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뙤약볕이 자비 없이 내리쬐는 여름, 서늘한 에어컨 바람 가득한 카페 안, 맞은편에서 느릿하게 녹아가는 주인 없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바라보며 김민규는 생각했다. 몇 시간째 2인 자리에서 커피 두 잔 시켜놓고 죽창 앉아있는 제 모습이 어쩐지 비참했다. 바로 앞자리에서 서로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케이크를 떠먹여주는 커플을 바라보고 있자니 더욱더 그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떠 있는 얼음은 벌써 그 형체를 잃은 지가 오랜데, 그 주인 되시는 권순영 씨는 어째 도착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이젠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한참 전에 보낸 카카오톡 메시지는 감감무소식이었고, 몇 분 전에 보낸 인스타 디엠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전화를 받으리라는 기대는 이미 버린 지 오래였다. 단전에서 끓어오르는 분이라도 삭혀보려 와그작거리며 얼음을 씹어댔지만, 알싸하게 찾아오는 두통에 그것도 얼마 안 가 그만두고야 말았다.
바글거리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한산해지고, 매대에 있던 빵은 하나둘씩 팔려 나가 검은색 매진 스티커를 붙인지 오래, 자극적이기 그지없는 인스타 피드를 훑으며 현타를 억누르는 것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아니, 오히려 휘황찬란한 남의 사진 보고 있으면 배알이 꼴려 견딜 수가 없었다. 연애 관련이라면 더더욱이나. 진짜 딱 5분만 더 기다리고 이 호구 같은 짓거리도 관둬야지, 하고 마음먹던 그 순간,
띠롱-
[너 지금 아직도 기다려?]
내가 지금 뭘 본거지, 김민규는 어이가 없어서 몇 번이고 문자를 다시 읽었다. '너'부터 물음표까지, 다섯 번 정도 왕복한 끝에 김민규는 결론을 내렸다. 이 형이 기어이 미쳤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저한테 이런 문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몇 시간째 이러고 있는지,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지 뻔히 알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마른 세수가 절로 나왔다. 냅다 전화부터 하려다 말이 곱게 나가진 않을 것 같아 관두고, 숨 한 번 들이쉬고서 얌전히 문자나 보냈다. 열이 머리끝까지 뻗친 채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형 너 지금 어디야?]
[스튜디오에서 방금 나왔어]
[근처에서 기다려]
김민규는 더 이상 '아이스'라고 부를 수 없게 된 아메리카노 한 잔이 그대로 자리한 트레이와 함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즉에 가버릴걸, 하는 뒤늦은 후회화 함께.
스튜디오 어귀에 다다르자 불 꺼진 스튜디오 앞에서 아침에 입고 나갔던 모습 그대로 서있는 권순영이 보였다. 땀에 젖은 머리칼은 아직 덜 마른 건지 조금 축축해 보였다. 오늘도 늦게까지 작업한 건가. 한 사람을 이 정도로 오래 보다 보면, 굳이 말하기 전에 눈에 훤히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채 갈아입지도 못한 옷가지가 담겨있을 종이가방이라든지, 그렇게나 애지중지해서 한 달에 한두 번 신을까 말까 한 컨버스를 대충 구겨신은 모습이라던가, 구겨지는 건 생각할 겨를도 없이 대충 들고나온 겉옷 같은 것들 말이다. 여간 급하게 나온 것이 아님을 짐작하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이다.
..민ㄱ,
형, 오늘 형이 먼저 만나자고 한 건 기억해? 내가 몇 시간째 그 카페에 앉아있었는지는 알아?
급하게 일이 생겨서... 나는 네가 당연히 먼저 갈 줄 알았지.
그럼 내 전화도 안 받고 문자도 다 씹은 건 뭔데?
폰 깨져서 지금 죄다 먹통이야.
제가 잘못한 건 아는 듯 액정이 산산조각 난 스마트폰을 들어 보이고서 고분고분 대답하던 권순영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입술을 달싹대다,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짜증스레 며칠 전 검게 덮어 버린 머리를 쓸어넘겼다.
야, 너는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냐?
나왔다, 권순영 화났을 때 안 나오면 섭할, 존나 꼬나보는 눈빛. 오늘따라 더더욱이나 형형해 보이는 게, 평소의 김민규라면 흠칫 쫄아 먼저 꼬리말고 한발 양보할 법도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이쪽도 물러날 의지가 전무한 터라.
뭐? 안 하던 짓? 그게 지금 네가 할 말이야?
그래, 안 하던 짓. 너 지난주에 나 기다리겠다면서 갑자기 약속 있다면서 너 혼자 놀러 갔잖아. 내가 말 안 해도 혼자서 잘 가길래 오늘도 갈 줄 알았다. 됐냐?
그때는 내가 약속 있는 거 까먹었다고 몇 번을 말해. 그 얘기 안 꺼내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거뿐인 줄 알아? 저번에... 하, 아니다.
아니긴 뭘 아니야, 너 또 어영부영 넘어가려 그러지.
