 그렇게까지 사람들의 기억을 다 지우고까지 돌아가야 하는 이유인 거야?
그러자 권순영은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아까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목소리 톤으로 답을 이었다.
민규야. 만약 내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첫차가 너무너무 멀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겠어. 세븐틴 군백기 이십년 되면 그거 다 니 탓인 거야. 이해했어?
돌아와서 다시 기억 돌리면 되지. 돌리는 걸 할 수 있으니까 지운 거야.
...남은 사람들이 너무 아플 거잖아. 군대 이 년도 인간한테는 긴데, 나는 그거보다 짧을 리가 없으니까. 얼마가 될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기약없이 기다리게 될 거니까.
그래서 그랬어. 있잖아, 인간들은 생각보다 기다리는 걸 잘 못 해. 기다리는 건 되게... 생각보다 아파. 네가 안 기다려봐서 모르는 거지. 권순영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그렇게 돌아온 답은 김민규가 생각한 것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이유였고, 김민규가 예상한 것보다는 훨씬 더 덤덤한 목소리였다. 여지껏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던 권순영은 이 말을 할 때만큼은 처음으로 눈길을 테이블 위로 내리고 있었다. 네 기억도 지우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당황하고 놀랐지. 미안해. 사실 그 말을 제일 처음에 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너를 배려하지 못했다. 그치. 방법을 찾는 대로 어떻게든 해볼게.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에게 김민규는 딱 한 마디 말을 더 붙였다. 형.
그렇게까지 돌아가고 싶어?
권순영은 그 말에는 다시 고개를 들어서 김민규를 바라봤다. 권순영은 다시 웃고 있었다. 다시 또, 딱 그 때의 이상한 얼굴 그것을 하고 있었다. 웃는 듯 웃지 않으면서. 하필 또 쬐깐한 눈이라서 웃는지 우는지 눈동자도 제대로 읽을 수 없게 치사하게 웃어버리는 얼굴. 바로 그 낯을 하고서, 권순영은 뜸을 들이다 바람 빠지는 웃음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글쎄.
나는 원래 거기에 있어야 하게 만들어진 거잖아.
너무 오래 여행 와있을 순 없는 거야.
그냥 그게 전부야.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 목소리는 평소랑 참 같았는데. 권순영은 그렇게 말을 툭 던지고서는 나 이제 파스타 먹을래, 하고 자리에서 툭 일어서버렸다. 김민규는 본능적으로 권순영이 오늘은 이 이상으로 대화를 할 마음이 없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굳이 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권순영이 다시 기억을 돌리지 않으면, 권순영은 정말로 영영 세상에서 다 지워지는 거구나.
나 하나만을 겨우 예외로 두고.
하고서.
*
권순영이 언젠가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그것도 아주 영영 다 지워진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근데 또 하필 알 수 없는 이유로 자기만 쏙 그걸 못 잊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김민규는 그 모든 것을 티 내지 않기 위해서 부던히 애를 썼지만 말 그대로 조금 멍청해지고야 말았다. 단어 그대로 이제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서였다. 평소대로 권순영을 대하기에는, 김민규의 바로 그 평소에서 권순영의 존재는 전부 다 지워져버렸는데. 그렇다고 뭔가 특별한 걸 하기에는 죄다 새삼스럽고 낯설기만 한데. 게다가 권순영이 없어졌다 한들, 김민규는 여전히 세븐틴 민규로 눈코뜰새 없이 바삐 살아야 했다. 그냥 말 그대로 권순영만 쏙 빠져버린 거다. 근데 그게 정말 우스울 정도로 하나도 표가 안 날 뿐이었고.
이제 김민규는 연습을 하다 보면 다른 멤버들과 부딪히고, 동작을 틀리는 일이 종종 생겼다. 이 또한 결국 권순영의 탓이다. 김민규는 권순영과 함께 연습한 열 세명 세븐틴의 춤들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권순영이 지워진 열 둘 세븐틴의 노래는 죄다 초면이었다. 제가 외우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기는 했지만 세부적인 동선이나 파트 분배는 자잘하게 다른 점이 많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 마냥 처음부터 권순영이 없던 걸 상정한, 김민규에게 지극히 낯설 그런 동선들을 너무나 완벽히 해냈다. 따지자면 그게 정상이긴 했다. 그들에게는 사실 처음부터 권순영이 없던 게 맞으니까. 정말 완벽하게 죄다 지워진 거니까, 굳이 책임을 묻자면 그들이 평범한 것일 테고 자꾸만 삐죽 튀어나가는 김민규가 비정상인 것일 테다. 아, 미안. 김민규는 무언가 틀릴 때마다 뱉어내는 그 심심한 사과가 이제 너무나 잦아졌다.
하지만 정말로 기분이 이상해질 때에는 그렇게 자꾸만 실수를 할 때 보다도, 오히려 김민규 역시 아무런 실수 하나 없이 모든 연습을 매끄럽게 마무리할 때였다. 어, 나 왜 권순영이 없는 게 자연스러워졌지. 그 전에 왜 권순영이 없는 걸 내 몸이 본능적으로 알고 있지? 그렇게 한 번 생각하게 되면, 또 그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진짜 그 권순영이라는 사람 하나가. 사실 사람도 아닐 그 외계 존재 하나가... 그게 정말로 김민규와는 정말 시작점부터가 완전히 다르고, 그래서 또 이제 영영 지워질 예정이고. 결국에는 휴지통 딸깍해서 딜리트 한 것 마냥 없어질 거라는 게 체감 되는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김민규의 가슴 속은 죄다 위아래로 울렁거렸다.
그래, 그런 상황에서 도대체 김민규가 뭘 해야하냐고.
김민규는 진짜로, 진짜로 권순영이 무슨 마음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정한이 형 있잖아.
어엉, 밍구 왜.
곧 헤어질 사람이 같이 애슐리 가서 밥 먹자는 건 무슨 심리일까?
텨허허 우리 밍구가 형 모르게 언제 연애를 시작했담.
아님 이별 예정인 사람이랑 하기 좋은? 그런 거 있어?
밍구가 요새 참 많이 피곤한가부네 별 얘길 다 하고...
답답한 마음에 슬쩍 옆에 앉은 윤정한에게 별 시답잖은 말로 운을 띄워보았지만, 그건 정말 그 뿐이었다. 김민규는 돌아오는 윤정한의 너무나 당연한 반응에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요새 윤정한은 전원우랑 유닛 데뷔 준비를 한다고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머리도 검었다 하얬다 아주 난리였다. 캐럿들이 우리 조합 낯설다구 생각하면 어쩌지. 텨허허. 윤정한은 언제나와 같은 그 실없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런 농담을 따먹었지만, 김민규는 어쩐지 그 케케묵은 세븐틴 A팀이니 뭐시기 같은 조합이 떠오르는 탓에 도무지 웃을 수 없었다. 권순영이 사라지기 전의 세상이라면 둘이 아니라 셋으로 유닛곡을 냈을까. 아니, 분위기를 보면 아마 권순영이 있었어도 처음부터 둘을 상정하고 만든 곡인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뭔가... 김민규는 그냥 요새 모든 것이 다 그랬다. 권순영이 떠오를 때면 전부 그렇게 됐다. 슬픈가? 아쉬운가? 마음을 제대로 뜯어서 들여다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그렇게나 출렁거렸다. 자신의 기억 역시도 곧 지워주겠다고 하며 미안하다고 덧붙였던 권순영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딱 이상하다는 표현이 최선이었다. 그러니까, 그냥.
상상이 하나도 안 가는 일인데.
자꾸 이게 현실이라고 하는 이상한 것들만 잔뜩 늘어놓아지고.
근데 그게 진짜 현실이 맞게 될 예정이라서...
형이 뭔가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려면 너가 쫌 더 자세히 말해줘야 하지 안으까, 밍구야.
대충 듣고 흘리는 줄 알았더니, 윤정한도 나름 그렇게 입을 떼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입을 꾹 다문 자신이 어느 정도는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었다.
...그게 있잖아, 형.
어우, 나는 막 헤어질 예정인 사람이라길래. 이혼 반려 기간? 뭐 그런 건가 했잖아. 우리 밍구가 원래 끝을 정해놓고 연애 하는 그런 얼굴값하는 사람인가 하고...
형한테 내 이미지 뭔데?
아무튼. 어느 쪽이야? 네가 그 사람이 싫어서 정리하려고 마음 준비 중이야? 아니면 반대?
그거 둘 다가 아니면,
그럴 예정일 사이는 하나밖에 없잖아.
그 말을 하는 윤정한은 실없이 웃고 있었으나 가벼워보이지는 않았다.
윤정한은 꼭 그렇게 허허실실 웃으면서 정곡을 지르는 구석이 있었다.
*
윤정한의 말로 김민규는 깨달았다. 김민규는 이제 이 얘기를 꺼내려면 권순영을 남들에게 어떻게 소개해야할지 부터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알고보니 외계인이었던 나의 십 년 지기 형, 같은 웹소설 제목보다도 못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김민규를 미친 놈 취급할 게 뻔했으니까. 김민규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유학을 간다는 핑계였다. 아주 멀리멀리 가는 거라는 측면에서는 얼추 비슷한 점이 있었다. 권순영이 뭐 짧은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 데다가 보통의 유학은 제법 긴 시간을 칭할 때 쓰이는 표현이니까. 김민규가 그렇게 머리를 굴리는 동안, 윤정한은 그새 보고 있던 핸드폰도 내려놓은 채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괴고선 김민규를 빤히 바라봤다. 뭔가 더 깊은 얘기가 있다는 걸 얼추 눈치라도 챈 모양이었다. 김민규는 얼른 입을 떼어야만 했다.
...그게. 그 사람이 아주 멀리 유학을 간대.
그으래? 그냥 유학인데 밍구가 뭐가 그렇게 또 고민이었을까. 뭐, 아웃사이트 아웃마인드라고.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지고, 막 그런 거? 근데 그런 거 치고는 고민이 더 많아 보였는데.
이걸 아주 저 멀리 우주 별로다가 유학을 간다고 할 수도 없고... 김민규가 적절한 유학의 장소를 정하는 동안, 윤정한은 이제 대놓고 본격적으로 김민규에게 캐묻기 시작했다. 그래도 요새 밍구야, 문명이 말이지. 아주 참 발달해서 사람이 쫌 멀리 간다구 아주 마음 아파하고 그럴 것까진 또 없다더라. 페톡? 그런 것도 화질이 얼마나 좋게. 전화는 또 얼마나 잘 터지게. 시차만 잘 감안하면 되지이. 아니 뭐, 우리도 애초에 해투를 얼마나 자주 가는데. 그렇게 능글능글 웃으며 말하는 윤정한에게, 김민규는 입술을 한 번 감아물며 또 애꿎은 변명만 늘어놓았다. 그게, 그치. 형 말이 다 맞는데...
그 사람이... 음. 제약이 좀 많네.
왜. 로밍 같은 거 안 한대? 카톡도?
어어, 그렇대. 뭐 카톡 지우고 본업에 충실하고 싶다나... 요양하고 싶다나...
어디 아파서 가는 거야? 그렇게 묻는 윤정한의 말에, 김민규는 그런 건 아닌데... 하고 또 말끝을 흐렸다. 그렇게 대답하는 동안에도 김민규의 머리는 또 빠르게 팽팽 돌아가고 있었다. 있지, 형. 유학인데. 연락은 아예 못 할거고. 나는 편지를 부칠 수도 없어. 어디로 가는지는 당연히 몰라. 그냥 아주아주, 지인짜 빌어먹도록 멀다는 거 하나만 알아. 그 사람은 가족도 친구도 없어서 같이 추억할 사람은 나밖에 없고. 그냥 나는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만 할 수 있는 건데...
그렇게 구구절절 생각하다 보면 김민규의 머리 속을 퍼뜩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하나 있다.
그 사람이 가고 나면 나는 정말 기다리는 것밖에 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한정적이고...
...이거 그냥 시한부랑 다를 게 뭐야?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바쁘게 돌아가던 김민규의 머리도 그대로 가동을 멈췄다. 그래, 사실 유학보다는 그 표현이 조금 더 직관적일지도 모른다. 타인에게는 우리의 사이를 시한부라고 소개하는 편이 지금의 김민규와 권순영을 더 잘 표현해줄지도 몰랐다. 윤정한에게 지지부진 이상한 말로 뱅뱅 돌려가며 묻는 것보다, 나한테 소중한 사람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는데 같이 뭘 하면 좋을까. 하고 묻는 게 더 확실한 답을 돌려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근데 그냥 그렇게 말하기가 싫었다. 그렇게 말하면, 정말로 권순영이 영영 사라지는 것 같잖아. 아닌데. 권순영은 이게 막차라서 가는 것 뿐이라고 했는데. 그래서 나중에 다시 첫차 타고선 돌아올 것처럼 말해 줬는데. 그게 이 년일지 이십 년일지 그걸 몰라서 이러고 있을 뿐이지. 나까지 남들에게 그렇게 말해버리면... 권순영을 알고 있는 유일한 나마저도 그렇게 권순영을 표현해버리면. 권순영은 어떡하라고?
윤정한은 여전히 제게서 시선을 뗄 생각 없는 채로 가만 자신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김민규는 그냥 아무튼 가야한다는 말 한 마디로 어영부영 대화를 마무리했다. 아무튼 꼭 가야한대. 그렇대. 그렇게 됐대. 제가 생각해도 제법 억지에 가까운 그 말은 윤정한은 그냥 얌전히 들어주고는 그렇구나아, 하고선 그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눈치 빠른 윤정한이 다른 무언가를 상정하고서 그렇게 일부러 대화를 마무리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김민규로써는 그저 이 이상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일 뿐이었다. 손가락을 톡톡 두드리던 윤정한은 그 얌전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음. 그냥... 이제와서 뭐 새로 하려고 하지 말고, 민규야.
나라면 그냥 하던 대로 할 거 같아. 새삼스레 구는 게 그 사람한테는 더 어려울지도 모르잖아.
하고 싶은 거 있다고 하면 그런 거나 같이 하고.
그러다 보면 너한테도 너무 하고 싶고 이거 안 하면 후회할 거 같은 게 생기는 순간이 오겠지. 그럼 그 때는 또 그걸 하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애. 그렇게 말하는 윤정한의 목소리가 제법 진지해서, 김민규는 그 하던대로가 뭔지가 이제 헷갈린다는 말까지는 꺼내지 않기로 한다. 윤정한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권순영이라고 또 새삼스러운 뭔가를 김민규에게 굳이 바라겠는가. 아무튼 십 년 넘게 봐온 세월 동안의 제 모습이 있을 텐데. 그냥...
