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시인의 사랑 / 진은영
습관성 김민규
똑똑, 잠든 순영의 방에 노크 소리가 났다. 순영은 듣지 못했다. 반응이 없자 살며시 문이 열렸다. 빼꼼 고개를 내민 건 민규였다. 자기 상반신만한 큰 베개까지 끌어안고 순영의 침대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누운 공간이 부쩍 좁게 느껴져서 순영은 부스스 눈을 떴다. 등에 닿은 감촉이 벽이 아니다. 불쑥 뒤로 몸을 돌리자 보이는 건 히히, 웃고 있는 김민규.
'아, 뭐야아아….'
'형, 오늘만 같이 자면 안 돼?'
잠기운이 덕지덕지 붙은 순영의 목소리가 늘어졌다. 민규는 이미 정해 놓고 말로만 부탁하듯이 그랬다. 가져 온 베개를 순영의 베개 옆으로 밀어넣었다. 베개도 등치 따라가나, 민규의 커다란 베개 때문에 순영이 베고 있던 베개는 자리를 잃고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순식간에 머리가 휑해진 순영은 팔꿈치로 민규를 밀어냈다.
'야, 비좁아. 네 방 가서 자.'
'아아아, 귀신 꿈 꿨단 말이야.'
하루마안, 순식간에 울망한 눈이 되어서 민규는 간절하게도 말했다. 참나, 순영은 헛웃음이 터졌다. 누군가 덩치값을 못 하는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들어 김민규를 보게 하라. 순영은 하는 수 없이 옆으로 비켰다. 떨어진 베개를 주우려는데 뒤로 주욱 몸이 딸려 갔다.
'침대도 좁은데 그냥 베개 하나로 같이 베자.'
민규는 끌어당긴 순영의 머리를 자신의 베개 위로 올렸다. 한 베개에 머리 두 개가 나란히 누웠다. 틱틱, 틱틱. 손목 시계의 바늘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시계 소리 진짜 잘 들린다, 무서워….'
'네가 준 거잖아.'
그치, 형 매일 하고 다니더라. 자신의 선물이 만족한스러운듯이 민규는 크크크 웃었다. 무섭다고 찡찡거리더니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도롱도롱 민규는 잠이 들었다. 목덜미에 닿는 규칙적인 날숨이 간지럽다. 배에 둘러진 손은 따뜻하다. 순영은 소리 죽여 웃었다. 실은, 민규가 자주 무서운 꿈을 꾸면 좋겠다고, 유치하게도 이기적인 생각을 해 본다. 그래서 이런 날이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 순영은 민규의 손 위로 겹쳐 잡았다. 눈을 감는다. 웃는 얼굴은 미묘하게 슬퍼진다.
하지만 너는 영영 나의 마음을 모르겠지.
*
"푸우우우…."
민규는 핸드폰을 쥐고 땅이 꺼져라 한숨 쉬었다. 순영은 그 한숨의 이유를 안다. 기다리는 연락이 오지 않으니까. 민규가 좋아하고 있는 그녀에게서. 나름 혼자 밀당 중이라고 절대로 그녀에게 답장이 오기 전까지는 한 번을 더 연락하지 않았다. 순영은 그것이 그렇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음이 있는 만큼 다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순영은 곧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건 곧 스스로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김민규를 좋아하지만 그에게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과. 순영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서 뜯었다. 따라락, 페트병 따는 소리에 민규는 고개를 들었다.
"형, 이럴 때는 어떻게 하면 돼?"
순영에게 답을 얻길 바라는 듯 민규는 간절하게도 물었다. 순영은 숨기지 않고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김민규는 권순영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다. 한번도 입밖으로 이 일을 낸 적은 없지만, 분명히. 그런데도 굳이 나에게 이걸 묻는 이유는 뭘까. 같은 일방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서 조언을 해달라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안다고 해도 절대 말해 줄 수 없다. 그 정도 이기심은 부려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좀 이상한 구석은 있었다. 비슷한 시간을 텀으로 그녀의 연락은 늘 끊겼다. 저녁에 한 5시간 정도. 어떤 날은 다음 날 아침, 그녀가 일어날 때까지. 마치 연락을 할 수 없는 시간처럼. 순영은 갸웃거리면서 말했다.
