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진짜 다 티난다. 너도 알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권순영은 늘 가타부타 말을 붙이지 않고 순순히 수긍하는 편이었다. 가끔은 입을 비쭉이기도, 괜히 볼멘소리를 덧붙이기도, 또 멋쩍게 웃기도 했지만. 아무튼 어느 쪽이든 권순영은 결국 순순히 그 말을 인정하게 되고는 했다. 당연했다. 그건 권순영도 아주 잘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권순영은 정말 더럽게 거짓말을 못한다. 정말 빼어나게 재주가 없다고, 그래서 정말정말 티가 난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왔다.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래, 정말로 재주가 없더라. 남들은 대놓고 연습도 좀 빠지고 꼼수도 부리고 하는 동안, 권순영은 편법도 빼는 법도 모른 채 곧이 곧대로의 결말을 모두 맞이해왔었다. 근데 권순영은 알다싶이, 한다면 하는 면도 굉장히 큰 사람이었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일들이라도 억척같이 시도하고 또 매달려서 어떻게든 해내는 편이었다. 권순영더러 참 거짓말을 못한다 하는 사람들도 그 사실은 늘 그냥저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곤 했다. 그래서 권순영은, 지금부터 생애 최초이자 마지막인 개쩌는 거짓말을 할 것을 기어이 결심하고야 말았다. 권순영은 정말로 한다면 했다. 그래서 권순영은 지금의 이 거짓말도 분명 성공할거라 믿어 마지 않는다.
권순영은 이 최초의 거짓말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 말을 아주아주 많이 연습했다. 상상도 못할 만큼 예전부터 준비해왔다. 거울 앞에 서서 닳도록 많이 말해보기도 했고, 핸드폰으로 녹음해서 들어보기까지 했다. 어떤 목소리로, 또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말하는 게 좋을지 하나하나 고민해보기도 했다. 그러니까 지금의 권순영이 김민규에게 뱉어낼 이 말은 지극히 이성적이며 또 계획적이라는 뜻이었다. 장담할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충동적이지도, 감정적이지도 않다. 아주 오랜 계산 끝에 내린 최선의 결론이란 말이었다. 아마 조금도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누구도 믿지 않겠지만. 정말 사실이 그랬다. 권순영은, 정말로, 이 거짓말을 성공시키기 위해 꽤나 용을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안다. 이 거짓말도 아마 오래지 않아 형편없이 드러날 것이란 것을. 그럼에도 권순영은 가능하다면 그 유예기간을 최대한으로 늘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게 일평생이기를 바랐다. 권순영은 사실 그런 마음이었던 거다.
그래서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뱉어낸 것이다.
민규야. 나 세븐틴 탈퇴하려고.
하고서.
김민규가 그렇게나 막막한 얼굴을 제게 지어보일 것을 죄다 알고서.
012★PLANET
영원 이별 PLANET
권순영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지 권순영은 전부 알았다. 권순영이 이 자리를 만들기 위해 오랫동안 애써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권순영은 며칠 전부터, 아니. 사실은 몇 주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렸다. 분명 촬영이 끝나면 늘 그래왔듯이 멤버 몇이 남아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할 것이었다. 사람을 좋아하는 김민규는 굳이 빠지지 않을 게 뻔했고. 만약 전원우까지 그 저녁 자리에 꾀어낼 수 있다면, 김민규는 더더욱이 그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임이 자명했다. 촬영 다음 날의 스케줄은 다행스럽게도 오후였다. 다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맥주 한 잔 정도는 권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아마 한 잔이 두 잔이 되고, 또 그러다 하나 둘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러다 보면 이야기는 깊어지기 마련이다. 그럼 권순영은 그 사이에서 살살 바람만 잡으면 되었다. 적당히 술을 권하고, 비워진 잔은 눈치 빠르게 채우고.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게 재바르게 가벼운 곁들임 음식들을 주문하고. 그리고 그 뒤의 일들은 어느 정도는 운의 영역이었다. 그렇게 멤버들이 하나 둘 먼저 자리를 비우길. 언제나처럼 주량도 먹성도 제일 강한 김민규가 마지막까지를 남아 있기를. 그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순간이 온다면, 권순영은 슬쩍 김민규를 떠볼 생각이었다.
나 너랑 하고 싶은 얘기 있어서 일부러 남아 있었는데.
우리 둘이서만 한 잔 더 하면 안 돼?
하고.
다행스럽게도 거기까지의 일은 수월하게 풀렸다. 권순영은 어렵지 않게 원래 찾아둔 술집으로 김민규를 데려갈 수 있었다. 계획한 대로 한 잔도 마시지 않았기 때문에 운전도 스스로 할 수 있었고, 미리 예약해준 프라이빗한 룸으로 김민규와 단 둘이 남을 수 있었다. 권순영은 그 일련의 과정 속에서 김민규가 적당히 몰랑몰랑하게 풀어졌음을 느꼈다. 이 형이 원래 이렇게 세심한 사람이었나? 웬일이지? 하고 절 보는 김민규의 눈빛이 아주 뻔하게 읽혔다. 그 눈길 사이에는 왜 하필 나지? 하는 적당히 기분 좋은 의문 역시도 섞여 있는 듯 했다. 당연한 일이긴 했다. 권순영은 원래 김민규에게 아주 못 말리게 굴던 부류였으니까. 그래서 더욱이 꺼내기 어려운 말이기도 했고.