그 사람에게 남은 유일한 마지막 일상이 김민규라는 존재 하나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럼 나라고 또 괜히 어렵게 권순영을 대하는 게 더 불편해지는 일일 수도 있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또 물었다. 김민규는 적당히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윤정한은 그 쌍꺼풀 진한 눈을 슬쩍 접어 웃으며 우리 밍구가 형한테 이런 얘기도 하고 다 컸네에, 나중에 연애 상담도 꼭 형을 제일 먼저 찾아주길 바라. 하며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윤정한은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김민규도 따라 핸드폰을 쥐었다. 그래, 일단 권순영에게 남은 일상은 결국 나 하나인 거잖아.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하다 못해 내가 뭘 해야하는지도 도무지 모르겠긴 하지만. 떠날 때까지 아주 다 생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니까. 여지껏 둘이 다툼을 하고 화해를 할 때마다 먼저 입을 떼는 것이 대부분 김민규였듯, 이번의 김민규도 또 지는 셈 치고 한 번 더 먼저 권순영에게 말을 붙여볼 결심을 했다. 김민규는 한참 권순영의 카톡 대화창을 띄워 놓고 망설였다. 대화는 저번 애슐리를 다녀온 이후로 하나도 갱신되지 않았다. 김민규는 형 지금 뭐해? 그 한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다. 형 뭐해? 형 지금 바빠? 순영이 형 밥은 먹었어? 엇비슷한 문장들이 한참 대화창을 뱅뱅 맴돌았다. 그러다, 삐끗.
권순영 지금 뭐ㅎ 1
아. 조졌다.
하필 또 쓰다 만 문장이 미끄러져서 보내질 건 또 뭐야? 김민규는 급히 보내진 문장을 꾹 눌러 대화를 지우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보낸지 삼십 초도 지나지 않아 그 메시지의 1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1이 지워져버린 카톡창을 보자 김민규는 오타를 다시 주워담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화면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삼 분 정도 지나자 권순영으로부터 답이 돌아왔다. 김민규의 그 오타는 전혀 개의치도 않는 듯, 그냥 꿋꿋하게 자기 할 말만 덜렁 보낸 지극히 권순영다운 답이었다.
민규야 나 있잖아
정한이 형이랑 애들 밥 사주고 싶어
*
핑계는 정기모임이었다. 공교롭게도 며칠 뒤 토요일이 약속된 정기모임 날이었고, 그보다 더 공교롭게도 이 날의 모임 주최자는 하필 김민규가 아니라 이찬이었다. 찬이가 또 뭐 몸이 근질근질했는지, 아니면 승관이한테 옮았는지. 구기종목하고 놀면서 몸을 쓰고 싶어했던 것 같은데. 갑자기 벌컥 애들에게 굳이 밥을 사고 싶다는 권순영 때문에 김민규는 찬아 혹시 바쁘니 괜찮으면 형이 꼭 좀 부탁하고 싶은게 있는데... 라는 구애인스러운 말로 이찬에게 연락을 넣어야했다. 내가 있지 정말 개쩌는 식당을 찾았는데 엄청 어렵게 예약 기회를 얻어가지구. 제발 이번 정기모임 순서 형한테 양보해줄 수 없을까. 김민규는 그렇게 싹싹 빌어서 간신히 이찬에게 정기모임의 권한을 양보받았고, 또 그 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정말로 개쩌는 식당을 어떻게든 찾아서 예약해야만 했다. 김민규는 팔자에도 없는 발품을 한참 팔았다. 그리고 정말 단어 그대로 뒤집어지게 화려하고 그만큼 또 비싼 식당을 간신히 예약해내고야 말았다. 워낙 프라이빗한 곳이라 그곳에서 권순영이 어떻게 밥을 사려고 그러나, 싶기도 했지만 어차피 알아서 잘 하겠지 싶은 마음에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기로 했다. 한낱 지구인이 외계인을 걱정해서 뭐 한다고.
아무튼 정말 다행스럽게도 요리는 제 핑계에 맞게 정말로 쩔어주게 맛있는 것 같았다. 코스 요리가 기본이라 하여 인원 수도 많은 데다 먹성까지 좋은 애들이 전부 감당되려나 했는데, 메인 메뉴를 가득 한 상 차려놓고 자꾸 추가 요리가 나오는 식이라 다행스럽게도 먹고 떠들고 놀기에 문제가 없었다. 뭔 생소하니 처음 보는 샐러드에도 온갖 금가루 같은 걸 뿌려주는지. 애들이 잘만 먹다가도 종종 민규야 너 통장 괜찮겠냐? 같은 말을 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할 수 있겠다. 평소의 김민규라면 그렇게나 걱정되면 와인 추가나 하지 말라고 면박을 줬겠지만 지금은 그거 내 돈 아니야. 라는 말이 툭 튀어나올까 그냥 입 꾹 닫고 술이나 들이킬 뿐이라는 게 조금 다를 뿐.
아니, 사실 그보다도 진짜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건 따로 있긴 했다. 넷이서 세 테이블. 딱 떨어지는 열 둘의 숫자. 그게 또 김민규의 속을 발칵 뒤집을 정도로 이상했다. 그럼 이제 놀이공원을 가도 한 명이 따로 앉을 일은 없고, 원쁠원 상품을 사도 딱 맞게 떨어져서 하나 남을 일이 없고... 따지자면 정말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김민규는 차라리 생각을 관두기로 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댔다. 그 난자리를 나만 알아서 문제지만. 세상은 이제, 그 난자리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지금의 시간선이 더 완벽한 마냥 굴러갔다. 김민규는 그 사실이 실감 날 때마다 기분이 망가지는 자신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래서 김민규는 그 뒤로 어떤 마음으로 남은 정기모임의 시간을 보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김민규는 멤버들이 자리를 모두 마무리 하기 전에 기어이 먼저 자리를 떴다. 제가 나왔을 때에는 이미 권순영이 다녀갔는지 계산 완료된 상태였고. 멤버들이 이 식사를 제가 샀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권순영이... 아니지. 익명의 무슨 캐럿이 사주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지까지는 굳이 떠올리지 않기로 했다. 단톡방에 우르르 올라오는 정기모임의 셀카에 적당한 이모티콘 하나를 골라 보내기에도 충분히 지쳐 있었으니까. 민규 덕에 맛있는 데서 밥 먹었네. 그 말에 차마 뭐라 답할지 생각이 나지를 않아 김민규는 한참을 앓다 잘됐네 한 마디를 간신히 답장으로 보낼 뿐이었다. 권순영에게서는 그 뒤로 따로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또 용건이 끝났으니 끝인 건가. 아니면 무슨 일이라도 생겨서 연락할 틈도 없을 만큼 정신 없는 건가. 그렇지만 김민규 역시도 이 이상으로 무언가를 더 해볼 기력은 남아있지 않아, 김민규는 그냥 흐르는대로 어영부영 살아가게 되었다. 먼저 연락이 끊겨버린 그 카톡방을 먼저 들여다보는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않기로 한다. 연습을 해야하면 연습을 하고, 스케줄이 있으면 또 스케줄을 하고. 그러다 적당히 운동을 하고 맛대가리 없는 관리용 닭가슴살 샐러드를 먹고 뻗어 자기를 반복했다. 김민규는 그렇게 느껴지는 위화감들을 어떻게든 죄다 부정해나가려 노력했다.
그러나 어거지로 삼킨 것들은 결국 언젠가 탈이 나기 마련이다.
김민규가 억지로 기워 붙인 일상이 덜컥 멈춰버린 것도, 결국 얼마 지나지 않은 일이었단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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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최승철과 홍지수와 함께 위버스 라이브를 할 때였다. 김민규는 라이브를 켜놓고서도 영 그것에 집중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라이브는 대부분 둘의 대화를 위주로 진행되었다. 빠르게 올라가는 채팅창을 앞에 놓고서 둘은 이런저런 얘기들을 했다. 멤버들 사이에 있었던 간단한 일화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혹은 또 다른 일정에 관한 스포일러라던가. 별 농담들과 에피소드들이 와르르 굴러갔다. 그게 툭하고 걸린 건 정기모임 썰을 풀어달라는 한 댓글을 최승철이 발견한 이후였다.
정기모임 썰이요? 아, 이번에 준휘가 위버스에 사진 올렸었나?
원래 이번 정기모임이 디노 차례였는데, 민규가 또 너무 맛있고 예약 어려운 식당의 기회를 잡았다고 하는 거예요. 꼭 멤버들이랑 박박 우겨서 민규가 결국 차례를 양보 받았는데... 음식 진짜 맛있고 좋긴 하더라고요. 사진 보셨죠? 그 뒤로도 막 십몇 접시씩 더 나왔었어요. 나는 진짜 샐러드에 금가루 올라간 거 처음 봤다.
퀄리티가 너무 좋아서 진짜 가격 괜찮나? 싶을 정도로 걱정했었다니까요.
그런 최승철의 말에 김민규는 그냥 적당히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민규 이번에 정기모임 끝나고 나면 적금 하나 깨는 거 아냐? 했다니까요. 평소 나오는 것보다 0 하나는 더 붙겠던데... 하는 홍지수의 말에도 또 아무튼 그럭저럭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그래서 내 돈 아닐 때 더 열심히 먹자 했죠, 그런 농담에는 또 너무 밉지 않게 흘겨보며 툭 치는 장난도 걸 수 있었다. 김민규는 여기까지는 나쁘지 않게 괜찮았다. 김민규의 심장이 정말로 덜컥 걸려버리게 된 건, 그 뒤로 이어진 홍지수의 말 때문이었다.
근데 그 때 진짜 깜짝 놀랐어요. 거기 식당 관계자분이 우연히 저희 캐럿분이셨는지, 그 날 정기모임 식사비를 전부 결제하고 가셨다더라고요.
진짜 너무 감사하고 죄송했죠. 그냥 어쩌다 한 둘 밥 먹고 있을 때 몰래 결제하고 가시는 것도 너무 감사하고 죄송하고, 저희가 역으로 사드리고 싶고 그런데. 그 큰 규모의 정기 모임을 결제하고 가셨다고 하셔서. 근데 티 하나도 안 내시고 그냥 가신 거예요. 이 라이브 보고 계시면 꼭 좀 너무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회사로 연락하셔도 돼요.
게다가 더 놀란게,
그 돈을 전부 현금으로 결제하셨다는 거예요.
그 말에 김민규는 애써 채팅창을 보는 척하며 열심히 놀리던 손가락을 덜컥 멈춰버리고 말았다. 아니 정말로, 그게 가능한가? 하면서 덧붙는 최승철의 말은 솔직히 잘 들리지 않았다. 외국 캐럿분이셨나? 그거까지는 진짜 잘 모르겠어요. 카드가 어쩌다 안 되셨는지, 아님 또 어떤 이유가 있으셨는지. 아무튼 그 큰 돈을 현금으로 턱 내고 그냥 홀연히 사라지셨다고. 아무튼 꼭 좀 회사로 연락해주세요. 정말 진심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홍지수의 말이 귓가에 웅웅 울렸다.
김민규는 솔직히 지금도 권순영의 상실을 이미 충분히 겪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또 아니었다. 이유는 하나다. 현금으로 결제했다는 바로 그 대목. 따지고보니 그런 거였다. 이 세상에서 싹 지워지는데, 무슨 짓을 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기억을 지우다 못해 존재를 아주 없애버린 것마냥 사라져 버렸는데. 그럼 그 사람의 신원을 보증하는 것 역시도 당연히 사라지지 않겠는가. 그 가능성을 김민규는 이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권순영은 이제 카드도 만들지 못할 거다. 통장도 없겠지. 하다못해 민증 같은 것도 없을지 몰랐다. 이 세계에 권순영은 도대체 어디까지 남아있고 어디까지 사라질 작정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김민규가 라이브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김민규는 지금 당장 핸드폰을 켜고서 권순영의 연락처 따위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억지로 주변에 초점을 맞추고, 반은 흘러가버리는 대화를 어떻게든 또 귀에 우겨 넣어보고. 그러다보면 또 최승철이 그러는 거다.
맞다. 얼마전에 민규 목격담 떴더라. 애슐리에서.
일반인 친구 분이랑 같이 밥 먹고 있었다던데.
그 때 막 특히 기억에 남던 게...
김민규는 결국 자리를 박차고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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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는 몸이 나쁘다는 이유를 급하게 대고는 그냥 자리를 일어섰다. 라이브 내내 김민규가 집중하지 못했으며, 또 안색도 좋지 않았던 것은 남들 눈에도 뻔히 보이는 사실이었기에 남은 둘 역시 민규를 굳이 잡지는 않았다. 김민규는 그대로 미친듯이 권순영네 집으로 뛰었다. 전화도 카톡도 하지 않았다. 하지 못했다. 또 없어져 있을까봐. 그 가능성 하나가 죽도록 무서워서. 김민규는 제한 속도에 아슬아슬할 정도로 차를 밟아서는 익숙한 오피스텔 현관을 땄다. 비밀번호는 단순한 권순영답게 그냥 본인 생일 네 자리였다. 권순영의 흔적이 여기는 아직 남아있는 걸까? 다행스럽게도 아직 바뀌지 않은 공동현관 비밀번호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 편 온 세상이 점점 그의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옥죄어오는 것만 같은 기분에 초조한 마음이 지워지지를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도무지 내려오지를 않기에 김민규는 결국 비상구 계단을 탔다. 계단 두 세개씩 겅중겅중 오르면서도 김민규의 가슴은 다른 이유로 터질 듯 울렁거렸다. 익히 알고 있는 현관문을 앞에 두고서는 벨도 누르지 못한 채 그냥 그 문을 마구 두드리기만 했다. 형. 순영이 형. 권순영. 용건도 말하지 않고 그냥 냅다 이름만을 불렀다.
그럼 머지않아 그 문은 열렸다. 다행스럽게도 그 문 뒤로 나온 사람의 얼굴을 못 알아본다거나, 그 사람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등의 비극이 아직 벌어지지는 않았다. 김민규는 그 말간 얼굴을 본다. 쥐콩만하게 생겨선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동그랗게 그 작은 눈을 뜨고선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보는 그 낯을 본다. 그 얼굴을 보자 맥이 탁 풀렸다. 김민규는 어딘가 안심되는 한 편, 또 끝도 없이 불안해지는 모순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낀다. 그래서 김민규는 결국 그 형편없는 몸뚱이를 당겨 안는다.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몸을 어떻게든 꾸역꾸역 끌어당겨선 붙잡았다. 또 권순영이 영문 모를 얼굴을 하고 있을까봐, 차마 마주보지도 못한 채 그냥 품에 우겨넣어버렸다. 그리고 아주아주 형편없을 목소리로 말했다.
