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미
전방처

 

 

 

 

 

 

" 사장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

 

" 일 똑바로 안 해? 저러다 흉 지면 권기사가 책임질 거야? 어? "

 

" 죄송합니다. "

 

" 애가 잘 따른다고 급도 안되는 애랑 좀 어울리게 해줬더니 이 사단을 만들어? "

 

" ....... "

 

 

 

 

 

한참 예민할 시기였던 중학생 권순영은 자신의 아버지가 김사장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쩔쩔 매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 꼴을 직관한 권순영은 지 속에 열불이 나는 것 같았다.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아버지를 함부로 대하는 저 인간이 죽도록 싫었다.

 

그날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 가기 전 순영이 형이 보고 싶다고 졸라대던 탓에, 잠깐이라고 약속을 한 권기사는 권순영의 학교로 향했고 앞에 차를 대자마자 뛰어나간 김민규가 철푸덕 엎어졌더란다. 다행히 긴팔, 긴바지를 입고 있던 탓에 어린 김민규의 얼굴, 팔, 다리에는 심하지 않은 생채기들이 생겼고, 그걸 본 김민규의 아버지, 즉 김사장이 권순영의 아버지, 즉 권기사에게 소위 말해 갑질을 저지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권순영은 억울하고 분했다. 모든 일의 원흉인 김민규가 미웠다. 그래서 볼에 작은 상처를 매달고 저택 대문을 박차고 나와 형아- 부르며 자신에게 뛰어오는 작은 김민규를 무시하고 뒤 돌아서 걸어갔다. 발걸음에 힘을 실으며.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신을 무시하고 멀어지는 내 사랑 순영이 형아를 본 꼬맹이 김민규는 더 우렁차게 형아를 불러 재끼며 달리다가 또 한 번 퍽 하고 엎어졌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이. 곧이어 커다란 울음소리가 저택 앞을 울렸고, 김사장은 절절 매며, 애지중지 외동아들 김민규에게로 뛰어갔다. 곧이어 자신을 향해 야 이새끼야!! 소리치는 고귀하신 김사장님의 고함 소리가 들렸을 때 권순영은 진짜 좆같다... 라는 생각을 하며 멈추어 섰다. 잠깐 멈춰 선 뒤,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갔다. 

 

권순영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그때부터 였다. 자신이 친동생 처럼 아끼던, 자신의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던 김민규가 꼴도 보기 싫어진 것이. 자수성가 하겠다고 발버둥 치던것이. 좋아하는 걸로, 잘 하는 걸로 자수성가 해서 지긋지긋한 이 꼴 그만 보겠다고 생각한 것이.

 

 

 

 

 

다행히도 권순영은 이게 되네? 싶을 정도로 진짜 그렇게 됐다. 좋아하는 춤과 노래로 밥 벌어 먹고살 수 있게 됐다. 독종 권순영은 험난한 연습생 생활을 구르고 굴러 데뷔했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그 바닥에서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대차게. 제 밥그릇 챙기는 건 고사하고 부모님 집도 사드리고 차도 사드리고, 매우 과도한 자수성가를 이뤄냈다. 무엇보다 김사장의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던 아버지가 일을 그만두고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시는 게 권순영에겐 가장 큰 행복 중 하나였다.

 

이렇게 삶의 많은 부분이 뒤바뀐 권순영에게 바뀌지 않은 골칫덩어리가 있다. 그게 김민규다. 진짜 지긋지긋하다. 그래도 머리가 클 수록 애꿎은 김민규를 미워하는 마음이 옅어진 것은 오래였으나, 바빠지고 나서는 밉든 좋든 김민규와 자연스럽게 진짜 연 끊으려고 했던 권순영을 겨우겨우 곁에 붙잡아 둔 것도 김민규였다. 권순영이 자수성가의 꿈을 가지게 된 그날에도 왜 순영이 형아한테 소리 지르고 나쁜 말 하냐고 울며불며 자기 아버지에게 솜방망이 같은 손으로 주먹질을 하던 순미새 꼬마 김민규는 강산이 변한 현재에도 순미새로 살고있다. 레벨업까지 했다. 김민규 친구들은 김민규를 김호미라고 부른다. 김민규는 호시에 미쳤다. 그러고 나선 혀를 끌끌 찬다. 짝사랑 한 번 지독하다며. 야 너 생긴대로 살아라 쫌. 안어울리는 짓 좀 하지말고.