그래서 권순영은 안주가 나오자 괜히 지난 날의 이야기들만 늘어놓았다. 식당은 일부러 김민규가 평소에 잘 먹던 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곳을 골랐다. 잘 조리된 삼겹살이 느끼함을 잡아주는 소스와 함께 식탁에 놓였다. 일품요리였다. 권순영은 그 옛 이야기를 하면서도 제법 김민규의 눈치를 봤는데, 아직까지는 순순히 음식을 먹으며 깊은 생각 없이 제가 뱉는 말들을 적당히 잘 따라오는 듯 보였다. 하여튼 그 때 김민규 진짜 말 안 들었어. 하고 나쁘지 않게 웃으며 농담을 건네면, 김민규 역시 따라 웃으며 무슨 지는 되게 착했던 줄 알아... 하고 대꾸해줬다. 따지자면 그 모든 상황이 권순영이 지금껏 수도 없이 그려온 시뮬레이션 중에서 최상의 상태였다는 뜻이다. 권순영은 차마 음식에는 손은 댈 수 없어 물잔만을 간신히 몇 번 입에 대었다 뗐다 했다. 초조함에 입이 마르기도 했지만, 그래도 최대한 그것을 숨겨가며 목을 축였다. 하여튼 그 때 애들 진짜 웃겼는데. 그렇게 말을 이으면 김민규 역시도 농담조의 말투로 답을 붙이는 것이다.
그러게, 십 년도 훨씬 더 되지 않았나?
징글징글하다, 진짜.
그래도 우리 이제 다들 잘 하잖아. 욕심도 그만큼 늘고, 실력도 그만큼 늘고.
다들 나이 좀 먹고 머리 굵어져서 그런가봐. 그래서 김민규가 그렇게 말했을 때, 권순영은 바로 지금이 가장 최고의 타이밍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이상으로 이야기를 지연시킬 수 없었다. 권순영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으니까. 당장의 내일이 손바닥 뒤집듯 어떻게 바뀔지, 더 이상은 예측할 수 없었으니까. 권순영은 천천히 들고 있던 물잔을 테이블에 내려두었다. 민규야. 그렇게 뱉는 목소리가 최대한 태연할 수 있도록 몰래 목을 가다듬었다. 아까보다는 말투가 조금 차분해지기는 했지만, 아주 눈에 띌 정도로 목소리가 바뀌지는 않았다. 아직까지는 괜찮았다. 김민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권순영을 마주 보았다. 권순영은 그냥 가만히 웃기를 택했다.
그치. 이제 다들 잘 하더라고. 엄청엄청.
그래서 이제 괜찮을 거 같더라고.
권순영은 그리고 그 사이에 김민규의 말이 붙을 수 없도록 곧장 말을 이었다. 김민규는 갑자기 툭 던져진 권순영의 의중 모를 말을 의문 서린 눈동자로 곱씹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 권순영은, 바로 그 때에 아주 오랫동안 준비한 말을 던졌다.
민규야.
나 세븐틴 탈퇴하려고.
그럼 아마 너는 생각하겠지. 나를 영영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그러나 사실 그 편이 좋았다.
나는 네가 나를 영영 몰랐으면 하므로.
*
에이, 형. 빈 말로라도 그런 농담 하지마. 권순영은 그렇게 말하는 김민규의 목소리가 옅게 떨림을 감지할 수 있었다. 맞은 편에 앉은 김민규의 표정은 온갖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투명했다. 권순영은, 특히 이번의 김민규에게는 제법 못되게 굴어왔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어쩌면 조금은 툭툭 찔리는 거스러미나 작은 가시 같은 존재이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김민규의 천성이 다정하고 또 순하고 착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김민규가 지금 짓는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은 그야말로 혼란이었다. 정확하게는 제가 뱉어낸 말을 아직 읽어내지 못했다는 쪽이 맞을 것이다.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안 맞게 굴어와서, 이런 말에도 아주 조금 정도는 더 태연하게 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애석하게도 그건 또 아닌 듯했다. 아무래도 스물 일곱의 김민규에게는 십 년 넘는 세월이 너무나 가까울 테니까. 권순영은 그래서 가만히 웃는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맞은 편의 김민규를 응시하였다.
왜?
김민규는 가까스로 입을 열어 그 한 마디를 뱉었다. 그러게, 민규야. 왜라고 해야할까. 내가 가지고 있는 말들을 전부 늘어놓으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걸 이해할 수 있을까. 하다못해 인정은 못하더라도 수용은 할 수 있을까. 이 거짓말을 준비하며 권순영은 수도 없이 김민규를 그려왔다. 몇 백 가지의 시뮬레이션 결과가 있었고, 그것들의 모든 대답은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물론 권순영에게는 눈으로 직접 본 수십 가지의 결말들이 있었으나... 그것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래서 차라리 권순영은 작금의 이 상황이 아주 우습고 말도 안 되는 허튼 소리인 듯이 굴기를 택했다.
그게 있지, 민규야.
형이 사실은 외계인인데...
지구 생활은 이제 정리해야 할 것 같애서.