그럼 뭐 멱살 잡고 싸울까?
말 참 예쁘게 한다, 너
니 말은 어디 예쁜 줄 아냐?
의미 없는 소모전에 슬슬 진절머리 나는 건 김민규나 권순영이나 매한가지였고, 결국 먼저 참지 못한 권순영이-
형 진짜,
야 이럴 거면 그만하자 우리
뭐?
목소리가 볼썽사납게 튄 것이, 퍽 당황스러운 듯싶다. 그도 그럴 것이,
그만하자고.
네가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기나 해?
그래, 진심이야. 어차피 오늘 만나자고 했던 것도 이거 말하려고 그랬던 거야.
진심으로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김민규, 네가 제일 잘 알면서 왜 그래. 나 후회할 거였으면 말도 안 꺼냈어.
..그래 그럼, 잘 됐네. 형 혼자 한 번 잘 먹고 잘 살아보던가.
몇 년 간의 연애를 단 몇 분 만에 쫑낸 권순영이 아니라 제가 먼저 발자국을 돌린다는 사실에 못내 억울해하면서도, 여태껏 사귀어 온 4년, 친구로 지내온 3년, 도합 7년 중에 그 순간만큼 권순영이 꼴도 보기 싫어진 적은 없어서 김민규는 냅다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다.
알코올과 웃음소리와 고기 굽는 냄새로 가득 절여진 불빛 가득한 거리를 지나 집으로 향하는 중에는 저도 모르게 코가 찡해졌다. 먹지도 못하는 술, 꼴에 자존심은 있다고 안 빼고 마시는 바람에 잔뜩 취해 염병 천병 진상 부리는 권순영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매번 술자리 다 끝나고 인사불성 된 걸 업어서 집까지 고이 바래다준 게 누구였는데, 동네 슈퍼 마트를 지나면서도, 문 닫은 카페를 지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면 중증 아닌가 싶으면서도, 살 부대끼며 함께한 몇 년의 세월을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거였다. 하여간 일 다 끝난 뒤에야 뼈저리게 후회하는 게 인간이란 동물이라고, 암만 2m 조금 안되는 키에, 어디 내놔도 기죽지는 않는 상판대기를 가졌대도 김민규도 결국 70억 인류 중 하나라서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헤어졌다고? 진짜? 이렇게 끝이야?'
암만 소홀했다지만, 몇 년 동안 볼 꼴 못 볼 꼴 다 봐가면서, 깨졌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붙어먹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이어져온 연애가 이렇게 단박에 막을 내렸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몇 년 만에 들은 오랜만의 이별 통보에 사고 회로가 제구실을 못하는 것에 가까웠다. (덧붙이자면, 이 둘은 한때 캠퍼스에서 소문이 자자한 깨붙커플로 한 이름 날렸더랬다) 어쩐지 저 혼자 아직도 권순영을 잊지 못하는 양 구는 것 같아서 괜스레 짜증도 났다. 어디서 봤더라, 헤어지고 우울한 건 평소 들어오던 도파민 양이 확 줄어서 그런 거라던데.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꼴값 떠는 건 추운 날 몸이 움츠러들고, 더운 날 땀이 나는 것과 같은 아주 인간적이고도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추욱 늘어진 다리를 이끌고서 집 바로 근처, 빌라들이 즐비한 골목가에 접어들었을 무렵 출처 모를 객기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그러니까, 내가 분해서라도 이대로는 집에 못 들어가겠다는 별 그지같은 오기 말이다. 불과 몇 분 전에 전남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버린 권모 씨가 술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술약에는 좀처럼 나가지 않는 객원 멤버가 된지도, 술 자체를 입에 댄 지도 꽤나 오래되었는데, 오늘은 입에 깡소주를 털어 넣지 않고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생각이 떠올랐으니 남은 건 YES or NO, 선택지는 두 가지밖에 없다. 아니, 정정하겠다. 권순영의 폭탄선언에 뒤통수 처맞고 제대로 맛이 가버린 김민규에게 남은 건 YES or YES였다.
[술마시자]
[니가 웬일?]
[참석만 해도 되는 거지?]
[형 나 작업있는데]
[한솔아 너 마감 한참 남은거 다 알아]
[Ok]
막창집에 자리를 잡고 앉은지 몇 분 되지 않아 사람이 슬금슬금 모였다. 제일 먼저 온 사람은 누가 술고래 아니랄까 봐 사장님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며 자연스레 착석한 최승철이었고, 그 뒤로는 전원우 최한솔이 쥐 죽은 듯 들어와 조용하게 자리를 채웠다. 혼자서 먼저 술 까고 있는 김민규를 본 최승철이 살다 살다 저런 궁상은 다 본다며 감탄하는 것도 잠시, 늘상 있던 일이라는 듯 집게를 집어 들고 막창을 굽기 시작했다.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김민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불렀는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는 대신 무의미한 저작운동을 반복하다, 울분을 삼키고 술잔을 내려놓은 김민규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에 모두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일순 폭탄 발언의 당사자를 바라보았다.