 

 

 

난다긴다 하는 집안 자제들끼리 친한 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김민규도 난다긴다 하는 집안 자제이기에, 물 흐르듯이 그들과 친구가 되었고. 걔네랑 만난다 하면 뭐 골프치고, 바에서 비싼 술이나 마신다. 어느날은 꼴에 파티랍시고 한 명 별장에서 술 판을 벌였다. 남녀 안가리고 모여들어 술 마시고 웃고 즐기는 틈에서 김민규는 위스키잔 하나 들고 소파에 앉아서 권순영 라방을 시청중이었다. 옆에 앉아서 말을 걸어오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대충 반응만 해주고 핸드폰만 들여다 보기 바빴다. 지나가다 그걸 본 친구 한 명은 김호미 또 시작이라며 혀를 찼다. 호시인지 뭔지 좀 그만 보라고 꾸짖으며.

 

 

 

수 없이 많은 순미새들이 전 세계에 포진되어 있어도 1호 순미새는 김호미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 민규야.

 

- 헐 뭐야, 무슨 일이야 이게. 대스타 호시씨가 전화를 먼저 다 해주시고. 대단하신 투어 한다고 며칠 동안 연락 다 씹은 대스타 호시씨가!

 

- 입 안 닫으면 너네 집 안간다.

 

- 뭐??? 웬일로 우리 집에 직접 행차를 해주시지? 일본 가서 뭐 잘못 먹었나?

 

- 차 돌릴게.

 

- 아니, 아니 잠깐만. 알았어 입 닫을게.

 

- ...... 너 끝나는 대로 와. 집에서 기다릴게.

 

- 웅. 사랑해.

 

 

 

당연히 '사ㄹㅏ'까지 말하는 순간 전화는 뚝 끊겼다. 그래도 김민규는 좋다고 웃었다. 며칠 동안 대차게 씹힌 연락도 잊은 채 헤실대며 제 책상 위 컴퓨터 전원을 껐다. 곧장 짐을 챙겨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을 제 팔에 걸어 두고 가벼운 허밍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무실을 나서며 아직도 저를 보면 불편해하는 팀원들에게 밝은 목소리로 인사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인턴 주제에 아무도 일어나지 않는 6시 정각에 미련 없이 사무실을 나서는 건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법한 오그라드는 타이틀. 자그마치 '회장 손자 겸 사장 아들' 김민규 인턴의 특권이다.

 

 

 

 

 

바로 높은 자리 앉히겠다는 본인 아버지 말리고 인턴부터 하겠다고 고집 부린 게 김민규다. 활동 끝나고 집에 처박혀 있는 권순영 보러 집으로 쳐들어갔다가, 같이 재벌 나오는 드라마 보는데 권순영이 그랬었다. 와 낙하산 재수 없다. 그 한마디 듣고 자긴 인턴부터 시작해서 인정 받겠다고 아버지한테 큰소리 쳤다. 탐탁지 않아 하며 쓸데없는 짓 한다는 아버지를 애써 외면하며 인턴으로 시작하기로 결정된 날 권순영에게 전화해서 은근슬쩍 어필했다. 순영아, 나 다음 주 부터 '인턴'으로 출근한다? 인턴이란 단어에 악센트를 주었다.