"좀 이상하지 않냐."
"뭐가?"
"항상 비슷한 텀으로 연락이 끊기잖아. 또 비슷한 시간에 다시 연락 오고."
"……?"
"혹시 다른 사람하고 있어서 너한테 답장할 수 없게 된다든지."
"형은 왜 걔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민규는 불쑥 일어나면 소리쳤다. 갑자기 큰 소리를 낼 줄은 몰라서 순영은 놀라 뒤로 조금 몸을 물렸다. 그냥 생각한 대로 말할 것뿐인데 민규가 그토록 화를 낼 줄 몰랐다. 이렇게 큰 소리를 낸 적은 처음이었다. 순영이 그대로 입을 다물자 민규도 그제서야 스스로를 깨닫고 다시 앉으면서 기어드는 소리로 미안, 하고 말했다. 사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한 거라고,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보인다면, 그건 부정할 수가 없잖아.
"미안하다."
식은 얼굴로 짧게 말하고서 순영은 방으로 들어갔다. 이게 아닌데, 화는 자신이 내 놓고 민규는 순영이 들어간 방문을 보다 한숨 쉬었다.
며칠 순영과 데면데면 지냈다. 사실 데면데면하게 구는 건 민규였다. 순영은 평소처럼 이야기하고, 잘 지냈다. 오늘 저녁도 그랬다. 순영은 민규에게 저녁을 먹었냐 물었고, 민규는 아직이라고 했다.
"귀찮은데 시켜 먹을까."
요리는 전적으로 민규의 몫이었다. 민규는 괜찮다고 했지만, 순영은 늘 미안해했다. 가만히 먹고만 있는 게 아니라, 뒷정리는 민규를 뜯어 말리면서까지 자신이 하면서. 오늘은 냉장고에 재료도 별게 없어서 민규는 그러자고 했다. 아무거나 적당한 것으로 주문했다. 15분정도 지났을 쯤, 초인종이 울렸다. 엄청 빨리 오네, 순영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 문부터 열었다.
"감사합…."
음식을 받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아무것도 없다. 올려다보자 문 앞에 선 것은 덩치 좋은 남자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어쩔 줄을 모르는 여자 한 명. 그는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 바람에 순영은 어어, 하면서 문과 함께 딸려 나갔다. 순영은 직감적으로 민규가 좋아하는 그녀라는 걸 눈치챘다. 그럼, 이 남자는-.
"너냐, 내 애인이랑 바람난 새끼가?"
끝까지 생각하기도 전에 멱살을 짤짤 잡혔다. 멱살을 잡히는 순영을 보고 민규는 불쑥 나서서 덩치 좋은 남자에게 덤벼들었다.
"나랑 이야기해요, 나예요!"
"얘기?! 무슨 얘기가 필요해!!"
민규의 멱살도 잡으려는데 순영이 저기요! 하면서 말렸다. 남자는 뭐야, 하면서 귀찮은 것을 떨쳐내듯 팔꿈치로 순영을 내쳤다. 동시에 쿠당탕, 요란한 소리가 났다. 팔꿈치에 얼굴을 맞은 채로 신발장에 등을 부딪히며 넘어졌다. 순영이 형! 하는 민규 목소리가 들리는데 아파서 대답도 못 하겠다. 입술이 터졌는지 피맛이 난다. 남자도 순영이 그렇게 넘어질 줄은 몰랐는지 당황해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자기야, 가자. 내가 설명할게, 응?"
'자기야'라는 말에 민규는 삐걱거리며 그녀를 돌이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친구를 달래는 데에 여념이 없어서 민규의 시선까지 알아차릴 틈이 없었다. 어떻게든 그녀가 연인을 데리고 나갔고, 한바탕 소란이 일은 현관 앞은 휑하니 정적이 일었다. 민규는 쭈그려 앉아 순영을 살폈다.
"미안해…."
"괜찮아."
순영은 말은 괜찮다고 하면서도 아야야,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 언제 놓고 간 것인지 문 앞에 배달 음식이 놓여 있었다. 순영은 음식을 집어들면서 밥 먹자, 하고 말했다. 나 때문에 다쳐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밥이나 먹자는 순영을 보자, 민규는 마음이 이상해졌다. 뭔가, 너무 간단히 받아들인 사과가 오히려 목에 걸린 기분이다. 이미 다 식은 음식을 꺼내는 순영을 바라보는데, 핸드폰이 지잉 진동했다. 그녀였다.