나 정말로 가야할 것 같더라. 김민규는 그 말에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김민규의 얼굴에서 읽히는 감정이 변했다. 그건 분명한 분노였다. 농담으로라도 금기에 가까운 영역을 건드린 것, 그리고 그것을 대단히 가벼이 여기는 것마냥 엉망으로 군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반사 반응이었을 것이다. 형 지금 나랑 장난해? 짜게 식은 김민규는 그렇게 되물었다. 김민규의 이런 반응 역시 권순영의 시뮬레이션에 없지는 않아서, 권순영은 이번에는 정말 솔직하게 대답하기를 택했다. 그러게, 민규야. 장난이면 좋을 텐데. 거기까지 말을 뱉어내고서는 뒷 말을 꼭꼭 씹어 삼켰다. 나도 이게 정말로 그런 질 나쁜 농담으로 끝낼 수 있는 것이라면 참 좋았을 텐데. 김민규는 기어이 테이블을 한 번 쾅 내리쳤다. 권순영은 그냥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고.
형. 아무리 그래도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어.
난 그래도 요새 좀 형이랑 나랑 괜찮다고 생각했거든? 하. 근데 아닌가보다. 내가 착각했네.
형은 무슨, 무슨 사람이 그렇게 우스워? 할 말 있대서 또 무슨 중요한 말인가, 아님 형 속 얘기라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고 믿은 내가 등신이지? 나는... 형이 그래도 정도는 아는 사람인 줄 알았어.
형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김민규가 뱉어낸 그 말에는 모순적이게도 권순영에 대한 불신과 믿음이 함께 들어 있었다. 다정한 김민규에게는 사소한 것 하나하나 전부 엇나가는 못난 형과 투닥이며 그를 불편하게 여기는 것과, 십 년의 세월 동안 함께 동거동락하며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나갔다는 사실은 결국 별개인 모양이었다. 김민규의 말에는 어쩌면 얼른 그 말을 부정해달라는 다른 마음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형이 지금 무례하고, 또 헛소리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고. 형이 뭐 한 두 번 나한테 그랬냐고. 그러니까 어서 미안하다고 하라고. 어서, 그게 질 나쁜 농담이었다는 듯 굴라고. 김민규의 마음은 그렇게 자글자글 끓어오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권순영의 마음은 차게, 무엇보다도 또 차갑게. 그래서 아주 얼어붙을 마냥 가라앉아버렸다.
권순영은, 그래. 언제나 김민규의 생각 밖에 있어야 하는 존재이니까.
네가 무엇도 읽을 수 없도록 의중 모를 이상할 표정을 짓고선. 아예 눈동자도 볼 수 없도록 휘어지게 웃는 얼굴을 하고선.
네가 은연 중에라도 바라는 것과 조금도 맞지 않을 말들을 뱉어야지. 그게 현실이니까. 그래서 권순영은 말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아니, 사실은 그렇게 반응하는 게 정상이지... 내가 너무 분위기를 잘못 잡았나? 그래도.
네가 아니면 안 되더라. 민규야.
나중에 생각 바뀌면 연락해주라. 김민규는 권순영의 말을 듣다 말고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뛰쳐 나가는 김민규의 뒤로, 내가 기다리겠다는 말을 덧붙였었나. 그것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권순영은 그렇게 덩그러니 남겨졌다. 반 쯤 남은 일품요리와 아무렇게나 팽겨쳐진 수저, 그리고 거의 바닥을 보이는 물잔 정도만이 권순영과 함께였다. 권순영은 다시 표정을 지었다. 억지로 올렸던 눈꼬리를 다시 제자리에 두면 이제는 자조적인 미소만이 옅게 남을 뿐이었다.
권순영은 김민규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았다. 사실 권순영이 그리 좋은 방법을 택하지 않았음을 권순영 역시 알고 있었다. 어느 누구라도 이런 식의 고백은 이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래서 김민규의 반응이 지극히 이해되면서도 또 정상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일 뿐이었다. 권순영의 타협점은 그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권순영은, 정말로 가야만 했으니까.
김민규에게 한 말 중에서는 아직 한 톨의 거짓도 거짓도 없었으니까.
권순영은 제 고향을 떠나온 우주의 이방인이었다. 지구식 표현을 빌리자면 외계인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권순영은 이제 전부 정리해야만 했다. 동시에 또한 정리되고 있었다. 권순영이 있어야 할 곳은 창백한 우주의 푸른 별이 아니라, 아주 까마득히 먼...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느 자그마한 별의 한 구석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이방인을 반기지 않는다. 몸에 들어온 낯선 세균을 면역 세포가 지워나가는 것과도 같은 원리이다. 몇몇 흔적들은 이미 세상의 이치대로 자연스레 제 자리를 찾았다. 그러지 못하는 대부분의 것들은 권순영이 스스로의 손으로 직접 지워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서 실은, 권순영에게는 정말로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건 지금의 이 방법이 정말 최악의 통보식 이별과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권순영이 다른 방법을 찾을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권순영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이제 얼마가 남았을까? 하루, 아니면 이틀? 길게 버텨봐야 반나절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하나 둘 세상이 억지로 제 자리를 찾아가기 전에,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그보다 먼저 말을 꺼내야만 했다. 그게 아주 나쁜 방법이 될지라도 그래야 했다. 나는 이곳의 존재가 아니라고 전해야만 했다. 그 단어들의 진짜 함의는 이랬다.