나 헤어졌다.
뭐? 순영이랑??
오
Oh wow
최승철, 그러니까 권순영과 김민규의 만남의 시초를 제공한, 둘 다 별 되도않는 삽질하는 동안 사랑의 큐피트, 살아있는 오작교 역할을 착실히 수행해 준, 이 염병 첨병 깨붙커플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함께한 당사자로서, 그는 스스로 자신이 이 일방적 통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깨붙커플이라 명명한 이유는 사귄 지 2년, 아니 1년도 안 돼서 깨지고 붙어먹은 횟수가 열 손가락을 넘어갔기 때문이었으며, 3년 차쯤에 접어들어서는 확연히 싸우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4년 차에는 싸울 기미도 안 보이길래 저러다 진짜 결혼까지 골인하는 거 아닌가 생각까지 했건만, 이렇게 이별 통보를 받을 줄은 상상이나 했던가. 아니, 그러면 얌전했던 게 다 권태기라도 된다는 거야?
야, 들어나 보자. 이번에는 뭐 때문에 깨졌는데?
이게 다 권순영 때문이야...
그래, 어련히 그러시겠죠.
이 새끼들은 어째 해가 지나도 래파토리가 변하질 않는담. 4년 전, 사귀고 나서 처음으로 싸웠을 때, 냅다 최승철을 찾아온 김민규의 첫마디가 그랬다. 이게 다 권순영 때문이라고. 그래서 최승철은 진짜 권순영이 개지랄 떨어서 얘가 이러는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술 몇 병 맥이고, 적당히 등 토닥여주고 고이 집에 돌려보냈을 텐데, 얼라리요, 이제는 권순영이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잘 먹지도 못하는데 혼자서 궁상맞게 술 처먹던 권순영을, 과 후배였던 이찬이 발견하여 최승철에게 sos친 거였지만. 그때 권순영이 눈물 콧물에 팅팅 불어 터진 채 탁자에 엎어져 죄 뭉개지는 발음으로 중얼거리던걸 최승철은 똑똑히 기억한다. '이게 다 김민규 때문이야.' 이제서야 말하는 거지만, 최승철은 그 때 깨달았어야 했다고 말한다. 앞으로 반십년 가량을 후배들 사랑싸움에 시달릴 제 미래를 말이다. 가엾은 최승철의 사정과는 관계없이, 권순영과 김민규는 뒤지게 싸우고, 깨지고, 다시 재결합하는 걸 반복했다. 그 와중에 권순영은 이게 다 김민규 때문이라고 질질 짜고, 김민규는 이게 다 권순영 때문이라고 질질 짜고. -매번 토로하는 대상이 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은 최승철이었다- 좀 얌전해지면 뭐라도 달라지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영 그른 것 같다.
존나 지랄이야....권순영....
어어어 저 봐라, 저러면 좀 위험한데. 1년 정도 쉬긴 했지만, 몇 년 내도록 커플 뒤치다꺼리 해온 짬빠 어디 안 간다고, 최승철, -조금 늦긴 했지만- 최한솔과, 전원우도 뇌에서 보내오는 위험 신호를 감지했다. 김민규가 취하면, 정확히는 실연의 아픔으로 취하면, 장정 셋이 들러붙어도 감당하기 힘든 개지랄, 아니 개진상이란 개진상은 다 부린다는 사실을. 최승철은 그제서야 김민규의 주장에 격한 동의를 표한다. 이건 다 권순영 때문이다. 권순영이 개지랄해서 김민규가 지금 이렇게 해롱해롱 정신 못 차리는 거고, 그래서 앞뒤 생각 안 하고 몇 개월간 술이랑 거리 두기하고 지내온 몸에 냅다 술 들이부으니까 이 꼴 난 거고, 종국에는 지금 내가 팔자에도 없는 고생을 하는 것이다. 최승철은 느지막이 올라오는 살인 충동을 꾸욱 눌러 참으며 술에 잔뜩 절여진 김민규를 일으켜 세웠다.
-
아이고 머리야
까치집을 달고 부스스 일어난 김민규는 일어나자마자 휴대폰부터 찾았다. 여기서 '일어나자마자'는 물리적으로 몸이 누워있다가 일어난 것을 의미했다. 엄연히 잠에서 깨어난 지는 꽤나 시간이 지난 뒤였고, 숙취에 잔뜩 절어 깨질 것 같은 머리에 끙끙대다가 이제 막 일어난 참이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최승철에게서 온 카톡이 가장 상단부에 위치해 있었다. 새벽녘, 자취방 침대에다 아무렇게나 내팽겨진 김민규를 적나라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이 전부였지만 김민규는 익숙한 듯 고맙다는 인사말에 나중에 한 턱 쏘겠다는 말을 덧붙인다. 당장 급한 연락도 다 했겠다, 슬슬 일어나 아침밥을 챙겨 먹으려던 찰나, 손끝에 무언가가 데었다. 둘둘 말려진 이불자락도, 제자리에서 벗어난 베개도 아니라, 절대로 여기 있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이게 뭐야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김민규는 두 눈을 비벼댔다. 바로 어제 헤어진 따끈따끈한 엑스 보이프렌드가 떡하니 침대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 김민규는 차마 믿고 싶지 않지만, 나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상태이고, 내 옆자리에 누운 모습을 꿈꿀 정도로 권순영에 대한 미련이 커서 이런 상황이 펼쳐졌나 하는 생각까지 해봤더랬다. 단 하나 다른 점이 있다면, 분명 어제 봤던 권순영은 새까만 흑발이었는데, 지금 내 옆에 있는 권순영은 분명 탈색 두서너 번은 했을 법한 백발머리라는 점이었다.