 

오구오구 기특해 역시 넌 다른 금수저 놈들이랑은 다르구나! 뭐 이런 반응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권순영의 반응은 예상보다 더 간결했다. 아 그래? 축하해. 끝. 권순영에겐 인턴이고 뭐고 그냥 아버지 회사라고 대기업에 어려울 거 없이 입사한 낙하산이다. 다른 인턴처럼 정규직 전환에도 신경 쓸 필요 없는 어차피 그 회사 가지게 될 금수저. 김민규는 그냥 인턴 출근하는 사람 된 거다. 

 

그 인턴 김민규는 사람들에게 신분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소문은 금방 돌았다. 그래도 긍정 빼면 시체인 김민규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서 낙하산 소리는 듣지 말자. 라는 생각으로 씩씩하게 회사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 비싼 우리 권순영씨가 웬일이냐. 무려 집까지 행차해 주시고"

 

 

 

 

 

김민규는 웃음기가 맴도는 얼굴로 혼잣말을 하며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본인에게 닥쳐올 시련을 단 하나도 예상치 못한 채로.

 

 

 

 

 

 

 

 

 

 

 

김민규는 위버스 가입자다. 닉네임 김호미. 그 뿐만이 아니라 권순영네 그룹 멤버십도 가입했다. 22000원 내고. 멤버십에 가입하지 않으면 권순영의 인간미 넘치는 사진들과 귀여운 짓 하는 라이브를 알림이 뜨자마자 실시간으로 볼 수가 없으니까. 

 

10년 넘게 본, 번호도 있는, 지금 당장 통화해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팬들과 소통 하는 곳 까지 왜 보고 있냐고? 이유는 간단하다. 김민규 앞에선 어딘가 날 서 있고 차가운 권순영이니까. 따뜻하고 뽀송하고 귀염 떠는 권순영을 보려면 지인 김민규도 어플 깔아서 가입하고 돈 내야 된다. 인스타로는 부족하다.

 

 

 

언제 한 번은 권순영 때문에 처음 시작한 트위터에서 영통팬싸 영상을 보고 거품 문 채로 권순영한테 페이스타임 건 적도 있었다. 김민규는 권순영이 전화를 받자마자 다짜고짜, 나한테도 좀 그렇게 해봐. 팬들한테 하는 것 처럼. 한마디 했고, 그런 김민규를 향해 말없이 가운데 손가락을 날리곤 전화를 끊은 권순영이었다. 자던 중이었는지 찡그린 눈과 잔뜩 헝클어진 머리가 베개에 눌린 상태였다. 꺼진 핸드폰 화면을 빤히 노려보던 김민규란 남자는 포기하지 않는 남자지만 누울 곳을 보고 눕는 남자이기에 권순영에게 다시 전화를 걸진 않았다.

 

대신 영통팬싸 응모하는 법을 알아봤다. 앨범 뒤지게 많이 사야 된다길래 진짜 뒤지게 많이 사서 응모했고, 당연히 당첨 됐다. 시작하자마자 어느 정도 일면식 있는 권순영네 그룹 멤버들이랑 어색하게 인사하고 아 예... 잘 지내셨어요... 저는 잘 지냈죠... 네 몸 잘 챙기시구요... 예예 이런 소리나 하고 마침내 온 권순영 차례에 뾰로통한 얼굴로 등장했더니 이번엔 권순영이 뒷목잡고 쓰러지려고 했다. 권순영은 겨우 정신 부여잡고 김민규를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노려봤다. 하지만 옆 멤버 통화 속에 제 목소리가 들어갈 수도 있으니 말조심 하는 것은 아이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덕목. 입 모양으로만 (너 미쳤냐?) 한 마디 해줬다. 

 

 

 

- 아 뀨구나~ 오랜만이네? (뭐하는 짓?)

 

- 그러니까 한 번 말했을 때 들어주셨어야지.

 

- 아~ 심심했어? 되게 뭔가 할 게 없었나부다 그치. (넌 할 짓도 없냐?)  근데 혹시 거기 회사야?

 

- 응, 이 시간에 회사지 그럼 어디야.

 

- 오~ 진짜 대박이다! (미친놈)

 

- 뭐 어때 점심시간인데. 됐고, 보고싶다 순영아. 우리 언제 보냐?