형.
왜 하필 나야?
그래, 그 말이 김민규의 최선이었다. 차마 이 사람을 원망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현실이 다 빌어먹게 비참해서. 왜 이것들을 하필 그닥 사이 좋지도 않았던 제가 감당해야 하는지도 아직 모르겠어서. 복잡하게 울렁거리는 마음의 정체도 도무지 모르겠어서. 왜 나여야만 했어. 그런 의미를 담아, 다 무너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했다.
근데 그런 김민규를 그냥 손 뻗어 안아준 권순영도 참 이상한 인간이었다. 잠시 상황을 파악하는 가 싶더니, 권순영은 싫다고도 안하고 좋다고도 하지 않고 그냥 그 통통한 손을 내밀어선 천천히 등을 쓸어주었다. 억지로 자신을 품에 끌어안은 김민규를 덥다는 핑계로도 밀어내지 않았다. 권순영은 또 정말 다 괜찮은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항상, 평이한 일상인 마냥 차분한 말투로 엉뚱한 제안만을 던질 뿐이었다.
민규야.
해돋이 보러 가자. 우리.
그렇게 영문 모를 말들만 할 거면, 김민규는 차라리 권순영의 말투가 다정을 흉내내지라도 않았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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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게 지금의 김민규가 영문 모를 강릉 아무 바다 앞에서 해 뜨기만을 가만 기다리는 까닭이었다. 권순영은 그냥 남산 가서 해 뜨는 걸 봐도 상관 없고, 하다 못해 하이브 사옥 옥상이라도 아무튼 상관 없다고 했지만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을 억지로 조수석에 앉혀선 냅다 강원도로 차를 몰았다. 오래 운전한다는 핑계를 대고서라도 차라리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먼저 해돋이를 보자고 한 건 권순영이었지만, 결국 적당히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아 차를 댄 것도, 바닷바람이 추울까 차의 담요를 꺼내와서 그의 어깨에 둘둘 둘러준 것도 전부 김민규였다. 김민규는 여기까지 와서야 지금까지 권순영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이래서였나 싶었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말들을 너무 쉽게 툭툭 던지면서, 막상 그게 정말로 닥치면 때로는 이상할 정도로 순종적이고 때로는 지나치다 싶게 수동적인 권순영. 속내를 내다볼 수 없는 권순영. 자꾸만 이상하고 엉뚱하게 구는 권순영. 분명 갑자기 멤버들에게 밥을 사고 싶다 한 것 역시도 깊은 생각 없이 뱉어진 말일텐데, 요새는 그게 전부 다 새삼스럽게 가슴을 북북 긁었다. 권순영이 무언가를 하면 할수록 역설적으로 김민규는 그 부재를 더 크게 느끼게 됐다. 무거웠다. 그런데 막상 또 권순영을 마주보면 거기에 나쁜 의도가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권순영이 또 무슨 마음인지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따지자면 그 모든 것들이 권순영이라는 존재를 다시 어렵게 만들었다.
해가 뜨는 데에는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권순영은 아무 말도 꺼내질 않았다. 그래서 김민규도 구태여 무슨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김민규의 머릿속은 이미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권순영으로 꽉 차있었으니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으로 둥실둥실, 세상에서 5cm 정도 유영하는 것마냥의 아주 애매한 비현실감을 동반한 채로. 김민규는 권순영을 탓하고 싶다가도, 그냥 울고 싶다가도, 왜 나였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싶다가도, 어떻게 다른 방법은 없었냐고 어린애 같이 굴고 싶다가도. 그냥 권순영을 다시 안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권순영은 해가 일렁일렁 고개를 들 듯 주위가 벌겋게 밝아져서야 비로소 입을 떼었다.
민규야. 있잖아.
그렇게 부르기에 김민규는 굳이 왜, 라고 입을 떼어 답을 하지는 않았다.
별 말이야. 해가 뜬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냥 태양이 너무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는 거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실 빛을 쏘고 있잖아.
나도 그런 거 같애.
내 이름도 하필 호시잖아, 별. 그 말 역시 김민규는 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의 얼굴은 언제나와 같았다. 갑자기 떠나야 한다고 말하던 그 때와, 냉큼 해가 뜨는 것이 보고 싶다며 종잡을 수 없는 말을 하던 그 때와 같았다. 김민규는 느닷없이 아마 애슐리를 가자고 할 때와 정한과 멤버들에게 밥을 사주고 싶다고 제게 연락할 때에도 권순영은 아마 이 얼굴이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번에야말로 그 얼굴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해가 어스름히 떠서 역설적으로 별빛이 곧 꺼질 것만 같은 바로 그 때에. 단 한 번도 읽지 못했던 권순영의 감추어둔 무언가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평이한 말투 아래로 감추어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 속에서, 알 수 없는 말을 뱉으며 이 모든 게 마지막인 것마냥 구는 그 기묘한 상황 속에서. 속내를 알 수 없게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제 할 말만 뱉어내는 그 못된 성미에서 김민규는 비로소 무언가가 읽히는 것만 같았다.
나도 아마 어디에서든 빛을 쏘아 올리고 있을 거야. 어디에 있든. 계속해서, 닿을지 모르는 지구로 끝없이.
그냥 단지.
네가 태양인 거야.
그 말을 뱉은 권순영은 그제야 간신히 김민규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그 세 글자가 한도 없이 묵직했다. 권순영의 까아만 눈동자가 김민규에게 닿았다. 우주에서 왔다는 그 말 그대로 그 눈동자는 아주아주 깊기만 했다. 가늘게 쭉 째진 눈꺼풀 아래로 동그랗게 자신을 응시할 뿐인, 이제야 막 어슴푸레 밝아지기 시작하는 주변과 대비되는 어두컴컴한 동공. 권순영은 날 더러 태양이랬다. 만약 김민규에게 권순영이 어렴풋이 옅어지게 된다면 그 이유가 바로 그것일 거라 했다. 이 우주가 너무 밝아서라고도 하지 않고, 지구에 태양이 떠있어서라고 하지도 않은 채.
그저 네가 태양이라서.
권순영은 그렇게 말했다. 비록 보이지 않을지라도 여기에 있을 거라는 마냥 말을 하고서도, 동시에 또 그러므로 너는 나를 볼 수 없을 거라는 말을 같이 하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러나 김민규는 그래서 오히려 조금 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눈동자가 얽히는 짧은 그 찰나에야, 꽁꽁 덮어놓고선 당최 읽을 수 없게 구는 권순영의 심미를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민규가 거기에서 읽은 건 아주아주 깊은...
벽이었다.
권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동요 없는 잔잔한 말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김민규는 미묘하게 권순영의 목소리가 변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굳이 따져야 한다면, 아마 이쪽이 좀 더 솔직한 말들이 아닐까. 정말 미세한 변화였지만 김민규는 그런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래서 내 마법이 너한테만 통하질 않았나봐. 버겁지. 네가 이런 기분을 알게 하면 안 됐는데. 사실, 아무도 그런 기분을 몰랐으면 해서 죄다 지우려고 했던 거였는데. 힘들지. 나 사실 기억을 지울 방법을 찾았어. 내일 얘기하려고 했는데, 널 보니까 지금 바로 기억을 지우는 게 좋을 거 같애. 내가... 너를 너무 힘들게 만들어버렸네.
권순영은 김민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권순영이 그 모든 의미심장한 말 뒤로 늘어놓는 것은 결국 사과였다. 사과를 하는 권순영은 필사적이다 싶을 정도로 말도 내용도 급했다. 잘 꾸며지고 포장된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군데군데 표피가 갈라진 곳이 보일 정도였다. 권순영은 말했다. 지우는 데에 오래는 안 걸릴 거야. 그러고 나면 또 괜찮을 거야. 전부 다 지우는 거니까. 있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잊는다는 건 사실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먹어버리게 만드는 거거든. 그래서 이번은 정말로 다를 거야. 이제는 정말로 하나도 안 아프게 될 거야. 그러니까... 허겁지겁 미안하다는 말만 잔뜩 늘어놓는 권순영에 김민규는 그 이상으로 그의 말을 듣지 않기를 택했다. 대신 그냥 형, 하고 부르며 권순영의 말을 끊어 버렸다.
순영이 형.
나 좀 봐봐.
권순영은 그 말을 듣고도 꽤나 어물쩍대다 다시 간신히 고개를 자신에게로 돌렸다. 권순영은 제대로 시선을 얽지 못했다. 그 까만 눈동자가 연신 이리저리 흔들렸다. 권순영의 그런 모습을 보자, 김민규는 자신이 아까 느낀 그것이 잘못된 방향이 아니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또한 정말 웃기고 모순되게도, 김민규는 그 지경까지 가서야 드디어 알 수 있었다. 비로소 어렴풋 해가 뜰 때가 되어서야 간신히 권순영을 제대로 생각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민규는 맞닿는 눈동자를 눈빛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아주 고개를 돌려버리지 못하게 그냥 꼭 붙들어버렸다. 그러자 그 뒤로 나오는 말은 단 한 번의 막힘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 나왔다. 평소에 생각해본 적 없는 것임에도.
그래, 생각해보면 그랬다. 김민규의 가슴이 그렇게 사정없이 흔들린 건, 그리고 차라리 권순영을 원망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일렁였던 건. 전부 김민규에게서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무너져버렸기 때문이었다. 그게 권순영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 대상이 권순영이었기에 갈피 잃은 마음이 결국 권순영에게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김민규의 마음은 사실 그게 전부였다. 형은 왜 그렇게 내 모든 일상들을 전부 당연하게 만들어 놓고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굴어. 왜 자꾸 상관없다는 마냥 종잡을 수 없는 행동만 하는 거야.
권순영의 말대로, 김민규 역시 자신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리는 경우를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잊었다는 사실 조차도 잊게 되는 완벽한 망각. 그렇게 되면 김민규에게는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애초부터 열 둘로 가정된 세계에서, 언젠가는 열 셋이었다는 것을 지워버린 채 지극히 당연히 그 열 둘의 하나로 살아가는 거니까. 그런 세상이라면 김민규가 괜히 혼자 열 셋의 시간을 떠올리며 혼자 가슴 찔려하며 불편할 일따위는 절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처럼 이상하게 가슴이 울렁거려 힘겨운 일도 당연히 없을 것이다. 지금의 김민규가 일렁이는 세상의 틈에서 홀로 괴로워하는 것도 전부 그 때문이니까. 그 대신, 김민규까지 권순영을 잊는다면 정말로 권순영이 여기에 있었다는 증거는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기억을 돌리지 않는 이상 영구히 없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 영원은, 김민규가 으레 멤버들과 영원히 함께 가자고 몇 번이고 다짐했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의 영원이었다. 김민규는 그 모든 생각에 자꾸만 그래도나 그렇지만 같은 접속사를 붙이게 되었다.
너는 이게 정말로 괜찮아서 그러는 거야?
그래서 김민규가 묻고 싶은 것은 사실 그것 하나였다.
그리고 지금의 김민규는 확실히 답할 수 있었다. 권순영이 그렇게 지나치게 태연하게 굴다가도 또 이상한 것들만 골라 행동하고, 그러고서도 자꾸 의연하게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짓는 것은. 전부 김민규의 그 질문에 아니라고 답하고 싶어서였을 거라고. 그게 남을 챙길 줄 모르는 권순영의 어설픈 배려였을 거라고. 이제는 정말로 확실히 떠오른 햇빛의 아래에서, 김민규는 권순영의 두터운 벽을 봤다. 그 아래로 숨겨둔 것이 무엇인지는 차마 알 수 없어도 그렇게까지 행동한 이유 하나만은 전부 너무나 자명했다. 애초에 정말로 괜찮고, 전부 드러낼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한 것이라면 그렇게 벽을 쌓을 필요조차 없는 법이니까.
상식적으로 그랬다. 누가 지워지고 싶겠냐고. 세상의 어느 존재가, 정말로 영영 지워져서 없어져도 괜찮겠냐고. 김민규는 무너진 제 마음을 주워담느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권순영의 시선을 드디어 읽었다. 벽을 마주하는 순간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분명 대답을 돌려 받았다고 확신했다. 그러자 이전의 모든 일들 역시도 괜찮아졌다.
그리하여 김민규는 말할 수 있었다.
형.
내 기억 지우지 마.
하고.
*
그 뒤의 말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형. 형은 기다리는 것이 아플 걸 알아서 그랬다고 했잖아. 형이 하나하나 직접, 그리고 전부 지웠다고 했잖아. 나만 지워지지 못한 거라고 했잖아. 그게 너무 미안하다고. 그래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고.
형이 방법 찾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러지 마.
나는 그냥 여기에 이렇게 남겨줘.
그래야 내가 갈피가 되잖아. 내가, 형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이유가 되잖아. 다시 오고 싶을 때 길을 찾을 방향이 되잖아.
김민규의 그 말은 이제 확신에 차 있었다. 이게 사실은 아주아주 오래 전부터 묵혀온 진짜 마음인 것만 같았다. 그 말들을 뱉어내는 순간순간마다 이전의 일렁이던 가슴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것마냥 다시 평온해진 마음이 비로소 확신을 가졌다. 순영이 형.
형은 남아서 기다리게 될 내 마음을 생각하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우리를 기어이 떠나야 할 형의 마음을 헤아려야지.
그렇잖아. 남겨진다는 건 사실 일방적인 게 아니잖아. 누군가가 떠났기 때문에 남겨지는 거잖아. 그럼 그 떠난 누구는 또 어떤 누구가 생각해줘. 남은 것들은 남겨진 것들을 떠안고서 살아간다지만, 떠난다는 건. 형이 간다는 건.
아무것도 안고 가지 못하는 거일텐데.
나까지 없으면 형이 여기 있었다는 건 무엇도 증명하지 못하잖아. 나는 그게 싫어. 그래, 그게 싫어서 지금까지 그랬던 거 같아. 나는 이렇게 선명한데. 나한테 권순영은 이렇게 분명한데, 누구도 그걸 증명하지 못해서. 나 혼자 떠안아졌다고 생각했어. 근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그렇잖아. 형 말대로, 해가 뜨니까 알겠잖아. 별은 사실 거기 있었다는 거. 형 있잖아. 형이 아무리 떠나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떻게 스스로가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뭔가가 되어도 괜찮을 수 있겠어.