[나와서 잠시 이야기할 수 있어?]
"식어서 데울ㄲ…."
"형, 혼자 먹고 있어.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먼저 자도 돼!"
분명히 그녀일 테다. 순영은 말리려고 입을 벙긋거리는 찰나, 순식간에 민규는 집을 뛰쳐나갔다. 식은 음식과 순영만이 휑뎅그렁히 남았다. 순영은 쓰레기통에 식은 음식들을 모두 버렸다. 마음도 이렇게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마음은 왜 버려지지 않는 걸까. 저렇게 나가버린 김민규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는 나를, 어쩔 수 있을까. 순영은 착잡한 마음으로 소파에 다리를 그러모아 앉았다. 먼저 자도 된다고 했지만, 아마 잠들 수 없을 것 같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자정을 넘기고 새벽 한 시가 되었을 쯤,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김민규.
"여보세요. 김민규, 왜 아직 안 들어 와?"
- 권순여어엉, 순영아아아. 집에 가려는데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아아….
잔뜩 취한 목소리였다. 혼자 마신 건지, 같이 마신 건지 알 수 없지만 지금 김민규가 혼자 있다는 건 알겠다. 어딘데? 하고 묻자 여기-, 하면서 불분명한 발음으로 술집 이름을 댔다. 순영은 차키를 들고 나섰다. 평소에는 잘 운전하지 않지만, 취한 김민규를 이고 지고 데려올 자신이 없었다. 술집에 가자 커다란 덩치가 혼자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가자."
"어, 권순영이다. 진짜로 왔네에, 진짜로."
민규는 풀린 혀로 순영을 맞아 주었다. 읏챠, 순영은 민규를 어깨동무해서 들쳐업고 가게를 나왔다. 순영에게 끌려 차로 가면서 민규는 계속 순영을 불러댔다.
"순녕아, 수녕아아아."
"그만 좀 불러."
"너는 내가 부르면 꼭 오더라아. 걔는 내가 불러내도 안 올 때 많았거드은…."
중얼거리는 뒷좌석에 민규를 구겨넣었다. 하, 한숨이 샌다. 그래, 나는 네가 부르면, 아니 부르지 않아도 늘 너에게 갔는데. 뻔히 다 알면서, 김민규.
"아야야…."
아까 맞은 뺨이 아프다. 실은 마음이 더 아프다. 그냥 속상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창밖으로 달빛이 휘적휘적 걸어가고 있었다.
*
"어으, 속 쓰려."
민규는 숙취로 쓰린 배를 붙잡고 일어났다. 집에 어떻게 온 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순영에게 전화한 것까지는 기억 나니까 아마 순영이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았을까, 얕게 짐작했다. 방문을 열고 나가자, 북엇국 냄새가 났다. 순영은 인덕션 앞에 서서 국의 간을 보고 있었다. 나온 민규를 보고 식탁 앞에 앉으라고 눈짓했다. 순영은 햇반 하나를 돌려서 국과 함께 민규의 앞에 놓았다. 희여멀건한 게 딱 보기에도 정말 맛이 없어 보이는 북엇국. 민규의 맞은 편에 순영은 앉았다.
"형이 직접 끓인 거야?"
순영은 끄덕였다. 한 입 떠 먹자, 역시 맛없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맛이 없었다. 그렇지만 요리도 잘 못하면서 룸메 숙취를 위해 직접 해장국을 끓여 준 게 고마워서 민규는 조금 웃었다. 고개를 들어 순영을 보는데 어제 맞은 곳이 부어서 입술이 터진 채로 딱지가 앉았다.
"괜찮아?"