내가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나는 이제 정말 속절없이 지워지겠지만.
그러므로 앞으로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너무 놀라지는 말아달라고.
그게 원래의 자리를 찾아가는 당연한 진리이니까. 그것이, 제 분수를 잃은 존재의 합당한 처분이니까.
고향을 떠나온 우주인은 어떻게 되는가? 그렇게 물어도 진짜 해답은 아주 가까운 곳에 있을 뿐이었다. 물을 떠난 물고기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니까. 동화 속의 인어공주는 물 밖의 존재와 어울리기 위해 대가로 많은 것을 바쳐가며 그것과 동등할 자격을 얻었지만 기어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우주인이라고 다를 건 없다. 결국 그들은 있어야 할 곳에 머물러야 한다. 제 깜냥을 잃은 이는 대가를 치뤄야 한다. 아무리 물 밖을 동경한 물고기라고 한들, 멀쩡한 폐를 가진 채 아가미가 아닌 것으로 호흡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있을 곳을 떠난 우주인은 별가루가 되어 영구히 소멸한다.
그건 권순영이라고 다를 건 없다. 정말로 당연하게.
그것이 권순영이 거짓말을 결심하게 된 진짜 이유였다.
권순영은 애진작 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차를 떠나 보내주었다. 이 차를 타지 않은 권순영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운전수는 몇 번이고 권순영에게 정말로 이곳에 남을 거냐고 되물었지만, 권순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히 그럴 것이라고 답했다. 권순영에게는 애초에 흩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권순영은 별다른 미련을 남기지도 않았고, 그것이 그렇게 슬픈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 때까지의 권순영이 제 모든 흔적을 완벽하게 지울 수 있을 것이라고 오만하게 믿고 있었던 탓이 컸다.
망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잊어버렸다는 사실까지 지워버리는 완전한 상실은, 상실의 여부조차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니까.
그래서 그건 전혀 슬픈 것이 아니라고.
권순영은 그렇기에 제 소멸이 가까워짐을 직감한 그 날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자욱을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은 이치에 따라 세상으로부터 흩어질 존재였다. 그 흐름에 의해 강제로 떠밀려 없어지는 것보다는, 스스로 끝을 정하는 편이 안정적이라 좋았다. 혹시 모를 변수가 생기면 안 되니까. 권순영은 십 년 넘게 동거동락한 멤버들의 기억 역시도 어렵지 않게 소거할 수 있었다. 저를 밀어내려 구는 세상의 물결이 거셌다. 혹시라도 그 물결에 휩쓸려 낙오된다면 확실히 어느 것도 좋을 것은 없었다.
그런데, 존재도 증거도 기억도 모두 지워지고 지워버린 권순영에게 단 하나의 존재가 나타난다.
김민규.
김민규에게 남은 권순영의 기억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도 없앨 수 없었다.
이 모든 일은, 실은 그 하나의 존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한 것이다.
*
이 세상에 외계인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물으면, 그에 대한 권순영의 대답은 아마도. 딱 이 세 글자 정도였다. 뭐, 있기는 하겠죠. 굳이 따지자면 사실 내가 아마도 그 쪽일 거 같기는 해서... 그래서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어서? 딱 그 정도의 대답이었다. 이 넓은 우주에 우리만큼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다른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을리 없다느니, 와 같은 열띤 토론에는 사실 관심이 없었다. 권순영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사실 그 질문의 뒷면에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요, 따지자면요. 우리 중 그 누가 외계인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나요? 애초에 우주의 이방인을 편하게 외계인으로 부르는 것일 텐데. 이 세상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지 않는 존재가 있기는 하던가요.
...그 어떤 누구가, 감히 그 타인을.
자신의 세계로 기꺼이 초대해 제 사람으로 만들어 주던가요?
저는 그런 건 잘 몰라서요.
음.
사실은
모르고 싶어서요...
번쩍. 자리에서 깜빡 눈을 뜬 권순영은 일어남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제 존재가 세상에서 지워졌음을 깨달았다. 이제 아이돌 호시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검색해도 나오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 누구도 인간 권순영을 떠올리지 못할 것이다. 딱 김민규만 빼고. 두개골이 지끈대며 요란하게도 소리를 질렀다. 권순영은 손을 뻗어 애써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잘 이어지지 않는 생각을 이었다. 김민규에게 불친절하고도 일방적인 통보를 던진 것이 바로 어제였으니 오늘 오후는 분명 고잉 촬영이 있을 것이다. 김민규는 스케줄을 거를 위인은 아니었기에, 아마 오후가 되면 김민규 역시 기어이 제 존재가 완전히 지워졌음을 알게 되리라.
누구 하나라도 그걸 알게 하고 싶지 않아서 미리 지우려고 했던 건데.
아니, 애초에 김민규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됐는데.
그보다 더 예전이라면, 사실...
...