그러니까 지우지 마, 응? 지우지 말자. 말아주라. 김민규가 말들을 늘어놓는 동안 어느새 해는 완연하게 떠올랐다. 이제는 완전히 선명해진 햇빛이 김민규에게도, 또 권순영에게도 내려앉았다. 김민규는 마지막 자신의 말이 사실은 떼를 쓰는 형국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또 그러면서도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말투를 썼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리고 권순영이 그 부탁을 들어주리라는 것 역시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순영아.
그러니까 내가 부표가 될게.
나의 존재로 하나로 네가 이곳에 다시 돌아오고 싶어진다면.
내가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김민규는 그 말들은 그냥 가만히 삼키기로 했다. 그 대신 여전히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권순영의 머리를 가만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형. 해돋이 예쁘다, 그치. 되게 오랜만에 보네. 형이랑 둘이서는. 그러자 권순영은 그냥 한참 뒤에야 조용히 대꾸했다. 그러게. 예쁘네.
...정말 예쁘다.
김민규는 사실, 그게 암묵의 허락이라고 생각했다.
*
김민규는 전원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새로 방을 구했다. 전원우에게는 그냥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했다. 소중한 사람이 멀리 떠나야 하는데, 가기 전에 좋은 기억들을 많이 만들어주고 싶어서. 잘 보낼 수 있게 최대한 오래 같이 있고 싶어. 그렇게 말하자 원래도 무던한 전원우는 별 말 않고 순순히 김민규를 보내줬다. 얼마가 될지 기약도 하지 못하는 김민규더러 편히 다녀오라고, 이쪽은 자신이 있을 테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여 주었다. 윤정한에게 얘기를 하던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에어비앤비로 방을 단기로 빌릴지, 아니면 정말로 오피스텔 하나를 아예 구해버릴지는 조금 고민했던 것 같다. 권순영은 완전한 여름이 되기 전에는 아마 떠나게 될 것 같다고 했으니 사실 효율을 따지자면 전자가 맞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김민규는 기왕 권순영의 흔적을 남기기로 선택한 김에, 아주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제 주변에 자욱들을 남기고 싶기도 했다. 김민규는 결국 오피스텔 하나를 제 명의로 급히 계약했다. 일 년짜리였다. 촉박하게 알아보고 구하느라 웃돈을 얹은 감이 없잖아 있기는 했지만, 김민규는 그건 정말 하나도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조금 비싸게 주더라도 아무튼 설비가 정말로 잘 되어 있는 쪽이 김민규에게는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피스텔을 계약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권순영의 모든 신상정보가 세상에서 말끔히 지워졌기 때문에 김민규는 그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지극히 확신하게 되었다.
야, 아무리 네 벌이가 나쁘지 않아도 그렇지. 시세보다 훨씬 비싼 거 뻔히 알면서 이렇게 그냥 냉큼 계약해버리면 어떡해.
권순영은 제 짐을 바리바리 방에 풀면서도 그런 말을 툴툴 늘어놓았다. 아이, 그게 정말로 미안하면 형이 그만큼 보태주겠지. 나만 벌이 나쁘지 않았나? 우리 같이 벌었는데? 그렇게 장난스레 대꾸하면 권순영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에, 김민규는 아 농담이야 농담. 하면서 냉큼 뒤에서 권순영을 당겨 안아버렸다. 괜찮아. 형이랑 같이 있으려고 한 거잖아. 하나도 안 아까운데. 그리고 이 말은 진담... 권순영은 기어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김민규의 손등을 찰싹 소리나도록 때려 버렸다.
김민규는 그 길로 수월하게 투폰까지 계약했다. 신분이 죄다 사라져 핸드폰은 애진작 당연히 사라져버린 권순영을 위한 조치였다. 갤럭시, 아님 아이폰? 형은 뭐가 좋아? 뭐래 할 거 없냐...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던 권순영에게서 그런 답을 돌려 받은 김민규는 알겠다며 그냥 자기 마음대로 갤럭시 S 24 울트라를 냅다 사와선 개통까지 척척 해왔다. 데이터 무제한이지롱. 그렇게 말하는 김민규에 권순영은 또 에라이 미친놈아... 를 냅다 질러버렸다. 아니 내가 신분이 없지 공기계가 없냐고. 예전에 쓰던 폰 버젓이 있는데. 아이 그래? 걍 새거 써~ 그 말을 들은 권순영의 눈이 아주 날카로워지기에 결국 김민규는 슬쩍 도망가기를 택했다.
권순영에게 준 핸드폰에는 김민규가 미리 웬만한 계정들을 죄다 등록해 두었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김민규는 결국 세븐틴 민규인 탓이었다. 같이 있는 시간보다는 자리를 비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더 많을 테니까. 제가 없는 동안 권순영이 지내는 데에 무리가 없도록, 또 아주 적적하지 않을 수 있도록. 덧붙여서 기왕이면 자기 생각도 좀 더 해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배려한 것도 있었다. 웬만한 배달 어플에 꼼꼼히 카드를 등록해둔 것은 물론, OTT 계정 역시도 빼먹지 않고 챙겨 두었다. 형 카톡도 필요해? 그렇게 묻는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어차피 너랑밖에 연락 안 하는데 굳이? 라고 답했다. 김민규는 그래서 굳이 카톡까지는 만들지 않았다. 그냥 제 원래 핸드폰의 번호를 얌전히 등록해두기만 할 뿐이었다. 김민규의 투폰이자 권순영의 것이 될 핸드폰에는 오로지 김민규의 연락처만이 존재했다.
김민규는 사실 그 때에 닳은 가슴을 조금은 몰래 삼켜야 했다.
김민규는 그렇게 권순영과 살림을 합친 뒤에도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비는 시간마다 바삐 권순영에게 연락을 보냈다는 것이다. 흔적을 남기는 것은 결국 쌍방이었다. 김민규 자신에게도 권순영을 오래 새길 수 있을 만큼 그의 자국을 새길 예정이었지만, 동시에 김민규는 권순영에게도 제 일상이 흠뻑 스며들기를 바랐다. 사소한 것에도 떠오를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그게 때로는 쓰리고 아플지도 모르지만, 또 떠올리고 떠올리다 보면 결국 좋은 것들이 더 오래 남을 테니까. 김민규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권순영이 아주 실컷 자신을 떠올릴 수 있도록 꾸준히 연락을 쌓았다.
권순영의 반응은 다양했다. 가끔은 그냥 무심하게 단답으로 답해주기도 했고, 또 언제는 질색하는 태도로 온갖 성질을 부리기도 했다. 아무튼 어느 쪽이든 김민규는 전부 좋았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익히 잘 알고 있는 권순영의 모습이라서 편하기도 했다. 권순영이 억지로 무언가를 꾸며내지 않는다는 느낌이라 그게 훨씬 좋은 것도 물론 있었다. 정말로 싫었으면 진작에 더 격하게 거부했을 형이라는 확신이 있기도 했고. 가끔 셀카를 보낼 때면 권순영은 치를 떨면서도 제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꼬물꼬물 찍어 답신을 보내주곤 했기 때문에,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을 또 내심 귀여워할 수 있었다. 김민규는 위버스에 올리지 않은 사진이며 온갖 티엠아이들을 카톡으로 무수히 풀었다. 마치 전화로 수다를 떨듯, 이 대화방 앞에 권순영이 앉아있다고 생각하며 조잘조잘 잘만 얘기했다.
권순영은 집에서 쉬는 동안 이런저런 취미를 좀 붙인듯 했다. 종종 보내주는 사진에서는 자기계발서에 형광펜으로 삐뚤빼뚤 선을 그어놓은 모습이 보이기도 했고, 종종 김민규의 핸드폰으로 카드 결제 내역이 날아올 때면 배달 음식을 시키는 것보다도 쿠팡에서 뭔가 주문했을 때가 더 많았다. 스케줄을 마치고 같이 사는 집으로 향하면, 테이블에서는 늘 무언가 치운 태가 났다. 김민규는 권순영에게 굳이 뭐를 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집에서 혼자 훌쩍훌쩍 우는 것만 아니라면 뭐든 싫으랴. 아무튼 권순영이 무언가 꼼질꼼질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내심 만족할 뿐이었다.
김민규는 그러는 동안 컴백 전 마지막 휴가 일정을 받았다. 베스트 앨범과 함께 본격적 활동을 하기 전 쉬어두라는 의미가 가장 컸을 것이다. 규모가 큰 컴백이니만큼, 아마 티저가 공개될 무렵이면 눈코뜰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김민규는 괜히 씁쓸한 입을 다시게 되었다. 권순영을 임시로라도 매니저로 둘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신분이 싹 지워진 것을 떠올리고는 짧게 이어지던 상상을 관두었다. 김민규는 언제나 생각이 너무 깊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그러다보면 할 수 없는 것들을 정말 끝도 없이 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김민규의 성미에 맞지 않다. 그리고 익히 보아온 권순영도 그런 성격은 또한 아니었다. 김민규는 다짐했다. 눈 앞의 할 수 있는 것들에만 집중하자. 그러기에도 너무 아까운 시간이니까.
그런 마음으로 받아온 삼 일의 휴가였는데.
권순영은 또 왜 이렇게 평온하기만 하지.
그래. 역시 권순영은 종잡을 수 없는 부류의 사람. 외계인? 아무튼 그런 뭐시기였다.
아니, 오히려 좋아... 이게 형 답기는 해...
그치만 마지막 휴가인데 우리 좀 더 알차게 보낼 수는 없었을까, 형... 김민규는 그 말을 꾹꾹 눌러 삼켰다.
*
김민규는 처음 삼 일의 휴가 동안 권순영과 여행이라도 떠날 계획을 세웠었다. 해외 여행이야 문제될 게 많다지만, 국내 여행 쯤은 얼마든지 김민규 명의 하나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았으니까. 권순영이 바다를 좋아했었나. 아니면 차라리 캠핑같은 걸 한 번 시도해볼까. 이거저거 해먹이려면 아예 캠핑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김민규는 애진작 휴가 동안의 일정은 모두 캔슬해둔지 오래였다. 이 때의 김민규는 정말로 권순영이 제주도를 가고 싶다 하면 배를 타고서라도 거기에 갈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각오가 되어있지 않은 쪽은 알고보니 권순영이였던 거다. 김민규의 이런저런 제안을 권순영은 모두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쏙쏙 피해갔다. 너 오래 운전하면 피곤해서 안 돼. 너 사람 많은 데 가면 다들 알아봐서 안 돼. 네가 너무 고생해서 안 돼. 종국에는 하다하다 그런 말까지 나왔다.
너 멀미하지 않았나? 아니면 말고. 근데 이번에 할 수도 있잖아.
거기까지 가자 김민규는 그냥 권순영이 같이 어딘가를 갈 맘이 없다는 걸 순순히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정말 솔직히, 김민규는 그게 좀 서운하긴 했다. 권순영은 김민규의 모든 제안을 다 퇴짜놓는 대신 뀨야, 우리 영화나 볼까. 우리 이거 시켜먹을까. 하고 지극히 집 밖을 나서지 않아도 죄다 할 수 있는 것들만 늘어 놓았다. 내심 섭섭했던 김민규가 그럼 우리 심야 영화 보러 갈까, 하는 제안을 권순영은 냅다 넷플릭스를 두둥하고 틀며 완벽하게 퇴짜를 놓았다.
그게 김민규가 지금 입술을 삐쭉이며 넷플릭스를 보고 있는 이유였다. 결국 휴가 이틀 동안 권순영은 집 밖을 코빼기도 나가질 않았다. 사실 그것이 연예인의 일반적인 휴가를 보내는 방법일 텐데도, 괜히 또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권순영이 하는 말이 아주 틀리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였지만. 이번이 아니면 또 언제일지를 기약할 수 없다는 건 서로가 누구보다도 잘 알텐데 싶어서. 괜히 풀 곳 없는 투정을 눈 앞에 둔 편의점 팝콘을 툭툭 씹으며 풀었다. 영화는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영화는 모두모두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뻔한 해피엔딩의 결말이었다. 권순영은 영화가 끝나자 미련없이 티비 화면을 툭 껐다. 씻고 얼른 자자, 민규야. 김민규는 그냥 웅... 하고 대답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단 뜻이다.
그렇게 비척비척 잠든 김민규가 눈을 뜬 건 이미 한낮의 점심이었다. 알람도 없이 뒤늦게 눈을 뜬 김민규는 부스스 정신이 들자마자 바로 핸드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두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김민규는 이내 머뭇거리다 도로 침대 위로 푹 고개를 묻었다. 벌써 두 시라는 건, 휴가도 정말 막바지라는 뜻이었다. 휴가 내내 집에 콕 틀어 박혀서 권순영이랑 배달 음식이나 나눠먹고 드라마 정주행이나 보고 종종 낮잠을 자고 어쩌다 찔리는 양심에 가끔 운동을 하는 게 전부인 시간이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김민규는 푹 내쉬어지려는 숨을 흡 삼켰다. 됐다, 이제와서 또 뭘. 그것도 그것대로 나쁜 건 아니잖아. 자꾸 꼬리를 물 것만 같아 이어지는 생각들은 일단 집어넣어두기로 한다. 김민규는 마음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형 점심은 먹여야지. 김민규는 그렇게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그런데 방 밖을 나선 김민규를 반기는 건 평소랑은 어쩐지 한참 다른 풍경이다. 권순영은 앞치마까지 야무지게 매고서는 부엌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들리는 인기척에 너머로 빼꼼, 얼굴을 내밀고서는 민규 일어났어? 점심 먹자, 기다렸어. 라고까지 말하는 것이다. 김민규는 그제야 권순영이 점심을 차려뒀음을 자각했다. 권순영은 인덕션 불을 끄고는 냄비 하나를 식탁 중앙에 얹었다. 오전에 끓였는데, 너 깨우기 싫어서... 한 번 데웠더니 간이 괜찮을지 모르겠다. 권순영이 끓인 건 아니나 다를까 김치찌개였다. 어설픈 손으로 야무지게 계란후라이까지 구웠다. 반숙에 실패해서 터져버린 건 권순영 제 쪽으로 밀어놓고선, 동그랗게 잘 익은 반숙 후라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제게 밀어주는 것이다. 권순영은 자꾸만 조잘조잘 말을 붙였다. 내가 요리를 해봤어야지, 그래서 맛은 진짜 보장 못해. 못 먹겠으면 그냥 뱉어. 알았지... 어설프게 끓인 김치찌개에는 두부며 고기 같은 것도 한가득이었다. 김민규는 최근에 바빠 장을 보러 간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권순영이 또 언제 몰래 장을 봤다는 걸 뜻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민규는 슬슬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김치찌개는 솔직히 맛이 없었다. 김치 좋아하는 권순영이 김칫국물을 아낌없이 때려 넣었을 걸 생각하면, 정말 엉망진창으로 끓였다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권순영은 쌀뜨물을 쓰면 김치찌개가 훨씬 맛있어진다는 건 아마 꿈에도 모를 거다. 고기를 먼저 볶아야 한다는 것도. 하다못해 간을 국간장으로 제대로 했을지도 의문이었다. 근데 그걸 다 감안해서도 전부 좋았다. 딴에 요리한다고 아침 나절 동안 끙끙댔을 생각을 하니, 덧붙여 곤히 자고 있을 저를 차마 깨우지도 못해서 혼자 인터넷을 뒤졌을 모습을 상상하니 음식의 맛은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권순영은 깨작깨작 음식을 건드리며 자꾸만 김민규를 살폈다. 그래서 보란듯이 한 공기를 쓱쓱 비워줬다. 빈 그릇을 본 권순영이 그제야 활짝 웃었다. 결국 김민규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형. 앉아있어. 그 말을 하고 냉큼 뒤돌아서는 자꾸 바보같이 비실비실 웃기만 했다.