 

- 어? 시간 다됐다~ 아쉬워라.

 

- 이야... 연기 잘한다? 원맨쇼 보는 것 같네 무슨.

 

- 웅 그래 그래. 고마워~

 

 

 

띠디디디 띠디디디

 

 

 

 

 

아이돌을 1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이상한 것만 늘었다. 표정은 똥 씹은 표정인데 말투는 유치원 선생님 같다. 무서울 지경이었다. 김민규는 기가 막혔다. 통화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알림음이 들리자마자 표정 딱 풀고 예쁘게 웃는 권순영 때문에 짜증까지 났다. 뭐가 좋다고 십수 년이 넘게 권순영 뒤꽁무니만 따라다니는 자신에게도 살짝 짜증이 났다. 근데 뭐 어쩔 거냐, 더 좋아하는 사람. 아니? 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야 더 좋아하는 사람이지. 그냥 혼자 좋아 죽겠는 사람이 지는 싸움이라 어쩔 수가 없다 이건.

 

 

 

이 사단이 난 것에 권순영의 지분이 지대하다고 생각하는 김민규다. 어렸을 때야 워낙 사람 좋아하는 꼬맹이 김민규가 성격 좋은 기사 아저씨의 귀엽게 생긴 아들에 꽂혀서 형아형아 하고 쫒아다닌 것 뿐이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엔 권순영이 워낙 잘 챙겨주기도 했지만. 아무튼 그냥 그렇게만 끝날 수도 있던 사이에서 다른 감정을 느끼게 한 건 권순영이란 뜻이다. 나 몰라라 하는 권순영에 대한 김민규의 억울함은 쌓여있다. 이 얘기를 하자면 날밤을 깔 수 있는 김민규지만, 우선 추리고 추려서 첫 번째는 이거다. 김민규가 권순영한테 홀라당 빠진 날

 

 

 

 

 

형...나 졸업식 날 와주면 안돼....?

 

 

 

 

 

데뷔한지 몇 년이 지난 권순영이 한창 아이돌로 자리 잡았던 상태였고, 지금보다 쌀쌀맞던 권순영에다 대고 김민규만 일방적으로 연락을 이어 나가던 시기였다. 솔직히 올 확률 낮다고 생각했지만 그냥 질러봤다. 밑져야 본전이니까. 당일날 강당 의자에 앉아 똥 마려운 강아지 안절부절못하고 마냥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김민규는 찾는 얼굴이 도저히 보이지 않자 입술을 댓 발 내밀고 단상에서 뭐라 뭐라 말을 하고 있는 교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순영이형]

 

야, 지금 주차장 쪽으로 나와. 나 너네 아버지랑 마주치기 싫어. 사람 많아지면 나 간다.

 

 

 

텍스트를 읽자마자 그 큰 눈이 더 커진 김민규는 벌떡 일어나버렸다. 멀대 같은 애가 갑자기 일어나버린 바람에 교장의 말도 잠깐 끊겼고 주위의 시선은 김민규를 향했다. 그에 개미만 한 목소리로 죄송합니다... 라고 중얼거리며 그 큰 몸을 구겨 앉은 김민규는, 잠시 뒤 상체를 숙이고 일어나 살금살금 강당 밖으로 향했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학우는 급똥인가. 생각하며 코를 후비고는 핸드폰으로 하던 게임을 이어갔다.

 

 

 

 

 

" 혀엉-! "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쉿 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그에 김민규는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달려갔다. 달려오던 김민규가 앞에 서자 냅다 꽃다발 부터 안겨주는 권순영이었다.

 

 

 

 

 

" 자, 됐지? "

 

"허엉... 감동이야... 진짜 와줬네! "

 

"네가 오라며."

 

 

 

 

 

스케줄 중간에 온 건지, 끝나고 온 건지, 가기 전에 온 건진 모르겠지만. 마스크 위로 뾱 하고 보이는 눈에 메이크업이 되어 있었다. 그런 권순영을 내려다보며 김민규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실없이 계속 웃었다.