저기, 저기요..?
'그' 쫄보 김민규가 대체 어디서 용기가 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김민규는 불안감, 무서움, 긴장감, 기타 등등으로 잔뜩 떨리는 손가락으로 호기롭게(?) 옆에 누워있는 전남친의 어깨를 두드렸다. 권순영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잠꼬대 비스무리한걸 웅얼거리며 두어 번 뒤척거리다가, 저 멀리 내팽개쳐진 이불을 다시 끌어모아 제 팔 한가득 안았다. 이때쯤 슬슬 현실감각이 돌아온 김민규는, 권순영이 저를 보란 듯이 뻥 차 놓고 어제 일은 나 몰라라 천하태평하게 자기네 집 침대 중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침내 상기했고, 아까와는 다르게 불청객을 깨우듯-사실 김민규 입장에서 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사뭇 불친절한 손길로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새하얀 백발의 권순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켜... 눈앞에 있는 김민규를 인식하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렸다.
김민규, 네가 왜 여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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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진짜... 진짜로 형이야?
권순영은 슬슬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시발 대체 어쩌다 이런-개거지같은- 일이 나에게. 아침에 눈을 떠봤더니 옆에 있어선 안될 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것도 존나 크고 존나 험한 거. 답은 바로 저가 어젯밤에 뻥하고 차버린 권순영의 엑스-보이프렌드, 정확히는 그의 등짝 되시겠다. 등짝 보고 사람 어떻게 아냐고? 저걸 어떻게 몰라, 내가 저걸 얼마나 긁어봤는데. 상대방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제 막 자고 일어난 권순영에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과도 같은 일이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쟤가 대체 왜 침대에? 그야 그럴 것이, 같은 침대에 누워있을 이유가 없었다. 분명 확실하게 이별을 통보했고, 쟤는 나를 두고 먼저 떠났을 텐데 술 먹고 정신 나가서 뒹군 게 아니고서야- 다들 알다시피, 권순영은 그리 생각을 깊게 하는 위인이 아니다. 잡생각은 얼른 때려치우고 행동으로 옮기면 모를까. 암만 복잡해 보여도 부딪히고 보자, 행동 패턴 따윈 없어 보이는 권순영의 유일무이한 규칙이었다. 그래서 권순영은 이번에도 자리를 뜨기보다, 제 옆에 누워있는 덩치를 흔들어 깨우기를 택했다. 그리자 그 덩치는 잠에 취해 두어 마디 웅얼거리다가, 일어나서 권순영의 얼굴을 마주했고, 그다음에 벌어진 것이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인 것이다.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을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망울에 권순영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제도 아니고, 그저께도 아니고, 당장 어제 헤어지자는 말에 알겠다며 뒤도 안 돌아보고 간 전남친이 제 침대에서 당당히 일어나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앞에서 울먹이는, 이 어이없는 상황을 목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쳤냐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까닭은, 그저 눈앞에 있는 그가 '내가 알던 김민규'가 아니라는 직감일 뿐이었다. 일어나면 욕부터 튀어나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눈을 마주치자마자 말이 되기 직전의 육두문자는 그만 다시 목구멍으로 들어가고야 말았다. 덩치며 키, 이목구비, 말투 하나하나까지, 김민규가 아니라는 것이 더더욱 믿기지 않을 정도였지만, 주변에서 욕이란 욕은 다 처먹으면서 붙어먹던 수 년의 시간을 걸고서, 권순영은 맹세코 확신할 수 있었다. 아, '얘'는 내가 아는 김민규가 아니구나.
너 누구야?
무, 무슨... 형, 나 기억 안 나? 나 민규잖아, 김민규!
저 얼굴로 저렇게 말하는 건 반칙 아닌가, 저 앞에서 눈물 보인 것도 꽤나 오랜만 같은데, 어쩐지 연애 초반의 김민규를 보는 듯했다. 그땐 좀 귀여운 맛이라도 있었는데. 이 난감하디 난감한 상황 앞에서 쓸데없이 과거 회상에 잠기는 까닭은, 이렇게 해서라도 잠시나마 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함이었으며, 자꾸만 저 얼굴이 내가 아는 김민규랑 겹쳐ㅠ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권순영은 지금 이 어이없는 상황을 맞이한 장본인이고, '김민규'와 연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이 사태를 수습할 책임이 있었다.
..적어도 그쪽이 아는 '권순영'은 아닐걸.