권순영은 머리를 흔들어 잡 생각을 쫓았다. 핸드폰을 켜보면 다행스럽게도 아직 완전한 존재 소거가 이루어지지는 않은 듯 연락처며 카톡 계정 정도가 남아 있었다. 아마 이것도 며칠 가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오늘 오후 쯤 진실을 알게 될 김민규의 연락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가 되면 김민규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가장 최악의 방법으로 체감하게 될 것이다. 어제 던졌던 형편없는 말들이 죄다 진실이라는 것. 권순영이 정말로 외계인이라는 것과, 이제 김민규만이 권순영을 알고 있다는 것. 덧붙여 권순영은 정말로 떠나게 될 거라는 것까지.
더 정확하게는 떠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들까지, 전부.
무슨 말을 해야할까. 권순영은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그 난관에 부닥쳤다. 이제와서 내가 너를 붙잡고 무얼 할 수 있다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전부 다 네 가슴을 할퀼 뿐이라는 건 너무나 자명한데. 권순영은 그래서 딱 두 가지의 결심을 했다. 하나는 최대한 의연하고 장난스럽게 굴 것. 김민규가 어이없어하면 좋고, 그래서 결국 질려하며 정을 떼려 군다면 더욱이 좋았다. 진지해지면 이 이야기는 끝도 없이 어두워질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김민규에게 사과하며 어떻게든 그의 기억을 지울 것을 약속하는 것.
권순영은 그 두 가지만을 아주 굳게 결심했다. 그게 만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도 상처입히지 않을 수 있는 하나 뿐인 방법이라고 단단히 믿었기 때문이다. 권순영은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다 싶이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너는 한다면 하는 존재이니까. 이번에도 할 수 있지. 해야지. 그렇지. 그래야지...
네가 다른 모습을 비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럼 안 되는 거잖아.
권순영은 핸드폰을 탁상에 엎었다. 김민규의 연락이 도착할 것으로 생각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이었다. 권순영은 기왕이면 아주, 아주 괜찮아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너무 늦지 않게 몸을 씻고 나갈 채비를 미리 해두기로 한다. 이 얘기는 아무래도 만나서 하게 될 것 같으니까. 그래야 김민규의 반응을 시시각각 살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러나 권순영은 몰랐다.
정확하게는, 덮어두고 모른 채 하려고 아주 용을 썼댔다.
김민규에게 권순영이 언제나 예측불허이듯... 김민규 역시도, 권순영을 한정해서 대단히 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아니,
사실은 무엇보다 잘 알고 있겠지만.
*
형, 나 이제 형 말 믿어. 기어이 그렇게 도착한 카톡을 받고선 권순영은 최대한 태연하게 그럼 애슐리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천연덕스러운 답을 보냈다. 애슐리 가고 싶었어. 너랑 꼭. 대충 그렇게 답을 보내자 김민규가 한참을 답하지 못하며 고민하는 것이 카톡창 너머로 뻔히 보였다. 십오분 쯤이 지나자 김민규는 별다른 코멘트 없이 애슐리 좌표 하나 만을 덜렁 보냈다. 제 오피스텔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고른 것이 뻔히 보여서, 얘의 머리 속도 참 복잡하긴 하겠구나 싶었다. 애진작 나설 준비를 마친 권순영은 제 양 볼을 짝짝 때리고는 성큼 길을 나섰다. 생각한 대로만. 결심한 대로만. 그 말을 주문이라도 되는 듯 또 외웠다.
애슐리에 도착해서 허허실실 군 것도 전부 그런 이유에서였다. 형 모자...까지 말하고 실수라도 한 듯 텁 입을 다무는 김민규의 말 끝을 잡아채 굳이 나 이제 일반인이야, 같은 농담의 형식을 빌린 말을 덧붙인 것도. 애슐리에 도착해서 접시 가득 맛있는 음식들을 담은 것도. 김민규의 접시 위에 랍스타 비슷한 요리를 한가득 올린 것도 전부 다 비슷한 맥락이었다. 김민규가 그냥 이 형은 정말 그냥 깊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싶게 만들고 싶었다. 권순영은 사실 김민규에게 한없이 가볍고 싶었다. 권순영까지 그 답도 없을 이야기를 붙잡고서 끝없이 가라앉으면, 남겨질 김민규는 정말 한없이 추락할 게 뻔했으니까. 권순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진실과 관련된 이야기는 숨길 작정이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이 일련의 사태가 어느 골 때리는 외계인의 아주 잠시뿐인 고향 나들이 정도로 남게 하고 싶었다. 되도 않는 헛소리를 섞어서라도 그 뭔 이상한 형이 그냥 가버렸대요. 끝. 정도로 상황을 마무리하고 그 이상의 감정을 나눌 수 없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고서 기억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박박 지워가야 했다.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매몰차고 정없고 실없이 구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들을 그리 만들 의무가 있었다.
권순영은 별로 구미가 당기지도 않던 김치투움바리조또를 최대한 헐렁하고 가벼운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잔뜩 먹어치웠다. 시끄러운 속 탓에 제대로 수저를 들지도 못하는 김민규에게서 애써 시선을 돌린 채 세 접시를 비운 권순영은 그제야 입을 떼었다. 단도직입적인 말이었다. 보다싶이 나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 같은 말은 죄다 생략한 채로, 민규야. 나한테 혹시 묻고 싶은 거 있어? 하고.