 

 

 

 

 

" 와줘서 고마워. "

 

" 별것도 아닌데 뭐... 나 간다. "

 

 

 

 

 

김민규는 뒤돌아 서려는 권순영을 잡아 세웠다. 아까만큼은 아니지만 김민규의 입술이 뭔가 맘에 안 드는 듯 튀어나와 있었다.

 

 

 

 

 

" 아, 왜 벌써가. "

 

" 나 이제 스케줄 가야돼. "

 

" 아씨... 그럼 한 번 안아주고 가! "

 

 

 

 

 

뭔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던 권순영은 저보다 큰 김민규를 덥썩 안아버렸다. 무드 없이 퍽 안아버렸더니 눈앞에 김민규의 쇄골 즈음이 보였다. 눈을 꿈뻑꿈뻑 하다가 그 상태로 고개만 들어 올려 김민규의 눈을 마주쳤다.

 

 

 

 

 

" 이제 됐지? "

 

 

 

 

 

그때 본 김민규 표정이 뭐랄까... 좀 묘했다. 멍해 보였달까. 얼굴이 좀 붉어진 것 같기도 하고. 권순영도 사실 아직 그때 그 김민규의 표정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처음 본 표정이었기 때문에. 놀랍지 않게도 김민규는 그때 권순영이 다르게 보였다. 뭘 바른건지 통통하게 윤기나는 권순영의 입술에 자꾸 눈이 가기도 했다. 

 

 

 

 

 

" 이제 간다. "

 

" 어..어엉... "

 

 

 

 

 

그렇게 멍하게 권순영의 벤이 떠나는 걸 보다가 김민규는 정신을 차렸다. 뭐야 이거? 김민규는 그날 계속 권순영을 생각했다. 헤어지는 친구들도, 축하해주는 부모님도 관심 밖이었다. 처음엔 그냥 형 화장하고 와서 낯설어서 그런가? 아닌데 화장한 거 몇 번 봤는데, 아 오랜만에 봐서 너무 반가웠나? 이런 쓸데없는 정답 찾기 놀이를 조금 하다가.

 

 

 

[순영이형]

 

아까 축하한단 말도 못했네 ㅋㅋ

 

졸업 축하해 민규야

 

 

 

별것도 없는 권순영 메시지에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보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 이 형 좋아하나봐 미친.

 

김민규는 자신이 뜬금없이 사랑에 빠진 줄 알았으나, 그건 아니었다. 권순영이 멀어지려고 하는 게 싫어서 계속 연락하고 찾아간 것, 권순영이 데뷔하고 나서는 그럴 시간도 없는 사람한테 꼬박꼬박 연락하고 가끔 본가로 찾아올 때 마다 여전히 가끔씩 연락하고 지내는 권순영의 아버지에게 스파이 마냥 소식을 알아내 본가로 찾아가던 것 등등 가는 사람 안 붙잡는 김민규라면 하지 않을 짓들을 했었다. 스스로가 했던 일들을 복기하다 보니 새삼스레 실감이 나는 김민규 였다. 좋아한다는 걸 인식하고 인정하는 순간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김민규 또한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찌 보면 싱겁다고 느낄 수 있는 그 순간 이후로 그냥 당연하게 계속 권순영을 마음에 품고 사는 김민규였다. 딱히 부정기도 없었다. 권순영에게 고백도 해봤지만 그때마다 헛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권순영의 태도에 이제는 습관처럼 고백하고 거절 당한다. 제 아무리 긍정충 김민규여도 사람인지라, 중간중간 현타와서 다른 사람도 만나려고 해봤다. 권순영보다 잘생기고 예쁘고 착하고 귀여운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게 오기인지 뭔지 권순영이 아니면 안됐다. 그래서 김민규는 사랑에 빠진 날의 권순영을 탓 하기라도 하기로 했다. 아니 귀엽게 뭔 얼굴을 들어올려? 잘 만나주지도 않더니 졸업식 와달라 하니까 냅다 와줘 왜? 그랬으면 내가 이꼴은 안났을 거 아니야.