민규가 묻자, 순영은 뭐가? 하고 되물었다. 민규는 자신의 뺨을 콕콕 가리켰다. 아아, 하면서 순영은 부은 볼을 슥슥 문질렀다. 괜찮을 리가 없다. 입술만이 아니라 입 안에도 살이 터졌다. 어제 양치를 하면서 피를 한움큼 뱉어 낼 정도로. 헛웃음까지 나며 야무지게 맞았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말하고는 상처가 아픈지 눈가를 살풋 찡그렸다. 안 괜찮으면서. 민규는 어제의 감정이 오늘로도 흘러 넘어온 것처럼 마음이 이상해졌다. 이 이상함이 뭔지 모르겠다. 뻑적지근한 기분. 괜히 북엇국만 한 번 떠 먹었다. 역시 맛없다. 그런데도 민규는 국 한 그릇을 다 먹었다. 먹는 내내 알려고 해도 알 수 없었다.
"순영이 형, 순영아!"
일이 있고서 며칠 후, 단대 건물에서 나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저쪽에서 민규가 풀쩍거리면서 손을 흔들었다. 무슨 일이 있길래 저렇게 신났지, 순영은 민규의 신남이 썩 내키지 않았다. 나에겐 별로 좋은 일이 아닐 것 같다. 멈춘 순영을 참지 못하고 민규는 후다닥 달려서 순영을 답싹 끌어안고 흔들거렸다.
"뭔데, 무슨 일인데?"
"형, 나 그 애랑 이제 사귄다?!"
"어…?"
순영의 당황과는 상관없이 민규는 너무나 즐거운 목소리로, 행복하게 말한다. 순영은 민규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숨이 옅게 체했다. 결국 그렇게 되고 마는 구나. 순영은 어떤 말도 해줄 수 없다. 축하한다면 거짓말이고, 헤어졌으면 좋겠다는 말은 할 수 없고. 순영은 그저 방방거리며 송곳니를 보이며 웃고 있는 민규를 본다. 저 웃는 얼굴이 나에게도 향하는 날이 올까. 참은 숨을 내쉬면서 조금 웃었다. 바라는 것이 우습다. 돌아가는 길에 민규는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가끔 흐흫, 하는 웃음소리도 따랐다. 순영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냥, 민규의 즐거움을 깨고 싶지 않다.
그렇게 두어 달이 지났을 때 순영은 알았다. 깨달았다. 더 이상 이렇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나 없이도 행복하고, 매일 늦게 들어오는 그를 기다리며 마음 졸이는 시간에 지쳤다. 그냥 이번 두어 달로만 지친 것이 아니다. 민규를 혼자 사랑한 모든 시간에 지고 만 것이다.
일단 순영은 방부터 빼기로 했다. 알바비를 차곡차곡 모아둔 돈으로 보증금 정도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민규가 없는 시간을 틈타 순영은 방을 알아보러 다녔다. 다행히 학교 근처에 괜찮은 원룸이 하나 있었다. 지체할 것 없이 순영은 방을 계약했다. 그리고 그날 밤, 순영은 거실에서 민규를 기다렸다. 오늘도 민규의 귀가는 늦었다. 자정이 다 되어 갈 쯤, 도어락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온 민규는 아직 잠들지 않은 순영을 보고 눈이 댕그래졌다.
"아직 안 잤어?"
"어, 할말이 있어서."
민규는 순영의 눈짓에 소파에 마주 앉았다. 후, 순영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망설였다. 민규는 재촉하지 않고 기다렸다. 할 이야기가 정리됐는지 순영은 입을 열었다.
"방 빼기로 했어."
"뭐라고?"
"너는 계속 여기 살아도 돼. 나만 나가는 거니까. 벌써 새로 살 집 계약도 다 했어."
"아니, 무슨…."
말하는데 자꾸만 울컥울컥 목이 친다. 순영은 창피하게 울 수 없어서 주먹을 꾸욱 쥐었다. 민규는 당황해서 말도 다 잇지 못하고 순영을 보았다. 민규가 형, 하면서 순영의 쥔 주먹을 잡으려고 하자 순영은 뒤로 몸을 물렸다.
"너, 다 알잖아.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전부 알잖아. 그런데, 그런데도 모른 척하고 다른 사람이랑 행복하게 지내는 거, 이제 안 볼래. 보기 싫어. 너무 힘들고 지쳤어. 이런 거 이제 그만할래. 이런 말 듣는 것도 마지막일 거야. 내가 그동안 방해가 됐으면 미안해. 잘 지내."