먹은 걸 죄다 치우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세 시 반을 훌쩍 넘겼다. 단톡방이 슬슬 시끄러워지는 것을 보니, 정말로 휴가의 끝물이다 싶었다. 김민규는 굳이 그것을 읽지는 않고 알림을 지워버렸다. 삼 일의 휴가는 눈앞의 권순영에게 집중하기로 했으니까. 솔직히 지난 이틀이 아쉽지 않았다면 그건 정말로 거짓말이겠지만, 김민규는 방금의 한 끼 식사로 그 이틀이 어영부영 괜찮아진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선 슬금 옆으로 다가와 원래는 진작 해주고 싶었는데... 타이밍이 안 맞아서. 하고 우물쭈물 덧붙이던 권순영의 말에 사실 전부 괜찮아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권순영은 자리를 모두 정리하고서야 속내를 털어놓았다. 사실 권순영도 나름대로 삼 일의 휴가를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했었다고 했다. 이거저거 하면 아무래도 연예인 신분으로 부담스러운 걸 알아서, 최대한 고르고 또 골랐댔다. 원래는 더 대단한 요리를 해서 대접해볼 생각도 있었댔다. 그런데 자꾸 해도해도 실패를 했다는 거다. 준비는 안 됐는데 휴가는 맞닥뜨렸고. 이런저런 마음이 겹치는 바람에 결국 그래서 어영부영 이틀을 때웠댔다. 영화관에 가려던 걸 넷플릭스로 타협하고, 멀리 바다 구경을 가려던 걸 그냥 입욕제 하나 퐁당한 샤워부스에서 씻는 걸로 때워버리고. 이름도 헷갈리는 웬 프랑스 요리는 결국 돌고 돌아 김치찌개가 됐다고 했다. 그 말을 전부 들은 김민규는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어버렸고, 권순영은 또 손을 들어 웃지 말라고 등짝을 팍팍 때리기 바빴다.
그 때 김민규는 윤정한이 해줬던 말이 스물스물 떠올랐다.
그냥 하던대로 해. 그러다보면 너도 걔도 하고싶은 게 생길 걸. 그럼 그 때 그걸 하면 되지.
그리고 그 말은 정말로 크게 틀리지 않았나보다. 멋지고 대단한 휴가가 아니라도, 또 대단히 맛있는 요리가 아니라도 아무튼 다 좋아져 버렸다. 김민규는 그냥 권순영도 자신과 같은 이유로 고민을 하고 골머리를 썩었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게 정말로 충분해졌다. 계획하고 생각하던 것들이 아니라도, 그저 서로 같은 마음으로 떠올린 것들이라면 어느 하나 뺄 것 없이 소중했다.
한참을 웃는 제 모습에 권순영은 입술을 샐쭉대다가, 결국 마지못해 제 어깨에 머리를 푹 기대었다. 민규야,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또 제법 얌전해서 순순히 응. 이라고 대꾸해주었다. 내가 오늘 점심 만들어줬으니까 오늘은 내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그렇게 부리는 고집에도 또 고분고분 그럼, 당연하지. 하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나랑 데이트 가자. 카페 잠깐 들러서 마실 것 좀 챙기고...
서점 가서 책 구경하자, 우리.
나 너랑 그거도 꼭 해보고 싶었어.
빨리 당장 좋다고 말해. 그렇게 말하며 새침하게 구는 권순영의 말을 거절하는 법을, 김민규는 아마 앞으로도 쭉 모를 것이다.
그래, 여부가 있겠어. 형이 하자면 또 해야지.
내가 뭐가 싫어서.
*
둘은 사이좋게 스타벅스에서 자허블을 한 잔씩 테이크 아웃 했다. 사이즈업까지 해서는 야무지게 종이 빨대를 빠는 권순영이 김민규의 손을 이끌어 향한 곳은 멀지 않은 곳의 지하 교보문고였다. 혀엉, 근데 형 원래도 책 좋아했어? 그렇게 물으면 권순영이 또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흘겨볼까 김민규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아니, 그. 안 어울린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그냥 평소에 형 책 읽는 거 많이는 못 본 것 같아서... 그렇게 말 끝을 흐리면, 권순영은 피식 웃으며 덧붙일 뿐이였다.
민규야.
옛날에도 핸드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 시절 세상의 도파민은 다아, 요 서책이었다 이 말이야. 응? 뭔 뜻인지 알지?
오.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그래서 김민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리고 그 말 그대로, 권순영은 정말로 서점에 꽤나 능숙해보였다. 도통 익숙하지 않은 거대한 미로 같은 책장 속에서 김민규가 이리저리 눈을 굴리는 동안 권순영은 여전히 김민규의 손을 잡아 끌며 요리조리 곳곳을 누볐다. 뭔가 찾는 듯하던 권순영은 김민규가 영 장소를 낯설어하는 게 보였는지 서점 소개 쪽으로 아예 가닥을 바꾼 듯했다. 여기는 에세이. 그냥 가끔 심심할 때 읽으면 괜찮더라. 여기는... 자기개발 서적들. 근데 넌 여기는 별로 올 일 없을 거 같애. 워낙 알아서 잘 하는 편이라. 여기는 교양 서적들. 웬만한 거 종류별로 다 있어. 한 권만 골라서 읽고 애들한테 아는 척 좀 해봐. 그리고 여기는 소설. 나는 옛날부터 추리 소설이나 로맨스 소설 좀 좋아했어. SF는 영... 왜요? 하고 되물으면 권순영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고증이 너무 안 되어 있어서. 아 맞다, 외계인. 김민규는 가볍게 넘겼다. 사실 김민규는 서점 어디에 뭐가 있는지 보다는, 여기저기 다니며 재잘대는 권순영을 보는 맛이 좀 더 있었다. 말이 많아지는 게 딱 자기 좋아하는 얘기 할 때의 그 모습이 다시 보여서. 이 형이 또 생각보다 책을 좋아했었나보다, 싶어져서. 김민규는 붙잡힌 손을 얌전히 꾸물거렸다.
대충 서점 소개를 마친 권순영은 김민규를 학습 만화 코너에 바래다 주었다. 나 뭐 좀 찾을 게 있어서, 여기서 마음에 드는 것 좀 골라 읽고 있어봐. 형 근데 굳이 골라도 왜 학습 만화 코너야. 저기 원서 코너에 다시 데려다줄까? 아냐, 나 와이 시리즈 좋아해... 김민규는 순순히 권순영을 보내주었다. 권순영은 정말로 뭔가 급히 찾을 게 있다는 듯, 김민규의 손을 놓자마자 지나가는 직원 한 분을 잡아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 예전 번역본이, 아아, 그럼 ...은 있나요? 뭐라 흩어지는 말들에 김민규는 가만 나란히 꽂힌 책들로 시선을 돌렸다. 여기에 가득 꽂혀진 것들이 한 때 권순영의 재미였을 것들이었다.
책 제목들을 이것저것 훑으면 생각보다는 익숙한 것들이 많았다. 오, 코믹 메이플스토리. 제가 기억에는 스무 권 남짓에서 멈춰 있던 와이 시리즈들은 책장 몇 줄을 빼곡하게 채울 만큼 그 종류가 다양하게 늘어있었다. 어릴 때 하교하고 피카츄 꼬치 먹으면서 이런 걸 읽었던 것도 같은데. 한참 어리고 철없을 때의 생각을 하니 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면서도 닿는 것은 권순영의 생각이다. 권순영도 지금처럼 서점 곳곳에 빠삭해지기 전에, 이런 만화들을 보다 즐겨 읽을 시절이 있었을까. 내가 한창 문방구 불량식품을 먹으며 이런 책을 가득 읽을 때에 권순영은 뭘 하고 있었을까. 그러다 그 때에도 아마 권순영은 또 지금 권순영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결론에 문득 도달했다. 그야 그는 지구인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열 살 꼬꼬마일 때도 이미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은 살았을 권순영은 지금 모습이랑 크게 다를 게 없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문득 치사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사람은, 나는 평생 모를 기억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었다.
시간은 처음부터 서로에게 공평하지 않았던 거다.
김민규의 스물 일곱 생에 중에서 십 년을 넘는 세월을 차지하고 있을 권순영과, 권순영의 기나긴 생에 십여년으로 짧게 스칠 김민규.
그러나 동시에 스물 일곱 생을 가지고 권순영을 보내줘야 하는 김민규와, 아주 기다란 기억을 지닌 채 홀로 떠나야 하는 권순영.
만일 우리가 정말 슬퍼야만 한다면, 어디가 더 쓰리게 남을까. 그건 스물 일곱 김민규에게는 너무 어려운 논제였다.
권순영은 오래 지나지 않아 뿌듯한 얼굴을 한 채로 다시 김민규를 찾아왔다. 민규. 나 가서 계산까지 다 하고 왔어. 사실 이 책 선물해주고 싶어서 서점 오자고 한 거였거든. 인터넷으로 사도 되기는 하는데, 이런 건 원래 눈 앞에서 직접 현물로 주는 맛이 좀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은 등 뒤에 책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까 요지는, 얼른 직접 선물해주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는 거지. 김민규는 한참 뜸을 들이는 권순영을 재촉했다. 어엉, 형. 나 읽고 독후감까지 빠방하게 써올 테니까 무슨 책인지 좀 보여주면 안 될까. 나 주려고 사온 거잖아. 그리고 권순영이 김민규에게 들이미는 것은...
짠! 자, 선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이야.
은하수... 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뭐?
아주 쩔어주게 두꺼운 책 한 권이었다.
*
권순영은 아주 자랑스레 책 제목을 다시 읊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어어, 형. 나도 지금 책 표지를 보고 있기는 해. 제목은 아주 잘 알겠어. 근데... 이거 뭐 이렇게 두껍지? 이게 책이야? 김민규는 권순영이 내민 책...으로 추정되는 무언가를 양 손으로 급히 받아들었다. 소설... 이라는 게 원래 다 이래? 내가 본 사전보다 더 두꺼운 거 같은데? 김민규가 뭐라 더 말도 못 붙이고 멍하니 책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으면, 권순영은 뿌듯한 어투로 또 덧붙이는 거다. 짱 두껍지. 이거 천이백삼십오페이지야. 천이백... 뭐? 천이백삼십오페이지. 형 미안한데 내가 못 알아들어서 되묻는 게 아니지 않을까.
권순영은 주절주절 몇 마디 설명을 이었다. 여섯 권짜리 소설인데 이건 합본이라서 그래. 이거는 다섯 권 분량 다 합쳐둔 거라, 천이백삼십오페이지. 이거 다 읽고도 아쉬우면 남은 마지막 6권 읽으면 돼. 내가 이 버전으로 구하느라 좀 고생한 거라니까. 이 번역본은 예전에 한 번 절판됐어가지구... 꼭 이걸로 구하고 싶었거든. 다행히 남아있었대. 짱이지. 어어... 짱이다. 짱인데 형. 방금 내 수준 고려해서 학습 만화 코너에 날 던져줘 놓고선 냅다 또 선물이라고 천이백삼십오페이지짜리 소설을 주면 내가 어떻게 할까. 형 아까는 나보고 SF 싫어한다며... 이거도 SF 아냐? 맞지 않나? 반쯤 앓는 소리를 내니까, 권순영은 결국 꺄르르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웃었다.
좀 어려우라고 일부러 이걸로 고른 거야.
여섯 권이 한 권씩 떨어져 있는 세트 아니라, 굳이굳이 절판도 한 번 된 합본으로 책을 산거도 그런 거고.
나는 너한테 이게 쪼금 어려웠으면 했거든.
나 생각날 때마다 한 페이지씩 읽으라고 사주는 거야. 권순영은 그렇게 말하며 또 슬쩍 웃었다. 김민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권순영을 또 멍하게 보면, 권순영은 사르르 눈을 접으며 잔잔한 목소리로 말들을 늘어놓는 것이다. 제목도 딱이지 않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나 은하수에서 온 사람이잖아. 여행이라는 대목도 얼마나 딱 맞게. 그냥 제목 한 줄만 읽어도 딱, 너한테 내가 생각날 거 같잖아.
그러니까 나 생각날 때마다 한 페이지씩 아껴 읽어.
매일 읽지도 말고, 생각날 때에만 한 페이지씩 읽어. 기억 안 나면 전에 읽었던 페이지 다시 또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면 읽었던 거 한 번 더 읽고. 그렇게 읽어. 두 페이지는 안 돼. 딱 한 페이지만 읽어.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정말로 나를 네가 정녕 기억해야겠다면.
딱 그렇게 이 책만큼 무거워야지. 안 그래? 권순영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했다. 운동하면서도 들고 다니고 스케줄 갈 때 캐리어에도 넣어가고 그래. 일부러 무거우라고 그러는 거야. 불편하라고 고른 거야. 그럼 좀 묵직하니까 미워서라도 쪼끔은 더 인상 깊게 기억날 거잖아. 딱 그러라고 얄밉게 고른 거야.
천이백삼십오페이지랬잖아. 그럼 적어도 천이백일은 나를 곱씹을 방법이 있겠다. 그치. 그러니까...
권순영의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김민규가 권순영을 와락 당겨 안았기 때문이었다.