김민규는 그제야 간신히 입술을 달싹이며 성대를 긁었다. 김민규의 표정은 역시 좋지 않다. 그래서 권순영도 따라 표정을 지워내곤, 최대한 무던하게 웃는 얼굴을 표면에 걸었다.
형. 형이 돌아간다고 한 거...
그게 이렇게 다...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계속 같이 있었던 멤버들도 다. 정말 모조리.
형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의미였어?
그럼 권순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해야 한다. 망설이면 자간에 쓸데없는 감상만이 낄 뿐이다. 권순영 역시도 간신히 성대를 긁어, 그럼에도 또 역시 평소와 같은 말투를 흉내내어. 응. 그런 거야. 하고 김민규의 말을 받아쳐냈다.
내가 그렇게 했어.
그 말을 들은 김민규의 표정이 또 어땠더라. 권순영은 그냥 이 이상으로 그를 어디에도 남기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
Q. 형은 언제 지구에 온 거야?
A. 몰라, 기억 안 나. 암튼 돌도끼로 사냥하던 시절은 아니었을 걸. 너도 세 살 때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 못하잖아. 넘어가자.
아니다. 권순영은 자신이 언제쯤 지구에 왔는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이 정말로 돌도끼로 사냥하던 시절은 아니었기에, 그냥 적당히 그런 셈 치고 넘어가기로 했다. 적어도 권순영이 여기에서 보낸 시간은 김민규가 아는 것의 곱절의 곱절의 곱절보다도 많을 것이기에.
Q. 지구에는... 왜 온 거야?
A. 그냥 재밌을 거 같애서...라고 말하면 별로야? 근데 진짜야. 내가 쫌 심심한 거 못 견디는 거 알잖아. 내가 태어난 별은 진짜진짜 재미 없는 곳이었거든. 이래저래 떠돌아다니다가 여기까지 왔지, 뭐. 근데 살다보니까 여기가 젤 재밌어가지구. 지구가 야아, 도파민 천국이야. 알아? 인터넷이며 뭐... 아무튼 문명이 대박이라고.
이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권순영은 이제 고향별에 대한 기억이 아주 희미했으나, 하여간 남아있는 것들을 아무리 세고 세어도 재밌었던 기억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래저래 떠돌다가 결국 지구까지 온 것도, 살다보니 여기에 그냥저냥 적응해 버린 것도 얼추 맞기는 했다. 도파민 천국, 맞지. 대박적인 문명. 그것도 맞지. 외계에서 온 뭔 이상한 생명체가 기술을 논하는 게 참 우습기는 하겠지만.
Q. 가족들은 어쩌고?
A. 아마 다들 고향별에서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원래도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어서 걱정 하나도 안 하실 걸. 혹 하나 뗐다고 생각하시겠지. 혼자 냅둬도 알아서 잘 살 놈인 거 제일 잘 아실 거고.
이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권순영에게는 가족이 없다. 권순영은 나기를 천애 고아였기에 기억의 첫 시작 역시도 어느 보육원 안일 뿐이었다. 가족의 얼굴조차 몰랐다. 입양에 성공한 적도 없다. 아주 많은 이유들로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 생활을 했다. 그치만 아무튼 저를 버렸을 그 가족들은 알아서 잘 살고 있을 것 같긴 했으니까, 늘어놓은 말들이 아주 형편없는 거짓말은 아닌 셈이었다.
Q. 어쩌다 외계인이 아이돌까지 하게 된 거야.
A. 글게. 살다보니 그렇게 됐네. 근데 내가 아이돌 안 하기에는 쫌 재능이 아깝지 않냥.
이 대답은 권순영치고는 상당히 솔직한 대답이었다. 살다보니 정말로 그렇게 됐다는 말. 그러나 뒷 부분은 완전한 거짓이었다. 권순영은 스스로가 아이돌 안 하기에 아까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단 한 순간도 생각한 적 없다. 하여간 권순영은 일찍 태어난 빨 지구에 오래 산 빨로 찍어누르는 감이 없잖아 있었으니까. 춤이나 노래도 전부 그런 영역 중 하나일 뿐이었다. 너무 오래 전에 시작해버려서, 아무튼 평범한 인간의 곱절은 넘는 세월을 해보게 되었으니까. 거기에서 오는 단순한 숙련도의 차이 정도.
Q. 어어... 그래. 일단 형이 돌아가려고 하는 건 알겠고. 그럼 언제 돌아가야 해?
A. 그건 잘 모르겠어. 아마 너무 무더워지기 전에. 밤이 가장 짧아지기 전에. 아마 그 때가 되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을 거야. 너도, 나도.
이 말은 어렴풋이 웃으며 던진 말이었다. 원래 모든 동물은 자신의 끝을 직감한다. 그건 본능의 영역이다. 같은 맥락에서, 아마도 권순영은 제 끝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끝에 김민규를 없게 만들 작정인 건 분명했고.