그게 무슨 소리야 형, 알아듣게 좀 말해.
내가 아는 김민규는, 어제 나한테 헤어지자는 말 듣고 뒤도 안 돌아보고 간 사람이야.
아니야, 형, 그럴 리가....
민규야, 부정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일은 없거든. 그러니까 빨리 정신-
제발, 형, 그런 말 하지 마, 어? 무섭게 왜 그래
싫다, 김민규가 너무 싫다, 이래서 김민규가 싫었다. 칭얼거리면서 안겨오는 애새끼 김민규가, 산더미만 한 제 덩치는 생각 못 하고 몸 부대껴 오는 개새끼 김민규가. 울고싶은건 저인데, 한 살 어리다는 나이를 핑계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핑계로 눈물 또록또록 흘리는 김민규가 죽도록 싫었다. 내가 아는 김민규가 아님을 알고 있는데, 분명 다른 사람임을 인지하고 있는데, 자꾸만 권순영이 아는 김민규로 겹쳐 보여 미칠 지경이었다. 얘가 하는 말이, 자꾸만 김민규가 저를 붙잡고 매달리는 걸로 들려서, 옴싹달싹할 수 없는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처럼 느껴져서, 코끝이 알싸했다. 격하게 들이치는 감정을 애써 참아보려 꽉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번에도 어김없이 안간힘을 쓰며 부여잡던 인내심을 끝끝내 놓쳐버리고 그만,
민규야, 너는 울면 다야? 응? 대답해 봐, 울면 다냐고. 너는 그냥 눈물 맺히면 맺히는 대로 울고 나한테 하소연하면 끝이지? 안 그래?
....
왜 말을 못 해 김민규, 내가 물었잖아. 너한테는 그게 그렇게 쉬운 거냐고.
맘속 깊이 응어리져있던 마음이, 둑 터지듯 밀려와 쏟아졌다. 밀려 차오르는 감정은 차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까지 불어나 있었다. 입 밖으로 내뱉으면 어느 정도 풀릴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답답했다. 갑작스레 쏟아진 감정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김민규와 눈이 마주치자 실수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남에게 분풀이했다는 죄책감, 이제야 말했다는 후련함, 이때 동안의 서러움 같은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듯했다.
내,내가 미안해, 잘못했어, 어? 그러니까 형 울지 마
눈앞의 김민규가 어쩔 줄 몰라 하며 권순영에게 수건을 건넬 때, 그제서야 권순영은 자기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기도 눈물 그렁그렁 달고 있는 주제에, 큰 덩치 허둥대며 달래려 드는 꼴이 우스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배속에서 울렁대던 감정들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이미 밑천 다 보여준 주제에 내세울게 뭐가 있다고, 권순영은 그냥 말하기로 했다. 자존심도 경계심도 그 어느 것도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진심을. 어쩌면 김민규한테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일 수도, 그렇지만 하지 못했던 말일 수도 있는 그 한마디를.
민규야 나 너무 힘들어.
그리고서 본인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재수하고 겨우 턱걸이로 들어간 대학교, 아는 형의 압력으로 반강제 입부하게 된 동아리, 그곳에서 처음 만난 김민규와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마주칠 일도 별로 없었고, 얼굴이나 이름만 겨우 아는 그저 그런 동기일 뿐이었는데, 겹지인에 의해 일행으로 만나 1시간도 안 돼서 말 까고 친해졌던 이야기를. 우습게도 오랜만에 잘 맞는 사람을 만났다는 환상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을. 무지갯빛 환상은 온데간데없고 머리채 쥐어뜯으며 이새끼 저새끼 하는 사이로 변질되는 데에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까지도. 그렇게 한동안 캠퍼스에서 지옥 같은 관계성을 뽐내며 살아가다가, 한 3년쯤 지났을 때 알코올에 의한 엄청난 지각변동-종강 기념으로 자취방에서 서로 한 모금씩 하다가 거나하게 취해서 입술까지 부비고 말았다는-을 겪었다는 사실을.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는 교훈 아닌 교훈을 곁들여서.
결국에는 그냥 사귀는 게 편하겠다 싶었고, 서로 누가 먼저 고백하니 자존심 싸움하다 보니 얼렁뚱땅 1일이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을 때, 김민규는 어느새 권순영의 연애사에 푹 빠져 있었다. 사귀기까지의 과정이 평탄하지 않았으면 사귀는 동안은 좀 평탄해야 할 텐데, 불행히도 권순영과 김민규는 객관적으로 봐도 그리 잘 맞는 커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질기긴 더럽게 질겨서 금요일에 깨져서 술에 절여 살던 걸 먹태먹여 집에 고이 모셔 놨더니 월요일에 팔짱 끼고 강의실에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희대의 커퀴짓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폭풍 같았던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3년이 지나고, 그렇게 5년이 지나갔다. 물론 그 사이에 크고 작은 잡음들이 있긴 했지만, 연애 초반보다 훨씬 안정된 모습이었다는 사실은 권순영도 쉽게 동의할 수 있었다.