둘 사이에 그 두껍한 책이 불편하게 꼈다. 8센치는 족히 되어보이는 두꺼운 것이 복대마냥 사이에 끼자, 권순영은 조금 낑낑대는 것도 같았지만 김민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권순영을 그냥 꾸욱 안았다. 권순영 진짜 웃긴다. 언제 그 작은 머리통으로 그런 생각을 다 했지? 뭐 인마. 내가 너보다 책은 몇 천 권을 더 읽었는데요. 그렇게 대꾸하는 권순영에 김민규는 또 왈칵 웃어버렸다. 아, 형은 진짜 안 되겠다. 나도 뭐 좀 사줘야겠네. 그렇게 말하면 권순영은 또 퉁명스레 말을 잇는다. 너 책 잘 모르잖아. 뭐래, 형.
내가 언제 책 사준다 그랬나.
그렇게 이번에는 김민규가 권순영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형, 형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교보문구에는 책만 파는 거 아니거든. 잡화도 팔고, 뭐 굿즈 같은 것도 팔고.
그리고 앨범도 팔지.
김민규가 향한 곳은 앨범들이 가득 전시된 곳이었다. 김민규는 거기서 어렵지 않게 세븐틴의 이름을 찾았다. 꽤나 규모가 큰 서점이라서 그런지, 다행스럽게도 제법 예전 앨범들도 크게 빠진 것 없이 예쁘게 전시되어 있었다. 김민규는 어렵지 않게 종류별로 하나씩 앨범을 바구니에 싹싹 쓸어 담았다. 민규야, 너 뭐 해...? 그렇게 물으면 김민규 역시도 또 너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할 수 있었다. 보면 알잖아. 우리 앨범 사지.
생각해보니까, 내가 형한테 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이게 제일 낫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인생에서 제일 오래한 게 이건데. 전부 다 불태운 게 이건데.
그리고... 형이랑 같이 한 것도 결국 이거잖아.
형, 우리 집 가면 이거 다 까서 덧칠 좀 하자. 가사집 펴고 형 파트였던 줄에다가 밑줄도 좀 치고. 나 휴대용 폴라로이드 같은 거도 있거든. 원우 형한테서 쌔벼 와서. 그걸로 사진도 좀 뽑아서 앨범 표지 사이에 오려서 끼워넣고 그러자. 김민규는 빼먹은 건 없는지 살피며 바구니에 앨범을 차곡차곡 담았다. 아, 이번에 새로 나오는 앨범은 아직 선예매라 없네. 그건 좀 아쉽다. 그렇게 능청스레 말을 덧붙여도 권순영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김민규는 그래서 그냥 다시 권순영의 손을 잡아서 계산대로 이끌 뿐이었다.
형. 나한테는 아무튼 평생 열 셋이잖아.
형이 그렇게 형의 흔적을 남겨 줬으니까, 나는 이렇게라도 형 자국을 좀 남겨보려고.
형 여기 있다고 아주 고래고래 얘기 좀 해보려고.
권순영은 여전히 답이 없었다.
*
그 날의 데이트는 서점을 벗어나서도 끝나지를 않았다. 외식하고 가도 된다는 권순영의 말에도, 김민규는 점심을 얻어 먹었으니 저녁은 제가 만들어야겠다며 권순영을 잡아 끌고 마트로 향했다. 둘이 나란히 카트를 끌며 이것저것 장을 보는 과정이 어쩐지 또 정말로 같이 산다는 체감을 하게 하여서 괜히 새삼스러워졌다. 김민규는 너무나 당연하게 고기를 몇 인분씩 부위 별로 카트에 쓸어담았고, 권순영 역시 너무나 당연하게 김치를 종류별로 싹싹 카트에 우겨 넣었다. 은근슬쩍 닭가슴살을 카트에 담는 권순영을 김민규는 조금은 미운 듯 흘겨보았고, 형 이거 나 먹으라고 일부러 사는 거잖아... 하는 말에 권순영은 깔깔 웃으며 다시 닭가슴살을 카트에서 뺐다. 그 모든 과정이 정말로, 정말로 자연스럽고 소소하게 좋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장도 다 봐놓고선, 김민규는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를 않았다. 김민규는 기어이 양 손 가득 바리바리 장 본 것을 들고서 권순영을 데리고 영화관까지 갔다. 곧 저녁을 먹을거라면서 팝콘에 나쵸에 콜라까지 한가득 사서는 영화관 커플 좌석 한 켠을 차지했다. 권순영은 영화를 다 보고 나와선 볼멘소리를 했다. 이럴 거였으면 그냥 영화 다 보고 장을 봤어야지. 그렇게 툴툴대도 김민규는 이 정도는 음식 안 상해서 괜찮아, 하고 너스레를 떨 뿐이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김민규가 거나하게 한 상을 차렸다. 권순영은 옆에서 기웃대며 도우려다가도 영 요리가 서툰 탓에 그냥 식탁에 수저를 놓는 것으로 돕는 것을 만족해야 했다. 배가 터질 때까지 음식을 밀어넣고선 둘은 뽀득뽀득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형 오늘 같이 자까. 하는 말에 김민규는 등짝을 두 대 정도 얻어맞기는 했지만 권순영은 결국 같은 침대에 엉겨붙는 김민규를 아주 밀어내지는 않았다. 그래서 둘은 잠도 나란히 잤다. 그 역시도 김민규는 참 좋았다.
삼 일의 휴가가 끝이 났다. 김민규는 그 뒤로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마에스트로 활동을 시작하며 김민규는 각종 예능이며 음방이며 그 사이사이에 낀 자체 컨텐츠까지 쉴틈없이 소화했다. 그러면서도 김민규는 또 틈만나면 핸드폰을 들고 권순영을 찾았다. 음방 직캠이 뜰 때마다 죄다 권순영에게 링크를 보냈다. 보고 감상문을 제출하라는 구박 아닌 구박도 이모티콘 가득 붙여가며 넣었다. 김민규는 슬슬 가득 쌓아두는 연락 사이에 보고 싶다는 말도 이제는 어렵지 않게 섞을 수 있었다. 권순영은 그 모든 수다들을 잠자코 받아주다가, 웬일로 얌전히 저 역시도 보고 싶다는 답을 돌려 주었다. 그 반응에 김민규는 이제 곱절로 권순영이 생각났다.
아, 진짜.
진짜 보고 싶네...
김민규가 핸드폰을 붙들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으면, 주변 멤버들의 반응 역시도 심상치 않았다. 야. 쟤... 연애하냐? 몰라요. 근데 아무튼 정상은 아닌 듯. 그렇게 속닥이는 말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김민규의 귀에는 닿지도 않았다. 김민규는 빼곡하게 들어찬 스케줄 사이의 빈틈을 어떻게든 계산하느라 바빴다. 이번에는 뭘 해서 먹이지. 아니면 잠깐 어디 구경이라도 가자고 할까. 둘의 사이에서 주도적으로 뭔가 하고 싶다고 얘기하는 쪽은 김민규가 되었다. 윤정한의 말이 정말로, 정말로 맞았다. 이제 김민규는 권순영과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끝도 없이 샘솟았다.
야, 민규야... 그 미안한데.
너 혹시 연애하냐.
그렇게 입을 뗀 것은 이지훈이었다. 김민규는 또 실실 웃으며 대충 대답했다. 아이 형, 내가 뭔 연애를 한다고... 아 잠만. 나 이거 답만 좀 하고. 그런 반응에 이지훈은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어련히 질렸거나, 볼 꼴 못 볼 꼴 전부 다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건 김민규는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김민규는 마에스트로에서 도입부 안무를 맡았다. 홀로 무대에서 뒤돌아서 멤버들을 바라보며 지휘를 하는 역할이었다. 김민규는 아마 원래대로라면 이 부분의 안무는 권순영의 것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만큼 그에게 찰떡으로 어울리는 파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민규는 배로 열심히 준비하고 또 몸 부숴져라 춤을 췄다. 권순영의 몫만틈 해낸다는 생각으로.
활동의 성적은 정말 나쁘지 않았다. 사실 좋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김민규는 음방 1위 트로피를 들고서, 기쁜 마음으로 소감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를 받아들고 관객석을 바라봤다. 캐럿봉이 반짝였다. 김민규는 관객석에서 등을 돌리고 오로지 멤버들만을 바라보며 지휘하는 그 장면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다. 멤버들을 제외하면 무엇도 눈에 들어차지 않는 그 순간, 맡은 바를 마치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 원래 바라보아야 할 객석을 바라보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또 계속 여기에 있겠다고 확신을 주는 듯 반짝이는 응원봉들이 그렇게나 별처럼 눈에 콕콕 들어왔기 때문이다.
김민규는 권순영을 기억한다.
함께 무대에 있던 시절은 이제 오로지 나와 당신만이 기억하는,
이제는 이 무대 아래에서 나를 바라볼 당신.
그럼에도 그 때와 한결같이, 별이라는 이름이 가장 잘 어울리게 빛을 낼 당신.
김민규는 조심스레 입을 뗐다.
가슴에 가득 벅차오르는 소감을 말하기 위해서.
*
활동은 무사히 마무리 되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민규의 일정이 한가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컴백 활동이 끝나면 빼곡한 콘서트 일정이 김민규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깝게는 일본부터 미국이며 유럽까지 종횡무진하는 일정에 김민규는 가만 쓴 입을 다셔야했다. 그 전 역시도 아무리 바빴다지만, 해도 국내와 해외는 느낌이 아예 달랐으니까. 전에는 어떻게든 틈을 내면 그래도 어찌저찌 좀 붙어있을 수 있었지만 해외로 가버리면 권순영은 정말로 덩그라니 혼자 남아있게 될 것이다. 김민규가 해외 투어를 시작하기까지는 한 달 남짓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여름의 한중간이 되는 시점이었다.
그래도 굵은 컴백 일정 하나를 무사히 소화하기는 해서, 김민규는 그나마 전보다는 스케줄 사이사이의 틈을 더 잘 만들어낼 수 있었다. 언제나처럼 김민규가 안기면 권순영이 구태여 밀어내지는 않는 모양새에 더 가깝기는 했지만. 김민규는 권순영이 정말로 싫으면 질색팔색하며 밀쳐낼 인간이라는 걸 알기에, 이 형도 내심 좋은가보네... 하고 오히려 더 붙어다니기를 택할 뿐이었다. 둘 중에 바쁠 수밖에 없는 사람을 고르라면 김민규였기에 더욱 그렇게 구는 탓도 있었다. 언제나 먼저 시간을 내는 쪽도, 먼저 무언가를 하자고 하는 쪽도 그래서 전부 김민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웬일로 권순영이 먼저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말을 붙이는 것이다. 나 너랑 가고 싶은 맛집이 생겨서. 목요일 안 돼? 나 목요일이 좋아. 목요일이 사람 제일 적대. 그렇게까지 몇 번이고 구체적인 날짜까지 요구해가며 권순영이 적극적으로 구는 건 또 처음이라,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에게 최대한 협조하기로 했다. 시간이 조금 변동되어도 괜찮을 법한 스케줄을 조정하면서까지 목요일을 애써 비워냈다. 형 나 목요일 될 듯. 화요일에야 그렇게 답을 돌려주자, 권순영은 아닌 척 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게 눈에 다 읽혔다. 하여튼 정말 거짓말 못 해. 김민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비워낸 김민규를 데리고 권순영이 향한 곳은 대학로였다. 권순영이 그렇게까지 먹고 싶어한 건 생각보다는 평범한 스테이크였다. 꼭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으면서, 권순영은 그렇게 생각보다 음식을 많이 먹지는 않았다. 식사가 마무리 될 때 쯤 자꾸만 시계를 보며 시간을 확인할 뿐이었다. 접시를 싹 비우고서 다시 마스크를 눌러 쓴 김민규를 데리고서는 소화 시킬 겸 조금 걷는 게 어떠냐며 손을 가만히 잡아끌 뿐이었다. 김민규는 그것 역시도 순순히 따랐다. 권순영은 대학로의 골목골목을 누볐다. 확실히 소극장이 많아서인지 크고 작은 연극 현수막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다.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권순영은 그중에서도 특히 사람이 많지 않은 골목 하나를 찾아 걸었다. 그렇게 조금 걷다가, 또 문득 입을 여는 것이다.
민규야.
여기 지금 공연 하려나보다. 한 번 보러 갈래?
권순영이 가리킨 곳은 반쯤 지하에 있는 어느 작은 공연장이었다. 여기서 공연을 한다고? 김민규는 슬쩍 주변을 살폈다. 뭐 걸려있는 게 하나도 없는데. 의문스러움에 눈을 가늘게 뜨자 권순영이 한 번 더 재촉했다. 가보자. 진짜 하는 거 같다니까. 권순영은 반 쯤은 앞서 걸으며 기어이 김민규를 관객석에 앉혔다. 좌석이 오십 개도 될까말까한 정말 작은 공연장이었다.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누군가가 더 올 것 같지는 않았다. 형, 여기 정말로 공연하는 거 맞아? 그렇게 조심스레 권순영에게 물으면, 권순영은 진짜 한다니까. 하고 퉁명스레 답하며 나 화장실 좀. 하고 자리를 떴다. 진짜 이게 맞나? 여전히 의뭉스런 김민규가 덩그러니 혼자 관객석에 남자 머지않아 무대의 불이 꺼졌다. 무대 뒤에서는 우당탕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뭔가 하려고는 하는 것 같은데... 떠들썩한 소리가 얼추 가라앉자 썩 좋지 않은 음질의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아.
지금부터... 어, 그 뭐냐.
미니 콘서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니 콘서트? 거기까지 들은 김민규의 눈썹이 작게 들썩였다. 진짜 무슨 공연이라도 하나 하는 거였나? 그런 생각을 할 때 쯤, 이윽고 째깐한 무대에 올라온 것은 정말로 지극히 익숙한 작은 인영이었다. 김민규는 그제야 권순영의 꿍꿍이를 알았다. 무대에 올라온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언제 훔쳤는지도 모르겠는 김민규의 커다란 구찌 선글라스를 뺏어 쓴 권순영이었다. 아닌가, 호시라고 하는 게 맞을까. 권순영은 혼자 당그라니 웬 우쿨렐레 하나를 들고선 무대 중앙으로 뚜벅뚜벅 향했다. 그러곤 김민규를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야매 가수 호시입니다. 아 맞다 불 안켰네. 그러고 급히 호다닥 뒤돌아 무대 뒤로 향해 어설프게 무대 조명을 켰다. 그 모든 것을 본 김민규는 자지러지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이 형 처음부터 이러려고 여기 오자고 한 거였구나.
굳이굳이 목요일로 해달라고 한 것도, 먹고 싶은 게 있다고 대학로 오자고 해놓고선 별로 먹지도 않은 게 전부 다.