Q. ...이해는 안 되지만, 아무튼. 그럼 이제 좀 진짜 묻고 싶었던 걸 물어볼게. 형은 왜 돌아가야 하는 거야?
A. ...그게. 좀 웃긴 이야긴데. 막차다.
그리고 결국 기어이 들려온 왜 돌아가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한참 전에 지어뒀던 적당한 거짓을 섞었다. 나 막차야. 그 말에 김민규의 행동이 부자연스럽게 멈추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당황스럽겠지. 그게 맞는 반응이었다. 김민규 나이대의 인간에게 무언가의 상실은 너무 멀리 있는 것들이니까. 권순영은 적당히 어깨를 으쓱거렸다.
......예?
김민규는 한참 뜸을 들이다 정말 어이없다는 듯 그렇게 되물었고, 권순영은 정말 친절히 지구의 예시를 하나 들어보기로 했다.
서울 지하철 언제가 막차더라. 열두 시? 그거 놓치면 아침 첫 차 타야 하잖아. 대충 그런 거야. 지구랑 내가 사는 별이랑, 왕복 우주선이 아주 자주 있지는 않거든. 이번이 막차 같은 거야. 이거 놓치면 좀 오래 기다려야 해. 그래서 그래. 막차랑 첫차 사이 간격 원래 쫌 길잖아. 그런 거지.
여기까지 대답을 들은 김민규는 어쩐지 말을 조금 고르는 기분이었다. 간을 보는 걸까. 아니면 이 대답이 충분하지 않은 걸까. 권순영의 생각에는 아마 후자의 쪽일 것 같았다. 권순영이 지금까지 김민규에게 늘어놓은 것들은 우습게도 순도 백 퍼센트의 거짓부렁은 아니었다. 권순영은 거짓말을 잘 하려면 거짓 사이사이에 적절한 진실을 섞어두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 진짜의 사소한 사실이 거짓을 더욱 그럴듯하게 포장한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었다.
그것이 제 눈을 피하지 않은채 담백하게 다시 물어오는 김민규에게 어느 정도 진실의 답을 돌려준 이유였다.
민규야. 만약 내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첫차가 너무너무 멀면. 남은 사람들은 어떻겠어. 세븐틴 군백기 이십년 되면 그거 다 니 탓인 거야. 이해했어?
돌아와서 다시 기억 돌리면 되지. 돌리는 걸 할 수 있으니까 지운 거야.
...남은 사람들이 너무 아플 거잖아. 군대 이 년도 인간한테는 긴데. 근데 나는 그거보다 짧을 리가 없으니까.
그래서 그랬어. 있잖아, 인간들은 생각보다 기다리는 걸 잘 못 해. 기다리는 건 되게... 생각보다 아파. 네가 안 기다려봐서 모르는 거지. 이 말은 정말로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권순영은 통 손재주도 재능도 없는 존재였기에, 언제나 망치고 부수고 지우는 것만 할 수 있었지 무언가를 제대로 예쁘게 되돌릴 줄은 하나도 몰랐다. 돌리는 걸 할 수 있으니 지웠다는 말은 그런 의미에서 통 글러먹은 거짓부렁이었다.
그렇지만 나머지는 사실 진실에 가까운 편이긴 했다. 첫차, 너무너무 멀지. 영영 없을 예정이니까. 그러니까 멀다는 말도 틀린 건 아니다. 남은 사람들이 너무 아플 거라는 말도 역시 틀리지 않았다. 군대 이 년도 인간에게는 정말로 너무 길다. 인간은 기다리는 걸 잘 하지 못한다. 기다린다는 건 스스로의 안에 쌓아둔 무언가를 갉아먹고 아껴먹고 빌빌대며 어떻게든 버티어내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것은 결국 아픈 부분을 외면하며 견디는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그래서 권순영은 그게 싫었다. 또한 권순영은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 기어이 일그러져버리는 시간을 너무나도 많이 겪어왔다. 남겨진 이는 결국 어느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너덜너덜해진 가슴을 쥐어잡고 어떻게든 억지로 버티어낸다는 것을, 실은 너무 잘 알았다.
권순영은 김민규가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권순영은, 사실 김민규가 아프게 하고 싶지 않다.
앞의 이런저런 말들을 전부 덜어내고 나면 결국에는 그렇게 명료한 한 줄의 답만 남는다. 그래서 권순영은 테이블로 시선을 떨구었다. 이제부터는 해야하는 말을 꺼내야 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덤덤하고 명료하게, 그렇게 해낼 거라는 믿음을 줄 수 있게. 그래서 별 것 아닌 해프닝인 것마냥 굴어버릴 수 있게.
네 기억도 지우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당황하고 놀랐지. 미안해. 사실 그 말을 제일 처음에 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너를 배려하지 못했다. 그치. 방법을 찾는 대로 어떻게든 해볼게.
권순영은 그렇게 말을 덧붙였고,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에게 물을 뿐이었다.
형.
그렇게까지 돌아가고 싶어?
권순영은 그 말에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김민규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 말에는 다행스럽게도 웃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정말 오래도록, 가슴에서 아주 닳아버리도록 먼저 곱씹어둔 말이었기 때문이다. 권순영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하고 말았다.
글쎄.
나는 원래 거기에 있어야 하게 만들어진 거잖아.
너무 오래 여행 와있을 순 없는 거야.
그냥 그게 전부야. 그렇게 말하며 권순영은 나 이제 파스타 먹을래, 하고 다리에서 툭 일어서고 말았다. 할 말은 끝났다. 해야하는 말들은, 얼추 던졌다.