흔히 연애가 '밀당', 즉 밀고 당김의 연속이라고들 하던가, 둘 다 서로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밀어내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김민규와 권순영의 관계에서 '미는' 역할은 권순영이었으며 '당기는' 역할은 김민규의 몫이었다. 그렇게 많이 싸우면서도 다시금 서로에게 되돌아가는 것은, 잔뜩 날 세운 채로 신경질 부리는 권순영이 저기 멀리 달아나지 않도록 열심히 끌어당겨준 김민규의 공이 적지 않았다. 말하자면 권순영이 궤도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붙들어 맨 것은 순전히 김민규의 노력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김민규의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권순영이 궤도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으며, 결과적으로 김민규-권순영 사이 안정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수년간 안정적으로 유지되던 궤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몇 개월 전쯤부터였다. 권순영은 대형 프로젝트의 안무 총괄을 맡게 되어 한창 이리저리 불려 다닐 무렵이었고, 김민규는 새롭게 인사발령이 나 새로운 팀으로 옮겨갈 즈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므로, 소식을 처음 들었은 권순영과 김민규는 서로를 축하해 주며 한가롭게 프로젝트 마무리하고 난 뒤에 여행갈 계획이나 세우고 있었다.
본격적인 프로젝트 작업에 착수하면서, 안 그래도 바빴던 권순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연습실에서 날 새가며 연습한다고 집에 제대로 못 들어가 본 적도 수 번이었다. 김민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바쁜 것은 당연하거니와, 까다로운 상사에 다크서클 한가득한 얼굴에 한숨을 달고 사는 날도 부쩍 늘어났다. 평소 같았으면 권순영이 김민규 한 번 안아주고, 김민규가 권순영 한 번 안아주고 끝냈을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타이밍이 번번이 어긋났다. 김민규가 일찍 마친다 싶으면 권순영이 늦어졌고, 권순영이 일찍 끝난다 싶으면 김민규의 업무가 늘어났다. 모처럼 김민규의 업무가 제시간에 끝나고, 권순영의 미팅이 펑크난 날에, 둘은 몇 주 만에 기적적으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김민규는 평소처럼 권순영을 안아들며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었다. 상사는 저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고, 업무는 끝이 안 보이고, 연인 사이에 흔히 할 법한 칭얼거림이었다. 자기에게 기대고서 이제야 살겠다는 듯 숨 크게 내쉬는 김민규를 보고, 나도 힘들다고 털어놓을 자신이 권순영에게는 없었다. 그게 독이 되어 권순영을 자꾸 갉아먹었다. 평소 같았으면 웃으며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줬을 그 이야기가 숨 막히게 느껴졌다. 최승철한테도, 김민규한테도, 심지어 권순영 자기 자신에게까지. 스스로의 연애사를 이렇게 읊어본 적이 있기야 했던가. 권순영은 말하면서도 스스로에게 놀람을 금치 못했다.
잠자코 권순영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민규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권순영만 보면 눈물부터 나가고 보는 또 다른 김민규의 이야기를. 권순영과는 어렸을 때부터 막역한 사이였다고 그랬다. 옆집에서 태어나, 검붉은색 태권도 띠를 휘날리며 어둑한 골목에서 괴롭힘당하던 김민규를 지켜준 권순영을 동경했다고도. 흠씬 줘팬만큼 본인도 멍투성이가 되는 꼴을 면치 못했는데, 그래도 저가 한 살 더 많다며 마른 코피 눌어붙은 손으로 흙먼지 얼룩덜룩 묻은 제 손을 쥐어잡고서 노을 비추는 거리를 걸어가던 권순영의 뒷모습을 아직 잊지 못했다고도.
집이 가까웠기 때문에,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고등학교도 함께 나왔다고 했다. 김민규의 키가 권순영의 키를 능가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러니까 권순영 슬슬 이겨먹으려 할 때 쯤부터, -상극인 성격 어디 안 간다고- 부쩍 싸우는 횟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또 그만큼 곧잘 붙어 다녔더랬다. 어차피 오늘 싸워도, 몇 년은 더 같이 볼 인간이라서 화해한다는 선택지 밖에 없었다며 웃으며 말하는 김민규의 얼굴을 보고서 권순영은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어쨌든 그들의 우정이 변질되기 시작한 데에는 김민규의 2차 성징을 무시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부정도 해봤다가, 무시도 해보고 별 난리를 쳤지만 결국에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형만 보면 심박수가 빨라지는 까닭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까닭에 대해 별달리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지독한 짝사랑에 한창 앓을 무렵, 풀벌레 소리 가득한 한여름 밤중 권순영은 김민규를 집 앞으로 불러냈다. 나 우주비행사 할 거라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무슨 소리 하느냐며 웃어넘길 정도로 뜬금없는 이야기였지만 상대가 권순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 형이라면 진짜로 할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더위를 먹은 건지, 무더운 여름 날씨에 정신이 나가버린 건지, 갑자기 초조해졌는지 하여튼 김민규는 못 참고 권순영에게 대형 폭탄을 넘겨버렸다. 고백 공격했다는 뜻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까였다. 당황한 권순영이 구구절절 두서없이 늘어놓은 말을 요약하자면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나는 너를 친한 동생 이상으로 본 적이 없다'. 한마디로 '너 연애 상대로 본 적 없어'였다. 그다음 날 권순영도, 김민규도 어제 고백받고 고백했다는 사실이 놀라우리만치 서로 아무 일 없었다는 것처럼 굴었다.