사실은 몰래 이걸 준비하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진짜 웃음을 못 참겠는 거다. 제가 활동하느라 한참 바쁠 시기에 여기저기 쏘다니며 대관을 알아봤을 권순영이나, 딴에는 또 숨겨보고 싶다고 이런 저런 핑계를 찾아 봤을 권순영이나. 그런 모습들을 떠올리는 게 정말 어렵지 않아서 자꾸 웃음이 샜다. 아씨 웃지마 김민규. 기어이 무대에 올라간 권순영 입으로 그 말까지 나오고서야 김민규는 겨우 새나오는 미소를 참았다. 어어, 형. 알겠어. 얼른 해봐. 권순영은 큼큼거리며 목을 골랐다.
큼큼, 아무튼. 준비한 곡은 하나입니다.
미니잖아요. 그래서 진짜 미니하게 준비했습니다. 네, 이거 하고 싶어서 너 부른 거 맞으니까 자꾸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미니 콘서트. 관객 딱 하나한테 바치는 공연. 그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아무튼 엄청 짧으니까 얼른 집중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김민규는 그 말에 손이 얼얼하도록 박수를 쳤다. 어떻게 기타도 피아노도 아니고 우쿨렐레를 냅다 들고 무대를 할 생각을 했지. 하긴 생전 악기를 다룰 줄 모르던 권순영이다. 아마 한참 동안 저 자그만 악기를 들고서 끙끙댔을 거다. 공연한다는 저 한 곡을 위해서 전력으로 준비했겠지. 권순영은 짐짓 부끄러운 듯 우쿨렐레를 튜닝하는 듯 마는 듯 굴다 조심스레 손을 네 줄 위에 올렸다. 그럼 시작할게요. 그 일곱 글자 문장에 김민규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You are the most beautiful moment in my life
이건 movie에서 이렇게 불러 best part
아. 그 첫 소절을 들은 김민규는 저도 모르게 작게 입을 벌렸다. STAY였다. 맞네, 그렇네. 이제 권순영이 세상에 없으니까 권순영의 노래들도 세상에 없는 거구나. 사실 우쿨렐레를 들고 나타난 권순영에, 김민규는 그가 무슨 노래를 준비했을지 내심 머리를 굴리기도 했었다. 역시 쉬운 노래들일까. 아니면 저런 현악기가 어울릴만한 외국 팝송들일까. 근데 전부 아니였다. 정말로, 정말로...
당신과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할.
다시 말해, 온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 선곡한 그런 노래.
김민규는 그 노래를 잘 알았다. 선율이 마음에 들어 자주 챙겨듣던 노래였으니까. 그래서 이 노래가 우쿨렐레로 연주하기에는 그렇게 적합하지 않은 장르의 노래라는 것도 알았다. 그건 상당히 팝하고, 전자드럼 소리와 기계음 소리가 섞인 신디사이저가 메인 멜로디가 되는 노래였으니까. 세상에서 전부 지워졌으니 곡의 악보가 존재할리도 만무했다. 그럼에도 꾸역꾸역 우리만이 알고 있는 그 멜로디를 다시 불러보고 싶어서, 또 들려주고 싶어서 어떻게든 기억을 더듬었을 권순영. 그렇게 코드를 만들어내고 우쿨렐레를 켜며 한참을 끙끙댔을 권순영. 빈약한 우쿨렐레 반주 위로 권순영의 목소리만이 오롯이 선명하게 새겨진다. 게다가 권순영은 기계치였다. 우쿨렐레에도 마이크를 달아야 한다는 것을 깜빡한 것이 분명했다. 권순영이 열심히 손을 놀리는 것이 무색하게 반주는 거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민규에게는 권순영의 노래 하나만이 간신히 선명했다. 그래도, 그럼에도.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경계를 넘어서 만났고
거짓말처럼 첫눈에 알 수가 있었어 널
그래 내가 찾던
김민규는 이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이건, 이건 반칙이잖아.
그래, 정말로 인정해야했다.
Baby hold me, stay with me
이건 불가항력이다. 그 어떤 우주의 법칙보다도 강력한.
*
김민규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결국 무대 위로 뛰쳐 올라갔다.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는 권순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언제 이걸 다 준비했어. 응? 조금은 벅차기까지 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는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꽤나 새초롬하게 뭐 그냥 너 바쁜 동안... 하고 대충 대꾸할 뿐이었다. 김민규는 미니 콘서트에 대한 답으로 돌아가는 길에 꽃다발 하나를 샀다. 굳이굳이 아주 화려한 생화가 가득 든, 싱싱한 꽃다발을 골랐다. 멋진 공연에 대한 답이야. 꽃다발을 내밀며 그렇게 말하자 권순영은 꽃보다 더 해사하게 또 웃었다.
돌아가는 길은 이미 해가 거뭇하게 졌음에도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낮의 열기가 채 식지 않은 탓이었다. 김민규는 사실 요새 부쩍 날이 더워졌음을 알고 있었다. 대기실에서도 차 안에서도 하나 둘 에어컨을 트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미니 선풍기를 들고 다니며 중간중간 땀을 식히는 멤버들도 생겼다. 김민규는 그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잡은 손을 더욱 놓지 않았다. 자주 바꾸지도 않을 기어 위에 권순영의 손을 올리고서는 그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권순영의 말이 맞았다. 그건 누가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정말로 그 순간이 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었다.
해가 길어졌다. 낮이 더워졌다. 밤이 되어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게 가리키는 건 자명했다.
권순영은 이제 떠나야한다는 거다.
*
김민규는 아직도 종종 고민하곤 했다.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냥 막연하게 바라게만 되었다.
권순영이 너무 많이 아프지 않으면 좋겠다. 하고서.
*
그건 김민규가 본격적인 해외 투어를 며칠 남겨두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김민규는 이제 권순영과 같은 침대에서 잠드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김민규는 항상 권순영을 꼭 안고 잠들었고, 가끔은 눈을 뜨고서도 그 온기가 그대로 잘 남아있는지 가만 옆에 앉아 한참을 바라보았다. 새액거리는 옅은 숨소리가 미세하게 들려오면 김민규는 행여 깨기라도 할까 아주 조심스레 권순영의 머리를 정리해주었다. 권순영이 그렇게 잠을 자는 동안 김민규는 권순영이 먹을 음식을 가득 요리해두었다. 대용량 음식을 만드는 것에 익숙해서 다행이었다. 권순영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김민규는 행여나 제가 곁을 비운 동안 그가 굶기라도 할까 항상 카레며 육개장 같은 것을 한 솥 가득 끓여놓고 스케줄을 나서곤 했다. 며칠 동안 한참 바쁘게 스케줄을 다녀오고서도 그게 거의 줄어있지 않은 것을 보고 나면, 김민규는 큰 동요 없이 그걸 죄다 쓰레기통에 비워내고서는 다시 새 요리를 했다. 이제 김민규와 권순영의 대화방은 일방적이었다. 권순영은 제법 애교스러운 말투로 김민규의 답에 정성스레 대답해주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답의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김민규는 그래도 전혀 아쉽다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그런 만큼 오히려 더 많은 말들을 쌓았다. 가능하다면 하나라도 더 남겨두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김민규는 그 날도 권순영에게 이런 저런 말들을 보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런데 뭐라 연락을 남기기도 전에, 권순영에게 전화가 온 거다. 늘 하던 문자가 아닌 전화가.
뀨. 지금 뭐 하고 있었어.
권순영의 목소리는 평소와 비슷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명랑한 것도 같았다. 김민규는 스케줄 중이었다는 무난한 답을 내놓았다. 요새의 권순영은 김민규가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 쯤이면 항상 잠들어 있었기 때문에, 김민규는 정말 오랜만에 잠에 취하지 않은 똘망똘망한 권순영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바쁘지는 않고? 오늘 좀 괜찮았어? 그렇게 묻는 권순영에게 김민규는 문자로 보내려던 것을 곧바로 음성으로 옮겨 답했다. 바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괜찮았어. 오늘 있지, 준휘 형이랑 명호가 말이야...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다른 말들로 흘러갔다. 멤버들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 정확히 어떤 촬영을 했고 무슨 연습을 했는지에 관한 설명. 김민규는 그 모든 것들을 읊으며 괜히 신발 끝을 바닥에 끌었다. 권순영의 반응은 전체적으로 좋은 것 같았다. 웃긴 이야기에 비실비실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넘어오기도 했고, 대견하다며 자신을 칭찬하는 말 몇 마디를 건네기도 했다. 형은 어땠어? 그렇게 되물으면 권순영 역시 제 하루를 사근사근 읊어주었다. 잠 좀 많이 자고, 너가 해준 찌개도 좀 먹고. 그러고 쉬고 있었지. 김민규에게 다시 촬영을 들어가야 한다는 매니저의 싸인이 떨어졌다. 포근한 권순영의 목소리에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결국 김민규는 대화를 끊기 위해 권순영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했다. 형, 나 근데 이제 들어가봐야 할 거 같아서 그런데... 그렇게 운을 떼고 있으면, 권순영이 불쑥 말을 끊는 것이다.
민규야.
혹시 내일 바빠?
그렇게 묻는 권순영의 말에 김민규는 저를 재촉하는 매너저에게 눈짓으로 사정하며 급히 핸드폰 캘린더를 켰다. 스케줄 두 개가 끼어 있었지만 어떻게든 간절히 부탁하면 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어? 아니, 음. 아마 쉴 수 있을 거 같아. 그렇게 애매한 답을 뱉어내면, 핸드폰 너머로 권순영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뀨야, 우리...
안양으로 별 보러 갈래?
너랑 보고 싶다. 별. 그 다정한 목소리에 김민규는 본능적으로 마지막을 직감했다. 더 이상 특별히 말을 붙일 수 없어, 김민규는 그냥 그리 하겠다고 답하곤 스케줄을 이유로 전화를 끊고야 말았다. 이제는 정말로 다시 샷에 들어가야 한다며 자신을 재촉하는 매니저 형의 목소리가 물 속에서 듣는 음악 마냥 웅웅거리며 이리저리 반사되었다. 권순영은 끝까지 그렇게 굴 모양이었다.
무겁지 않게, 일상의 한 순간을 어렵지 않게 흉내내며.
그를 상기할 때면 그가 외계인이라는 사실도, 그가 떠나야만 한다는 현실도 아닌...
권순영이 그 시간 속에서 어떻게 웃어왔는지가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게 하고 싶어서.
근데 왜 하필 안양이야? 집에 돌아온 김민규는 그렇게 물었고, 권순영은 안양이 김민규의 고향이기 때문에 궁금했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한 번쯤은 거기를 가보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김민규는 정작 권순영의 그런 대답에 난처해지고 말았다. 원래 그 지역의 놀 거리는 지역 토박이보다도 놀러오는 관광객들이 더 잘 안다고 하지 않는가. 물론 안양에서 나고 자라기는 했으나 딱히 권순영을 데리고 갈 만한 장소, 무엇보다도 마지막을 보낼 수 있을 만큼 좋은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입술을 꾹 물었다. 형 근데, 내가 안양에 어디가 좋은지를 잘 모르는데... 조심스럽게 입을 떼는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정말로 상관없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 어디 갈지는 같이 찾아보면 되지. 그리구 나 엄청 좋고 화려한 데 안 가도 돼. 그냥 너랑 시간 보내는 게 다 좋을 텐데. 너랑 같이 별 보고 싶어서 가는 건데 뭐가 문제야, 뀨. 응? 대충 보이기만 하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먼저 몸을 붙여 애교를 떠는 권순영에, 김민규도 결국 그냥 권순영을 품에 끌어안고는 그 작은 머리통을 몇 번 다독였다. 그래, 그러자. 같이 찾아보지 뭐. 품 안의 온기가 선연했다. 소동물 마냥 작게 색색거리는 권순영의 일정한 호흡이 그대로 몸을 타고 전해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안에 딱딱하게 얼어 있던 마음이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권순영은 얌전히 김민규의 품에 안긴 채 불평 아닌 불평을 늘어 놓았다. 있지, 안양에 어린이 천문대가 있다는 거야. 혹시 볼 수 있을까 하고 좀 찾아봤는데 원칙상 성인은 안 된다는 거 있지. 내 눈에는 솔직히 김민규도 어린이고 갓 태어난 갓난애인데... 좀 치사하게 느껴졌어. 웅얼대면서도 잘만 조잘거리는 권순영에, 김민규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형, 나만큼 큰 애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그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아직 시들지 않은 꽃다발에서 희미하게 장미 향이 풍겼다.
둘은 굳이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서지 않기로 하였다. 마지막이라는 말만 꺼내지 않았을 뿐, 둘 모두 이것이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걸 암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김민규는 그 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어떻게 하는 게 권순영에게 가장 좋을지를 한참 생각했다. 마음으로만 따진다면 김민규는 아마 수십 번이고 권순영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김민규는 그런다고 해서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는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김민규가 매달린다고 해서 막차 시간이 바뀌는 건 아닐 테니까. 그걸 놓친 권순영은 아주 오래오래 첫차를 기다리며 난감해질 게 뻔하니까. 김민규는 그래서 권순영을 붙잡지 않기로 마음 먹는다. 아마 그 마음을 모두 숨길 수는 없을 테지만, 적어도 눈물만큼은 흘리지 않기로 단단히 결심한다. 이 마지막 여행 역시도 시시콜콜한 얘기나 나누는 평소대로의 일상으로 권순영에게 기억될 수 있도록. 김민규는 새벽 내내 울컥 올라오는 마음을 씹고 또 씹었다.
권순영을 아침 일찍 깨워 출발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풋새벽에 잠을 깬 김민규는 잠든 권순영을 한참 바라보다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를 뒤에서 끌어 안았다. 품 안에서 작게 들썩이는 조그만 온기를 꾸욱 새겨넣었다. 권순영이 눈을 뜬 것은 오전 열한시 쯤이었다. 간신히 눈을 뜬 권순영은 통 잠이 깨지 않는지 온 얼굴이 퉁퉁 부어있었다. 형 지금 눈 뜬 건지 안 뜬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실없이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김민규는 그 부은 볼을 몇 번 쓰다듬고는 그를 안아 들어 부엌으로 향했다. 얌전히 식탁에 앉은 권순영에게 집에 남은 반찬들로 늦은 아침을 먹인 김민규는 평소보다 곱절은 더 꼼꼼하게 설거지를 마쳤다. 식탁도 박박 닦았다. 짐은 무겁게 챙기지 않았다. 모든 채비를 마친 것은 열두시 반 쯤이었다. 모자 안 써도 돼? 그제야 잠이 좀 깬 권순영이 볼을 꾹꾹 누르며 그렇게 묻자, 김민규는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 뿐이었다.