 

 

 

 

 

그리고 또 두 번째. 권순영은 김민규가 자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걸 안다. 심지어 권순영도 김민규한테 마음 있다. 밀어내는 척 하다가 다시 끌어당긴다. 이거 진짜 못된 거다. 김민규도 그거 다 안다. 다 알면서도 당해준다. 하지만 권순영이 자신을 밀어내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민규라 어쩔 수 없다. 다 당해줄 수 밖에. 

 

어느날은 권순영이 술에 취해 얘기를 꺼냈었다. 다 꼬인 발음으로 김민규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날의 얘기를. 그날의 얘기가 끝나고 권순영은 풀린 눈으로 겨우겨우 김민규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나 너네 아빠 진짜 싫어. 그래서 너도 싫어. 근데 나는 너 없으면 안되니까 어디 가진 말고 그냥 계속 이렇게 있어.

 

그 얘기를 듣고 김민규는 그러겠다고 했다. 진심어린 눈빛으로 너 없으면 안된다고 말하는 권순영을 보고 그럴 수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권순영도 내 마음과 아예 다른 건 아니구나. 그 정도면 김민규는 버틸 수 있다. 아예 확률이 없진 않잖아.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로 도어락을 해제한 김민규는 거실로 들어서자 소파에 늘어져 있는 은발과 금발 사이 그 어딘가의 색으로 물든 작은 머리통을 보곤 안 그래도 올라간 입꼬리를 더 끌어당겼다. 가까이 다가가자 잠들어 있는 보송보송한 얼굴이 보였다. 웃으며 그 큰 몸을 구겨 소파 앞에 쪼그려 앉은 김민규는 웃음기를 지우고는 어딘가 애틋한 표정으로 권순영의 볼을 살짝 눌러보았다. 말랑말랑 했다. 그러고 나선 숨을 죽이고 권순영을 쳐다봤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권순영은 살며시 눈을 떴다. 그가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 거리는 동안 여전히 애틋한 눈으로 권순영을 쳐다보던 김민규는 그의 눈이 세 번째로 감겼다 띄였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 누가 보면 본인 집인 줄 알겠어요. "

 

" 야, 깨우지 뭘 변태처럼 쳐다보고 있어? "

 

" 한 대 쥐어박으려다 참았는데 뭔 변태래? "

 

" 까분다. "

 

 

 

 

 

몸을 일으켜 앉은 권순영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김민규는 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고 권순영은 그걸 익숙하게 받아들었다.

 

 

 

 

 

" 땡큐. "

 

" 순영아. "

 

" 이제 형 소리는 죽어도 안 붙이는구나. "

 

" 응 순영아, 웬일로 우리 집까지 왔어? "

 

 

 

 

 

기대감에 찬 반짝 거리는 강아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김민규를 흘낏 쳐다본 권순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는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 너 결혼 생각 없어? 아님 뭐 만나는 사람이라도. "

 

" ......뭐? "

 

" 너네 아버지가 우리 아빠한테까지 연락해서 부탁하셨다는데, 내 말은 좀 들을 것 같다고. 너 인턴 그거 끝나면 슬슬 결혼 시킬 생각이신 것 같던데? "

 

" ...... "

 

" 너한테 직접 말하면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고 굳이 굳이 우리 아부지한테 까지 연락 하시는 거 보면 여전하시네. 확실히 사람 부리는 데는 일가견 있으셔. "

 

" ...... 야 순영아. "

 

" 야는 좀 그렇다? "

 

 

 

 

 

권순영이 저 예쁜 입으로 듣기 싫은 말을 떠들어 대는 걸 보던 김민규는 힘이 탁 풀렸다. 모르는 척 하는 얼굴이 미웠다. 지금까지 권순영이 미웠던 적은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지만 오늘은 특히나 미웠다.