그 뒤로 김민규가 마음을 접었는가? 하면 답은 '아니오'다. 김민규가 까였다고 맘 접을 거였다면 애초에 이 이야기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김민규는 불도저같이 들이대는 대신, 천천히 다가가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했다. 권순영이 먼저 저를 연애 상대로 인식하도록. 김민규의 이 되지도 않은 꼴값은 놀랍게도 성공적이었다. 김민규의 잘난 상판대기 덕분이 아니었다-김민규는 애초부터 권순영 취향도 아니었다-. 이 어이없는 결과의 요인은 바로 권순영의 '김여주 속성'에 있었다. 꽃보다 남자를 봐도 금잔디에 이입하고, 핫초코 먹은 뒤에 입술에 묻은 크림 닦아주는 데에 로망을 가지고 있는 권순영의 니즈를 김민규가 정확하게 공략했던 것이다. 개고생했던 김민규에게 보상이라도 내려지듯, 그다음 단계를 밟는 것은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 땅 짚고 헤엄치기였다. 두 번째 고백 공격에 권순영은 고민도 없이 승낙했고, 김민규는 비로소 풋풋한 첫사랑의 달콤한 과실을 얻을 수 있었다. 이대로 행복하게만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방심하고 있던 차에 들려온 소식은 권순영의 첫 비행이었다. 롱디를 하게 될 줄도 몰랐건만, 자그마치 지구에서 우주정거장까지라니, 퍽이나 로맨틱했다. 비행하기 전날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약속했다. 딱 3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그 사이 지구를, 우주를, 달을 눈에 담고 오겠다고. 그렇게 김민규는 권순영을 기다렸고, 3개월이 지나도록 권순영은 김민규 곁에 돌아오지 않았다. 우주에서 우주비행사가 행방불명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너무 충격적이어서 김민규는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 그리고 그런 김민규의 눈앞에, 사지 멀쩡하게 살아있는 권순영이 나타난 것이다.
그 긴 이야기가 끝이 나고, 왜 우주로 떠나려 하는 '권순영'을 붙잡지 못했냐는 질문에 김민규는 이렇게 답했다. 우주로 뛰어드는 별을 멈출 수는 없어서. 우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별의 관성이었기에 저가 붙잡을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권순영은 그렇게 말하는 김민규의 눈에서, 권순영은 눈동자 가득 들어찬 반짝임을 읽었다.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한 사람을 저렇게 반짝이게 해주는지. 나는 김민규에게 한 번이라도 저런 사람이 되었던 적이 있었던가, 하는 막연한 상념에 빠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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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관자놀이를 짓누르고 있는 권순영을 보며 김민규는 조신히 옆에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 권순영을 얼굴을 보면 당장 제 집에서 썩 꺼지라고 고함칠 작정이었건만, 마주치는 눈동자에서 어떠한 이질감을 읽은 김민규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기어들어가는 말투로 누구냐며 묻는 것뿐이었다. 질문에도 답이 없던 권순영은 느리게 제 방을 훑어보고서는 이마를 짚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저 작은 머리통에서 무슨 말이 나올 줄 몰라 김민규는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조마 조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권순영은 이런 데서 상황 판단이 빨랐다. 눈치라기보다는 어떠한 초인적인 직감, 혹은 본능에 더 가까웠다. 선천적으로 그의 천성이 그러하였고, 후천적으로 가지게 된 그의 직업이 그것을 더욱 가능케 하였다. 얼마간의 정적이 지나간 뒤에서야 권순영이 말문을 뗐다.
김민규, 너는 어떤 사람이야?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내가 아는 김민규는 네가 아닌데, 너는 누구냐는 뜻이지.
너부터 설명해. 지금 상황에서 설명이 필요한 건 네가 아니라 나야. 대뜸 침대에서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일어난 내 기분을 네가 알아?
김민규의 말에 설득된 건지, 차라리 먼저 설명하고 말겠다는 건지, 어쨌든 권순영은 한숨 길게 내쉬고서 자신이 이곳에 다다르게 된 경위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은 우주비행사였으며 첫 비행에 행방불명되었다고. 자신의 세계에서 김민규와는 소꿉친구였으며, 친한 동생이었고, 행방불명되지 전까지만 해도 서로 사귀는 사이였다고. 권순영 다운 짧고 간결한 요약이었다.
그럼 여기에서 대체 왜 나타난 건데?
글쎄, 웜홀을 통과했을 수도 있고... 웜홀은 알지?
지금 나 무시하는 거야?