둘 사이에서는 종일 대화가 끊이지를 않았다. 안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김민규는 부러 경쾌한 노래만 골라 틀었다. 세븐틴 노래는 쏙 빼놓은 채로, 2세대며 3세대 아이돌들의 플레이리스트를 틀어 놓고선 한참을 따라부르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스몰 토크를 빼먹지 않았다. 김민규는 이제 윤정한마냥 실없는 농담을 툭툭 잘 던지게 되었다. 그럼 권순영도 그걸 따라 웃으며 괜히 김민규에게 장난스런 대답을 돌려주곤 했다.
안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해가 지기 전에 별이 잘 보일만한 곳을 이곳저곳 찾아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검색한 야경 명소 몇 군데를 돌아 보면서도, 김민규와 권순영은 겸사겸사 딴짓을 하며 노는 것 역시 빼먹지 않았다. 밤에 불빛 공연을 한다는 어느 박물관 앞에서는 아직 해가 훤하다는 핑계로 박물관 안을 이곳저곳 쏘다니며 온갖 전시들을 구경했다. 하늘이 훤히 트여 있어 별이 잘 보인다는 어느 공터에서는 근처에 유명한 떡볶이 집이 있기에 분식을 종류별로 쓸어 먹었다. 어우 형 나 배불러서 숨 쉬기가 힘들어. 시킨 음식의 대부분을 먹어치운 김민규가 그렇게 말하자, 권순영은 너 그래도 저녁 먹을 거 다 알아. 하고 일갈하였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어느 깊지 않은 산자락이었다. 산 중턱 쯤에 걸쳐있는 그곳은 근처에 크지 않은 계곡이 있어 적당히 발을 담그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었다. 이미 뉘엿해진 해 아래로 둘은 사이좋게 계곡물에 발을 담갔고, 먼저 슬쩍 물을 튀기는 장난을 건 것은 권순영이었다. 어쭈, 형 지금 해보자는 거야? 그렇게 말하며 권순영에게 어기적 다가가던 김민규가 그대로 미끄러져 풍덩 엉덩방아를 찧었다. 권순영은 산이 떠나가라 깔깔 웃음을 지었고, 김민규는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권순영을 꽉 끌어안는 것으로 복수를 대신했다. 아 차갑다고 김민규!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결코 놓아주지를 않았다. 김민규는 더욱 강하게 권순영을 안으며 문득 생각했다.
아.
내일도 딱 이러면 좋을 텐데.
한참 이곳저곳을 쏘다니는 동안 이미 해는 저물었다. 지는 해는 붙잡을 수 없고, 부른 배도 한참 전에 꺼져버린 지 오래였다. 오늘의 날은 이미 여름의 초입을 알리는 듯 뜨거웠고, 곧 찾아올 한밤에는 권순영이 돌아가야 할 별이 떠오를 테다. 김민규는 권순영과 하루를 보내면서도 사실 내내 그 생각을 하느라 바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문득 가슴이 어느 때보다도 저릿해져 산산히 조각나는 듯 하다가도, 또 떠나야 할 권순영의 모습을 떠올리면 그 중 어떠한 파편도 뱉어지지 못한 채 웃음으로 삼켜지는 것이었다. 김민규는 무엇보다도 그저 이 순간을 유예하고 싶었다. 자신도 권순영도 알고 있을, 필연적일 마지막을 어떻게든 눈을 감은 채 모른체 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결론은, 김민규도 권순영도 지극히 잘 아는 것으로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품 안에 안겨있던 권순영이 천천히 멀어졌다. 권순영은 그 대신 김민규의 손을 잡아 끌었다. 차가운지 뜨거울지 모를 온도가 손에 닿았다. 권순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찬찬히 글자를 하나하나 씹어가며 말을 뱉었다.
민규야.
우리 이제 갈까?
김민규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면 권순영 역시도 그 결말을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권순영이 울지 않는 이상, 김민규 역시도 웃을 수밖에 없으므로.
*
둘이 자리를 잡은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정자였다. 다행히도 적당한 산 중턱이라서인지, 크게 가리는 것 없이 훤하게 하늘이 잘 내다보였다. 김민규는 꾸역꾸역 권순영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아선 까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날이 흐린 탓인지 별이 아주 잘 보이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별 말 붙이지 않고 가만히 밤하늘을 보았다. 흘긋 내다본 권순영은 그 까만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권순영은 마치 아주 멀리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것만 같아서, 김민규는 그런 그를 자신의 옆에 불러오고 싶은 마음으로 먼저 입을 떼었다.
형. 형이 사는 별은, 여기서 보면 어디쯤에 있어? 많이 멀어?
그러면 권순영은 또 빤히 하늘을 보다가 어느 까만 구석을 가리킬 뿐이었다. 아마 저기쯤. 많이 멀더라. 우주선 타고 오는데 얼마나 한참을 걸렸는지 몰라. 그러면 김민규는 권순영의 손가락 끝을 따라 그 컴컴한 너머를 내다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날이 흐려서 그런 걸까. 아니면 권순영이 가야하는 그 곳이 정말 아주 까마득히 멀기 때문일까. 김민규는 그게 어쩐지 후자일 것만 같아서 또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게. 잘 안 보이는 거 보니까 되게 먼가보다. 형 가는 길에 심심하겠다.
몇 마디 더 주고 받은 말들은 다 그런 식이었다. 형 멀미할지도 모르니까 멀미약도 챙기고. 가는 길에 밥 거르지 말고. 기왕 돌아가는 김에 형 고향 별에 있는 컨텐츠들도 좀 야무지게 즐기고 그래. 형이 형 입으로 그랬잖아. 형 도파민 찾아서 왔다며. 그렇게 말하면 권순영도 따라 가벼운 잔소리로 대꾸했다. 너야말로 나 없다고 춤 연습 대충하지 말고. 닭가슴살 맛 없다고 식단 실패하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하고 관리도 좀 하고 그러구 살아. 너 자기애 넘치는 거 다 아니까 그거 좋은 쪽으로 쓰라구. 그런 식으로 서로 늘어놓는 말의 본질을 김민규도 권순영도 모르지는 않았다. 적어도 김민규에게 그것은 아주 빙빙 돌아가는 걱정과 같은 것이었다. 김민규는 떠나야만 하는 사람을 붙잡는 미련한 짓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으니까. 권순영이 홀로 남겨질 자신을 걱정하여 전전긍긍했듯이, 김민규 역시도 홀로 먼 길을 떠나야 할 권순영에게 자신 몫의 걱정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김민규는 그래서 부러 씩씩하게 허튼 농담들이나 늘어 놓았다. 권순영이 가장 처음 제게 자신이 외계인임을 고백하던 그 날, 권순영 역시도 별 이상한 말들을 가득 깔아두었던 것이 어쩐지 생각이 났다. 형도 그런 마음일까. 김민규는 그렇게 넘겨짚으며 가만 말을 뱉어내었다.
형.
다시 올 거지?
그리고 김민규가 문득 그렇게 꺼낸 말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 실수다. 이건 분명 멀리 가는 권순영의 어깨에 무거운 짐 하나를 올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해돋이를 볼 때의 권순영은 그래서 그런 표정으로 자꾸만 말꼬리를 늘렸던 걸까. 김민규는 황급히 말을 고쳤다. 아니, 아니야. 그거보다도...
올 수 있으면, 와 줄 거지?
...오고 싶을 거지? 다시 여기로.
김민규는 꺼먼 밤하늘에서 눈을 떼서 다시 권순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읽었는지, 권순영도 천천히 하늘에서 눈을 떼 김민규와 시선을 얽었다. 권순영은 무어라 더 덧붙이지 않고 그냥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렇게 말하며 김민규는 권순영의 손을 조금 더 힘 주어 단단히 쥐었다. 권순영의 몸이 아주 약하게 떨리고 있음을 김민규는 그제야 알았다.
민규야.
잠깐 눈 감아봐.
빨리. 나 할 말 있어서 그래. 그래서 김민규는 그 말에 순순히 눈을 감았다. 손바닥에 쥐여진 권순영의 체온이 뜨뜻미지근하니 희미하게만 느껴졌다. 민규야, 있지. 내가... 진짜 많이 고마워. 무슨 뜻인지 알지. 나도 내가 너한테 엄청 멋대로 군 거 나도 알아. 근데 사실 그냥 미안해서 그랬어. 나는 가야하잖아. 어쩌다 네가 나한테, 아니면 내가 너한테 정을 붙여버리면 어떡해. 그러면 너무 슬퍼지잖아.
근데 너는 자꾸 나보고 아니라고 했어.
안 슬프다고 그러고, 지우지 말라 그러고. 기꺼이 네가 부표가 되겠다고. 매번 그런 말만 하잖아.
그래서, 그래서...
...미안해. 한참 뒤에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 목소리는 아주 멀리 있는 기분이었다. 척 가라앉아서, 정말로 저 우주 너머에 까마득히 존재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권순영이 뱉는 단어 하나 하나 사이의 간격이 길었다. 민규야. 김민규. 권순영은 그렇게 또 곱씹듯 제 이름을 불렀다. 그 뒤로 무슨 말들을 삼키고 있는 걸까. 그것까지 김민규는 이제 알 수 없다. 김민규가 권순영에게 지금의 모든 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로.
김민규는 어렴풋 해가 뜨던 그 날, 권순영이 하던 그 말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나는 태양이고 자신은 별이라던 그 말을. 권순영은 언제나 빛을 쏘아올릴 거라던 바로 그 문장을. 다만 내가 태양이라, 결국 볼 수 없게 될 거란 그 단어의 나열들을. 김민규는 사실 아주 오래도록 곱씹었다.
당연히 김민규라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김민규는 오늘 내내 권순영을 의연하게 보내기 위한 연습을 해왔다. 자신이 붙잡아도 소용이 없을 걸 알아서, 또 그래야 권순영이 너무 슬프지 않게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다시 말해, 그게 김민규가 권순영을 생각하는 방법이란 거였다. 김민규는 분명 권순영의 공백을 아주아주 오래 뼈저리게 느낄 터였다. 이 세상에 홀로 나동그라진 채, 그 모든 빈 칸을 홀로 짊어진 채로. 그렇지만 김민규는 또 스스로의 천성이 진득하고 순하단 걸 알았다. 그래서 아마, 김민규는 제가 그걸 나쁘지 않게 끌어 안고서 권순영을 기다릴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순영아. 안 보이면 뭐 어떤데. 너는 계속 빛을 나에게 보낼 거라며. 그럼 됐잖아. 그거면 됐지, 뭐가 또 중요해? 내가 단물만 쏙 골라 먹고 말 그런 얌체로 보이냐고. 나는 형도 알다싶이 아주 욕심쟁이라, 그리고 그 욕심에 걸맞게 덩치도 형보다 한 뼘은 더 높이 커서. 난 기억할 수 있고 껴안을 수 있는 건 전부 품에 넣어보려고. 전부 꽉 끌어안고서, 그냥 천천히 다독여보려고.
권순영은 한참 말을 잇지 않았다. 김민규는 그래서 이게 정말로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임을 본능적으로 자각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김민규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나지막히 말했다. 떠나는 이를 아주 붙잡지 않으면서도, 그의 행운과 안녕과 행복을 감히 욕심낼 수 있는 짧은 말들을.
순영아.
잘 가.
권순영은 숨을 삼켰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김민규의 마지막 통신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안녕
...안녕, 민규야
안녕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김민규는 옆이 텅 비어버리는 감각에 이윽고 눈을 떴고, 그렇게 눈을 떴을 때에는 너무나 당연히 권순영은 남아있지 않았다. 김민규는 가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 희미한 너머 어딘가에 이제 권순영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했다.
김민규는 오래도록 쥐고 있어 이제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천천히 폈다. 온통 땀에 젖은 그 사이로, 어쩐지 작은 별조각 하나가 남아 있었다. 김민규는 이게 권순영이 제게 전력으로 남겨준 마지막 흔적일 것임을 직감했다. 그건 김민규의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그리고 아주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김민규는 그 별조각을 가만 주머니에 밀어넣었다. 둘이 함께였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이소에라도 들러 작은 유리병을 하나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권순영에게 선물한 장미꽃을 예쁘게 말릴 예정이었으니, 아마 작아진 그 꽃들은 그 유리병에 딱 알맞게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꽃들이 가득할 그 병안에 이걸 넣은 채, 천이백삼십오페이지 짜리 두꺼운 책 한 권과 함께 제 가방에 아주 오래도록 그것들을 들고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김민규는, 홀로 남은 김민규는. 한참 엉덩이를 붙이고 있어 뜨끈해진 바닥에서 아주 천천히 엉덩이를 떼었다. 바닥은 딱 한 명 분의 크기 만큼 따뜻해져 있었다. 김민규는 그거 말한대로 앞으로 좀 더 열심히 스스로를 관리해볼 생각이었다. 언젠가 권순영이 돌아올 때 자신이 너무 한참 늙어있어 버리면 잔뜩 놀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권순영의 취향은 아니지만 아무튼 잘생기기는 했다는 그 얼굴을 어떻게 좀 오래 잘 유지해볼까 싶었다.
그리고, 돌아가게 되면 이지훈을 졸라 노래를 쓰는 법을 좀 배워볼까 싶기도 했다. 종종 가사를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권순영은 가사보다는 가락에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일렁이면서도 종잡을 수 없고, 그래도 결국 돌아보면 모든 걸음걸음이 예술이 된다는 게. 그게 권순영을 참 닮았기 때문이었다. 춤도 더 열심히 추어야겠다. 권순영을 따라잡으려면 아마 한참 멀겠지만, 그래도. 김치로 하는 요리들을 좀 더 알아봐야겠다. 좋아하는 동물 목록에 은근슬쩍 호랑이를 끼워넣기 시작해야겠다. 김민규는 그렇게 자신만 기억하는 권순영의 흔적을 세상에 조금 더 늘려볼까 싶었다. 아마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젠가 권순영이 돌아올 그 날에.
권순영이라면 분명 제가 새겨둔 그 모든 자욱들을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같이 시간을 떠올려줄 걸 아니까.
아, 그래서 김민규에게는 해야할 일이 참 많이 남아 있었다. 김민규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아마 어렵지 않을 것이다. 숨쉬듯 자연스럽게, 원래 그리 하기로 결심한 것마냥 대단한 결심 없이도 그 일들이 행해질 것이다.
가끔은 또 쓰리고 울겠지만, 그보다 더 많이 웃기도 할 것이다.
내가 너를 곱씹는 것은 그리하여 그렇게 많이 아프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려고 한다.
순영아.
너는 알까.
결국 너는 나에게,
영원히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