 

 

 

 

 

" 형 너는 진짜 너무하다. "

 

" 갑자기 뭔 소리야 또."

 

" 내가 너 좋아하는 거 너 알잖아. 자기 좋아 죽는 애 면전 앞에 대고 그런 소릴 하고 싶냐? "

 

 

 

 

 

귀찮게 군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권순영의 표정은 김민규의 한 마디에 균열이 생겼다. 아주 잠깐동안 표정이 굳은 권순영은 다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김민규를 쳐다보며 뻔뻔하게 대꾸했다.

 

 

 

 

 

" 야 뀨, 알았어 알았어 결혼 생각 아직 없어 보인다고 전할게. "

 

" 딴소리 하지 말고, 진심인 거 알잖아 진작부터. "

 

" .... 장난 좀 그만 쳐라 재미 없다 이제. "

 

" 그래, 형은 내가 이러는 게 그냥 재밌지? "

 

" 야 김민ㄱ "

 

 

 

 

 

김민규는 저질러버렸다. 미운 말만 내뱉는 권순영의 입술을 본인의 입술로 막았다. 한 팔로는 권순영의 허리를 감고, 다른 한 손으로는 권순영의 뒤통수를 부드럽게 받쳤다. 권순영은 돌처럼 굳었고, 김민규는 잠깐 시간이 흐른 뒤 입술을 떼고 숨이 느껴지는 가까운 거리에서 권순영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지금 안 가면 더한 짓 할 거니까 가 "

 

" ....... "

 

" 안 가? "

 

 

 

권순영은 당황스러움과 화가 섞인 눈빛으로 김민규를 쳐다보다 그를 밀어내고 뒤 돌아서 집을 나섰다. 그런 권순영의 뒷모습만 쳐다보던 김민규는 문이 닫히고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속이 답답했다.

 

 

 

다음날, 김민규는 습관처럼 권순영에게 아침인사 메세지를 보내려다 아차 하고 핸드폰을 내려두었다. 상처 받았다. 받았지만 마음은 그대로였다. 김호미 어디 안 간다. 하지만 이번엔 데미지가 좀 컸으므로 며칠간 연락은 안 하려고 마음 먹은 김민규다. 그게 며칠이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 권순영 보고 싶다.

 

김민규가 권순영에게 연락을 안 한 지 자그마치 일주일째다. 고작 일주일 가지고 왜 저래 싶겠지만 이건 진짜 엄청난 기록이다. 군대에서도 답장이 있든 없든 매일 연락하던 김민규였는데 일주일? 장족의 발전이다.

 

퇴근 후 운전을 하던 김민규는 생각했다. 일주일이면 오래 참았다. 오늘까지만 꾹 참고 내일 연락 한 번 해봐야지.

그 순간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핸드폰에 알림이 떴다

 

 

 

 

 

[순영이♥] 사진

 

 

 

 

 

미친 거 아니야? 신호가 걸렸을 때 김민규는 손을 떨며 핸드폰을 눈 가까이 가져다 댔다. 미리보기로 뜬 그 작은 사진의 정체를 확인하겠다는 거다. 당연히 잘 안 보였다. 당장 확인하고 싶지만 얄팍한 자존심이 허락을 안 했다. 신호 세 번만 참자.

 

체감상 억겁의 시간이 지난 후, 김민규는 권순영과의 카톡 창을 조심히 눌렀다. 

 

 

 

 

 

 

 

[순영이♥]

 

사진

 

사진

 

나 아파

 

 

 

 

 

 

 

약 뭉텅이와 39도가 찍힌 체온계가 나온 사진과 링거를 맞고 있는 마른 팔을 확인한 김민규는 곧장 차를 돌려 권순영의 집으로 향했다. 