알면 얘기가 빠르겠네. 난 다 이야기했어. 이제 네 차례야, 김민규.
어제 막 헤어진 일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게 껄끄러웠던 탓일까, 김민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입을 뗐다. 권순영과는 대학교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고, 3년 동안 친구로 지내다 5년을 사귀었으며 어제 막 관계의 종말이 이루어졌다고. 그다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던 주제라서 그런가, 별로 할 말도 없었고,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자연스럽게 말이 줄어들었다.
5년이면 꽤 오래 사귄 건데, 헤어진 이유가 뭔데?
남 이사, 네가 그게 왜 궁금해?
나랑은 잘만 사귀고 있는 김민규가 여기서는 왜 이렇게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궁금해서, 꺼내면 안 되는 주제였나?
몇 번 갈등하던 김민규는 그냥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었다. 권순영이랑 헤어진 이야기를 권순영에게 털어놓는다는 사실에 아이러니했지만, 상대가 권순영이라 하더라도 제 사정을 토로하고 싶었던 마음이 더 앞섰다. 이야기는 새롭게 인사발령을 받은 저와 갑작스레 대형 프로젝트를 떠맡게 된 권순영으로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새로운 사람이며 업무에 적응하는 일부터 순탄치 않았다. 동료들 사이에 성격 더럽기로 악명 높은 상사는 사회생활이며 인간관계 마스터한 걸로 한 이름 날리던 김민규도 한 수 접을 정도로 성격 한 번 괴팍한 사람이었다. 수정사항은 또 얼마나 많으며, 마감기한은 또 얼마나 짧은지, 야근과 추가 근무를 반복해가며 김민규는 실시간으로 수명이 닳아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주말에도 어김없이 연락 오는 걸 보고서는 정말 회사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울고 싶을 지경이었다. 바빠 보이는 것은 권순영도 마찬가지였다. 몇 개월 전만 해도 하루걸러 하루 만났었는데, 미팅이 펑크나야만 겨우겨우 얼굴 볼 수가 있었다. 그래서 김민규는 그동안 있던 일들을, 마음속에 쌓아놨던 일들을 그때 모조리 토해내곤 했다. 그렇게 털어놓는 것만이 김민규의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제가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언제나 웃어주던 권순영을 생각하고, 본인이 이야기하는 것보다 제 이야기 듣는 걸 좋아하던 권순영을 생각하며 그것이 서로를 위한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권순영은 말이 없어졌다. 집에만 들어오면 바로 침대에 누워 잠부터 청했고, 연습이 빡세질수록 얼굴 볼 수 있는 날은 점점 줄어들어만 갔다. 우리 사이 문제에 대해 얘기하려고, 먼저 얘기를 꺼내고자 했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대체로 얼굴을 볼 수 있는 날 자체가 희소했으며 어쩌다가 운이 좋아 얼굴을 보는 날에는 피곤과 예민에 극치를 달리는 권순영에게 도저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권순영이 괜찮더라도 제 자신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었다. 얼굴 한 번 볼 수 있는 날이 줄어들고, 대화의 공백이 길어지고, 사소한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어떤 날은 연애 초로 되돌아간 것처럼 죽일 듯이 싸우다가도, 어떤 날은 마치 남이라도 된 것처럼 어떠한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저 그런 날들이 반복되고, 김민규가 서서히 지쳐감을 느낄 무렵 권순영이 헤어지자는 말을 꺼낸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에 혼자 남겨진 김민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 이런 속 터지는 자식들을 다 봤나. 야, 김민규. 네가 권순영한테 어떠냐고 한 마디만 물어봤어도 이 사달 안 났어, 알아?
..어?
누구네는 생이별해서 다시 얼굴 한 번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니지,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부터 모르겠구나. 하여튼, 너넨 참 속도 편하다? 안 그래?
그런 게 아니라,
야 민규야, 뭘 고민해? 그냥 너 잘하는 거 해. 죽어라 매달리고 죽어라 당겨.
이미 헤어졌다고 그랬잖아.
헤어졌다고? 네가 정말 권순영이랑 갈라서고 싶었으면 지금 이러고 있겠어? 네가 더 잘 알잖아 진짜 정떨어져서 헤어진 게 아니라는 거. 단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를 모르는 거지.
....
내가 볼 땐, 너넨 생각 많이 하게 두면 안 되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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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김민규가 그렇게 싫어? 헤어지자고 할 만큼?
...잘 모르겠어
너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
다시 만나고 말고는 권순영의 결정이겠지만, 나는 잃어보니까 아깝더라. 모든 순간이. 그때 더 잘해줄걸,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보내지 말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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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하고 싶은 말은, 너는 나처럼 후회하지 말라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권순영이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고, 김민규가 온데간데없이 모습을 감추고, 김민규는, 권순영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지금 제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입력을 받고 출력을 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외투를 대충 걸쳐 입고, 스레빠를 끌어 신고, 문지방을 나섰다. 시간이 없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네가 있는 곳으로. 엇갈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만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시간이 없다. 서로를 사랑하기만 해도 시간이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