말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 번 말이 터지니까 우수수 쏟아졌다. 실은 순영도 말을 쏟아내면서 절반은 자신의 뜻이 아니었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짝사랑을 자백하다가 울게 될 줄은 몰랐다. 벅벅 눈을 문질렀다. 이루어질 수 없어서, 이루어지지 않아서. 손에 없어서, 갖고 있지 않아서 더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은 터져나왔고, 되감을 수 없다. 이걸로 끝이다.
짝사랑 따위, 이제 지겹다.
*
순영은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짐을 챙겨 나갔다. 민규는 일어나서 절반이 뚝 떨어져 나간 집안을 보고 순간 숨이 막혔다. 이렇게 인사도 없이 나갈 수 있나. 집은 비었는데, 마음은 복잡해졌다. 민규는 핸드폰을 들었다. 손에 익은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려다가, 차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화면을 껐다.
"하."
한숨이 새나왔다. 순영은 한꺼번에 많이 말하고, 울었다. 그 중에 자신이 모르는 일은 없었다. 순영은 나를 좋아하고 있었고, 나는 알고 있었다. 순영이 내가 다른 사람과 행복한 모습을 힘들어한다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방해는 아니었다. 그것만큼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순영은 방에 들어갔고, 민규는 말할 기회를 잃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나와 보니 순영의 모든 게 사라졌다. 공기가 시들고 있었다.
집을 나온 순영은 이것을 절교, 라고 표현했다. 그저 내 짝사랑이 끝난 것뿐이고, 우리는 따로 길을 가는 것이니까 절교가 맞다. 학교에서 민규를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렇게 날이 지나던 어느 날, 민규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뜬 이름은 '권순영'. 순영에게서 온 문자다. 다급하게 민규는 문자를 열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건.
[관리비+월세 절반 230,000원]
저번 달의 집세 정산 문자였다. 다만 그게 끝이었다. 민규는 어쩐지 하지도 않은 이별을 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연인은 분명히 곁에 있는데, 왜 이렇게 헤어진 기분이 드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없어도 잘 지내는 순영이 싫었다. 분명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그건 자신쪽이었다. 혼자 집에 들어갈 때면 말할 수 없는 공허함이 덮쳐 왔다. 나 없이 저토록 무심하게 잘 지내는 권순영은 싫다.
"순영아, 오늘 과 모임 안 까먹었지?"
"아…."
안 까먹기는, 완전히 까먹었다. 평소 이런 자리에 잘 참석하지 않는 순영을 데리고 가려고 선배들은 드릉드릉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집에 기다리는 사람도 없는데 가면 어떤가 싶어서 네, 하고 대답하려는 순간.
"나랑 저녁 먹기로 했잖아."
뒤에서 팔이 감겨 오며 머리꼭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알 수있다. 김민규다. 순영은 감긴 팔을 쳐내면서 몸을 비켰다. 당황스러운 눈으로 쳐다봐도 민규는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그치? 하면서 되묻는다.
"뭐야, 이번에는 모임 가는 거 아니었어? 권순영 치사하네."
"아니요, 갈ㄱ…."
"나랑 저녁 먹는 게 선약이잖아."
선약이면 어쩔 수 없지, 다음에는 꼭 와라. 선배들은 손을 휘휘 저으면서 멀어졌다. 기어코 민규는 순영을 붙잡아 두었다.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있지도 않은 약속을 갑자기 만들어서 순영을 곤란하게 만든 게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너 도대체 왜 그래?"
"내가 뭘."
받아치는 말이 더 황당하다. 분명 잘 지내라고 했는데, 왜 이렇게 나를 못 흔들어서 안달인지. 순영은 짜증이 난 몸짓으로 민규를 밀쳤다.
"잘 지내라고 했잖아. 왜 자꾸 이래?"
"못 지내서 이런다."
"뭐?"
원하는 좋아하던 사람과 이어져서 아기자기 연애나 하면 될 일인데, 못 지낼 일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방해인지. 순영은 이렇게 말을 엇갈리게 나누는 것도 실은 버거웠다. 절교했으면 두 번 다시는 만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같이 살 때보다 더하다. 이 실랑이가 의미 없다는 걸 알고 순영은 뒤를 돌았다. 민규는 말없이 뒤를 돌아 가버리는 순영을 보면서 꾸욱 입술을 물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켜서 문자를 보냈다.