 

 

 

 

 

띡 띡 띡 띡 삐 -

 

불이 다 꺼진 넓은 거실을 지나쳐 안쪽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밍숭맹숭한 얼굴이 끙끙대며 곤히 잠들어 있었다. 살며시 이마 위에 손을 올려보니 아주 뜨끈뜨끈 했고, 바로 화장실로 가 차가운 물에 수건을 적셔온 김민규는 야무지게 수건을 착착 접어 뜨거운 이마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고는 핸드폰으로 '죽 만드는 법' 따위를 검색해보다가 권순영 집에 죽 재료가 있을 리가 없다는 판단하에 배달 어플을 켰다. '죽' 을 검색해 훑어보고 있는데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뀨야.... "

 

" 어, 나야. 권순영, 괜찮아? "

 

" 응.... 올 줄 몰랐는데.... "

 

" 어, 미워 죽겠는데도 어쩔 수 없는 권순영 따까리라 몸이 지 맘대로 핸들 돌리더라. 김민규 다룰 줄 아네. 여우야 아주?  "

 

" 나 너무 미워하지 마... "

 

" 저 봐, 저 봐. 저렇게 끼를 부려요 아주 "

 

" ...... "

 

" 네가 나한테 하는 짓들 어디 인터넷에 올리면 어장이라고 엄청 욕먹는다. 어? 내가 너 너무 좋아해서 다 참는 거야. "

 

 

 

 

 

김민규는 눈을 감고 희미하게 웃는 권순영을 쳐다보다 다정하게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권순영은 그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올린 뒤 입을 열었다.

 

 

 

 

 

" 민규야. "

 

" 엉? "

 

" 김민규 멍청아. "

 

" 아, 또 왜. 뭔데. "

 

" 나 좀 그만 좋아해 멍청아.... "

 

" 언제는 너무 미워하지 말라며. " 

 

" 아니 그거랑 그거는 다르지... "

 

" 내가 너 그만 좋아하면 너 그제서야 내 소중함 깨닫고 찔찔 울면서 나 찾아온다. "

 

 

 

 

 

그 말을 듣고 권순영이 실 없이 웃어댄 이유는 진짜 그럴 것 같은 자신이 상상돼서 였다. 나 김민규 없으면 어떻게 사냐 진짜. 그래도 김민규는 안된다. 쟤랑 만나다가 헤어지면 영영 못 보는 것도 싫고, 쟤 피붙이가 그 인간이라는 것도 싫다. 설상가상 저렇게 좋다고 시위를 해도 서로가 없으면 더 힘들 건 권순영 자신이라는 걸 알아서 웃다가 갑자기 심통이 났다. 그래서 아픈 걸 핑계로 김민규에게 찡찡거리기로 마음 먹었다.

 

 

 

 

 

" 너 나랑 만나다가 헤어지면 우리 영영 못 봐. "

 

" 안 헤어지면 되지. "

 

" 나 너네 아빠 싫어. 평생 싫어. "

 

" 나도 알아. "

 

" 그럼 안 헤어질 수가 없잖아. 너랑 나랑 만나는 거 들키기라도 해봐라. 바로 쓰러지신다. "

 

" 나 못 믿어? 우리 절대 안헤어져. "

 

" 말이 되냐 그게? "

 

" 왜 안돼? "

 

 

 

 

 

말을 말자 그냥. 너 가 이제. 권순영은 눈을 감아버렸고 김민규는 헛웃음을 지었다. 

 

 

 

 

 

" 순 지 맘대로야. 저거 진짜 뭐가 좋다고. "

 

" 다 들린다. "

 

" 들으라고 한 소리다. "

 

" 아, 가라고. "

 

 

 

 

 

뒤로 돌아 눕는 권순영을 밉지 않게 흘겨 본 김민규는 작게 중얼거렸다. 호시 인성 진짜 어떡하냐... 아무튼 너도 나한테 마음 있는 거 맞지? 그렇게 알고 있는다. 너 그거 고백이나 마찬가지야. 알아? 잠들지 않은 게 분명한 권순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누운 몸을 꼼지락 거리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