[할말 있어. 우리 집으로 와 줘.]
순영은 문자를 확인하고 삭제했다.
민규는 순영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 기다리다 보니까 해가 뜨고 있었다. 권순영도 내가 들어오지 않는 밤을 이렇게 기다렸겠지, 이제야 민규는 순영을 이해한다. 권순영이 나를 놓지 못할 거라는 알량한 우월감이 얼마나 덧없는 것이었는지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민규는 그러모아 안은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막연한 신뢰가 얼마나 힘이 없는 것인지, 알게 되는 새벽이었다.
*
몇날 며칠 순영의 일로 마음을 앓던 민규는 결국 그녀에게 이별을 고했다. 이건 순영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맞는 일이었다. 뜬금없이 이별의 말을 들은 그녀는 민규를 붙잡고 왜 그러냐고 물었다. 민규는 다만,
"이건 아닌 것 같아."
라고 하면서 그녀를 떠났다. 민규에게 이별 당한 그녀는 도무지 그의 마음을 알아낼 수 없자, 순영을 생각해냈다. 민규와 가장 친한 친구니까 아마 왜 갑작스러운 이별을 말했는지 알지 않을까. 그녀는 순영이 듣는 강의실로 향했다. 마침 수업이 끝났는지 강의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고 있었다. 그 중에 순영을 발견한 그녀는 높은 목소리로 불렀다.
"저기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영은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녀가 부른 건 분명 나다. 못마땅한 기분을 숨기지 못하고 순영은 자리에 섰다. 그녀는 그 앞으로 다가왔다. 곧 울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보더니 그런다.
"민규가 헤어지지고 했어요."
"…네?"
너무 뜻밖이라서 순영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녀는 무척 간절한 손짓으로 순영의 두 손을 붙잡고 뚝뚝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유도 없이 그냥 헤어지지고 했어요. 민규랑 가장 친한 친구니까, 혹시 알고 계신 거 없으세요?"
"아뇨, 없는데요."
"잘 생각해 보세요. 정말 없…."
"너, 뭐 하는 거야?"
그녀의 말을 끊고 다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안 봐도 김민규다. 민규는 헤어졌지만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그 꼴을 보는 순영은 울컥하기도 하고 짜증이 머리를 치솟았다. 간다는 말도 없이 순영은 뒤를 돌아 멀어졌다. 그녀를 달래면서도 민규는 멀어지는 순영의 등을 보았다. 이게 아닌데,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녀를 대충 달랜 민규는 순영을 따라 뛰쳐갔다.
"형, 순영이 형. 순영아."
불러도 순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 습관적으로 김민규를 떠올리는 내가 무너질 것만 같다. 집 앞에 도착해서 현관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기어코 팔이 붙들렸다. 민규는 우물쭈물하더니, 조그맣게 말했다.
"미안."
그 사과가 더 싫다. 순영은 붙잡힌 팔을 사나운 손으로 쳐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어느 방에 불이 켜졌다. 저기가 권순영이 지내는 곳이구나. 순영이 혼자 사는 곳은 둘이 함께 살던 집과 걸어서 10분 정도였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권순영이 있었는데, 나는 그를 찾아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무심했던 건 나였다.
하, 한숨이 샌다.
순영은 밤새도록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마음이 혼란하고 어지러워서 눈을 감아도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은 기분으로 새벽을 보냈다. 손으로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면서 방에서 나오는데,
"일어났어?"
혼자 사는 집에서 너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내가 잠을 못 자서 헛것이 보이나? 아무리 보아도 소파에 앉아 있는 건 김민규였다. 순영이 멀거니 보고만 있자, 민규는 읏샤,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순영을 이끌고 식탁으로 향했다. 민규가 차린 아침밥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형은 이사 갈 생각은 했으면서 비밀번호 바꿀 생각은 안 했나 봐?"
같이 살던 집의 비밀번호가 손에 익어서 그렇게 해둔 것인데, 민규가 설마 찾아오리라곤 생각 못 했다. 차려진 아침밥도, 맞은 편에 앉아서 순영이 빨리 먹길 기대하는 김민규도 모든 게 순영은 얼떨떨했다. 일단 차려 준 밥이니까 한 숟갈 떠 먹었다. 국도 떠서 먹으려는 찰나에 민규가 말했다.
"오늘 데이트 할래?"
"푸왑-!"
생각하지도 못한 대사에 순영은 순간 국물이 목구멍에 걸렸다. 콜록거리는 순영에게 민규는 물잔을 내밀었다. 물을 마시면서 이해하지 못한 눈으로 민규를 보았다. 그 눈빛에 퍽 의기양양한 눈이 되어서 입을 열었따.
"오늘 대학로 가서 연극 보자."
"아니…."
"그 다음에는 형이 좋아하는 평양냉면도 먹고."
"너…."
"저녁에는 맥주도 한 잔 하는 거야, 내가 진짜 괜찮은 맥주집을 발견했거든!"
"그…."
민규는 순영이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할까 봐 어디에 갈지 술술 읊었다. 덕분에 순영은 대꾸도 못하고 말꼬리가 족족 잘렸다. 참나, 순영은 헛웃음이 났다.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나를 흔드는 건지. 그리고 기대에 부흥해 힘껏 흔들려 주는 나는 뭔지. 그래, 그렇겠지. 습관이 쉽게 바뀌진 않을 테지. 가다듬는 호흡으로 합리화를 해 보아도, 내키지 않은 것만은 진실이었다. 너무 그를 따르고 싶은 마음이, 내 스스로가 싫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시야에는 온통 너뿐이다.
그게 제일, 제일 싫다.
*
며칠이고 민규는 이러한 행동을 반복했다. 수업이 끝나면 순영이 어디 갈새라 그의 강의실 앞으로 뛰어가서 기다렸고, 그가 나오면 이끌고 맛있는 식당이든, 구경할 거리가 있는 곳이든 어디라도 데려갔다. 그리고 순영이 웃는지 얼굴을 몇 번이고 보았고, 그를 웃게 하려 했다. 그동안 그에게 해주지 못한 걸 최대한 많이 하고 싶었다. 그리고 민규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사람이 고작 타인의 미소에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순영은 사정이 달랐다. 마음을 정리한 지금에야 왜. 마음을 정리했다는 사실도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민규가 신경 써 주고, 나를 보고 행복하게 웃을 때, 짐짓 두려운 기분마저 들었다. 이러다가 민규가 또 떠나가면, 순영은 정말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두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마음이 온통 민규에게 헤집어졌다. 징그러운 짝사랑은 한번이면 충분하다.
오늘도 민규는 순영을 강의실 앞에서 기다렸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순영이 형은 우산을 가지고 있으려나. 하지만 없어도 괜찮다. 내가 챙겨 왔으니 순영이 비를 맞을 일은 없을 테였다. 가방에 하나, 그리고 손에 쥔 우산 하나를 들고 민규는 얕게 웃었다. 이윽고 수업이 끝나고, 우르르 밀려나오는 사람들 틈에서 순영을 발견했다. 하, 순영은 한숨부터 쉬었다. 오늘 순영은 우산이 없었다. 혹시 민규가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려 주지 않을까, 아주 조금, 아니 꽤 기대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기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순영의 마음은 뒤죽박죽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분이 바뀌었다. 전부 김민규 때문에. 민규는 손을 흔들면서 순영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우산.
"형, 오늘은 집에서 뭐 시켜 먹을까?"
재잘거리며 민규는 순영을 따라왔다. 단대 현관 앞에 서서 순영은 민규 손에 들린 우산을 보았다. 역시 없구나, 민규는 해맑게 웃으면서 우산 없지? 하면서 내밀었다. 순영은 어정쩡하게 우산을 받아서 폈다.
"민규야, 너도…."
말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민규는 가방에서 우산 하나를 더 꺼냈다. 순영은 순간 뒷걸음질쳤다. 대체 내가 뭘 바란 건지. 실은 그가 우산을 내밀 때 기뻤다. 기대에 부응하듯 우산을 내주어서 설렜다. 근데 그건 온통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우산을 따로 쓰고 갈 것이란 생각은 어째서 전혀 하지 못한 걸까. 순영은 툭, 우산을 떨어트리고 뒷걸음질치다가 빗속으로 도망쳤다. 민규는 갑자기 뛰쳐가는 순영을 보고 어어, 하면서 따라갔다. 그 사이에도 순영이 떨어트리고 간 우산을 잊지 않고 챙겼다.
"순영이 형, 권순영!"
불러도 순영은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달려갔다. 더 이상 숨이 턱까지 차서 달리지 못할 쯤, 순영은 멈추었다. 금세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었다. 순영을 뒤따라 달려 온 민규는 그의 위로 우산을 씌워 주면서 어깨를 붙잡았다. 몸을 일으킨 순영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원망하는 얼굴이었다.
"대체 너한테 나는 뭐야?"
"뭐?"
"너도 알잖아, 내가 너 좋아했던 거. 아니, 좋아하는 거."
"……."
"그런데 왜 자꾸 나를 흔들어? 왜 기대하게 만들어?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나는-."
"제발 이제 그러지 마, 제발. 부탁이야…."
마지막 말은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순영은 우산을 씌워 주는 민규의 손을 쳐내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민규는 한참이나, 순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못 박혀 서 있었다.
"콜록, 콜록!"
다음 날, 순영은 단단히 감기에 걸렸다. 목이 붓고, 열이 오르고, 기침이 끊기질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근데 감기로 죽는 사람도 있나. 하, 헛웃음이 난다. 어제 민규를 내치고 오면서 실은 그가 따라와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역시나 그는 오지 않았다. 매번 나 혼자 이렇게 기대하고, 실망하고. 괜한 민규 탓을 했다. 먹은 것도 없고, 약도 없어서 순영은 그냥 이불을 뒤집어 썼다. 잠이 들면 좀 낫겠지, 하면서 억지로 눈을 감았다. 그때, 띠띠띠띠- 도어락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하게도 문은 열렸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거실을 울렸다. 김민규다.
"형, 감기 걸려서 오늘 학교 못 나왔다며."
순영은 거의 죽은 척 움직이지 않았다. 민규는 조그맣게 숨을 내쉬면서 침대로 다가왔다. 가까이만 다가가도 열감이 느껴졌다. 민규는 순영의 이마에 손을 댔다. 너무 뜨겁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온몸이 약해진 순영은 또 눈물이 오를 것 같았다. 민규는 순영을 억지로 일으켰다. 일어나 앉으며 순영은 민규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은데, 목이 아파서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사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민규는 봉투에서 해열 패치를 꺼냈다. 순영의 앞머리를 살살 넘겨 조심스럽게 붙여 주었다.
"아무것도 안 먹었지? 죽 만들어 왔어. 이거라도 먹자."
민규는 아직 따뜻한 용기를 꺼내어 순영의 다리 위에 얹었다. 그리고 숟가락을 가지고 와서 한 술 뜬 후 후후 불었다. 먹기 좋은 온도가 되었는지 입술을 대 보고 끄덕이면서 순영의 입가로 갖다댔다. 고개를 돌리자 민규는 따라서 숟가락을 다시 댔다. 못 이기는 척하면서 죽을 받아 먹었다. 먹자마자 순영은 눈물이 출렁 오르고 말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고기죽. 목이 아픈 내가 먹기 좋게 곱게 간 쌀, 짠 걸 싫어하는 나에게 맞춘 담백한 맛. 오직 권순영만을 위해 민규가 만든 죽이었다. 뚝뚝, 어찌할 새도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민규는 죽을 한쪽 책상에 치우고 뜨거운 순영의 몸을 끌어안았다. 순영은 끌어안긴 채 민규의 어깨를 적셨다.
"나는 내 감정밖에 몰랐어. 형, 네 맘부터 헤아려야 했는데."
"야, 너…."
"실은 나도 무서웠어. 형이 또 나를 떠날까 봐."
"……."
"나한테도 기회를 줘."
"……."
"좋아해."
"으흑…."
순영은 그대로 민규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렇게 푹 안기고 싶었다. 김민규에게 잠기고 싶었다. 그가 나를 몰라줘서 슬펐다. 하지만 그가 내 진심을 알고서도 모른 척할까 봐 실은 그게 더 두려웠다.
너는 내 통증의 처음과 끝, 너는 사랑의 동의어.
고통이 모두 사라지면 그때서야 우리는 피어난다.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