권순영은 그렇게 김민규의 기억을 어떻게든 지워주겠노라고 김민규도 모르게 반쯤 약속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아마도.
*
권순영이 한 말을 김민규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권순영으로써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 만남을 마지막으로 서로 연락을 주고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먼저 연락할 염치는 도무지 없었으므로 굳이 무언가의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권순영의 하루는 그렇게 다시 가라앉았다. 정확하게는, 권순영이 처음에 생각했던 그 하루로 돌아왔다.
권순영은 부지런히 주변을 정리했다. 머지 않아 신분도 전부 사라질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지금 계약해둔 이 오피스텔도, 가지고 있는 통장 계좌도. 더 나아가서는 신분증까지도 전부 없어질 것이 뻔했다. 권순영은 무엇보다도 그 때의 대비를 우선 해둘 필요가 있었다. 없어질 땐 없어지더라도, 김민규는 어떻게 해줘야 했으니까.
우선 권순영은 의심받지 않을 정도 규모의 돈을 은행 이곳저곳을 다니며 긴 시간 동안 꾸준히 인출하였다. 계좌도 신분도 없어지고 나면 써먹을 수 있는 건 현금 뿐이다. 혹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현금은 최대한 넉넉하게 준비해둬야 했다. 권순영은 이제 에어비엔비나 하다 못해 적당히 괜찮은 모텔을 예약하는 것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신분증을 보지도 않을 정도로 구식에다 대충 굴러가는 모텔 한 켠에 매일매일 지폐를 바치며 꼬박 방구석에서 썩어가야 할 것이다. 그런 생활은 권순영은 몇 백년 전부터 꾸준히 해봤기 때문에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또한 권순영은 가지고 있는 짐들을 차근차근 정리하였다. 최대한 가지지 않은 채 남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던 것 같은데, 역설적으로도 그 시간 때문에 쌓여버린 물건들이 적지 않았다. 어차피 권순영의 존재가 지워지면 따라 없어질 것들이기에 권순영은 최대한 이것들을 효율적으로 정리하고자 했다. 최소한으로 갈아입을 옷가지 정도만 캐리어 하나에 가득 쑤셔박고는 나머지 짐들은 죄다 어디에 기부를 명목으로 던질까 싶었다. 제가 가지고 있으면 결국 사라질 테니까. 짐을 싸는 권순영은 겨울옷 따위는 당연히 챙기지 않았다. 그 계절을 맞이할 시간까지는 없으니까. 반팔이며 반바지를 캐리어 한 가득 밀어넣은 권순영은 만족스럽게 가방을 닫았다. 이제 멋을 부릴 일도 얼굴을 가릴 일도 없으니 그거 하난 편하다 싶었다.
생필품과 관련된 것은 굳이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위생과 관련된 것들은 그 때 그 때 새로 구비하면 되었고, 권순영은 먹는 것을 즐기지 않았으니까. 소멸에 가까워져서 좋은 점이 있다면 굳이 양질의 에너지를 섭취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였다. 애초에 입 안에 어떤 걸 밀어넣으나 동력이 돌아가는 효율이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 정말로 많이 평범해진 권순영의 신체는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음식 섭취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굳이 지구인 흉내를 억지로 내면서까지 음식의 쾌락을 즐길 이유는 없다는 거다. 권순영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여기까지 모든 것이 정리가 되자 권순영은 다시 김민규를 떠올렸다. 권순영의 작은 가방 하나가 오만원짜리로 꽉 차오를 때 쯤의 일이었다. 나머지는 이제 정말로 염두에 둘 것이 없었다. 이제는 김민규 하나만이 정말로 오롯한 걱정이자 문제이다. 지금부터의 권순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김민규의 기억을 완전히 소거해버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에 딱 적절한 방법 하나를 모르지는 않았다.
그 전에 이 방법을 쉬이 떠올리지 못한 것은 그 행위의 리스크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었다. 이제와 또 무엇을 잃겠냐만은, 권순영은 권순영 자신조차도 감히 짐작하지 못할 수많은 무언가로부터 길 잃게 될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김민규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없애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기자 권순영은 이제 망설이지 않기로 했다. 사실 권순영은 애슐리에서 김민규에게 기억을 지워주겠노라고 말하는 그 때부터 이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해오긴 했었다. 다만 정리를 어느 정도 마친 이제서야 그걸 행동에 옮길 여유가 생겼을 뿐이고.
권순영에게 김민규란 따지자면 과오이다. 애초에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을 결함이다. 권순영이 김민규에게 가지고 있는 생각은, 강박적인 책임과도 같다. 아주 완벽한 확신이다.
권순영은 이대로라면 지금의 김민규가 무엇을 떠안게 될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래서 김민규가 그런 전철을 밟게 할 수는 없었다.
권순영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각은 이미 한밤중이다. 그것을 준비하려면 꽤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건 김민규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떠올리는 것보다 몇 배로 중요했다.
*
그리고 권순영은 며칠에 걸쳐 그것의 레시피를 완성하였다.
그것의 완성품은 작은 유리병에 찰랑일 정도로 담기는 무색투명한 액체가 될 것이었다. 권순영은 이 정도면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하나로 이제는 정말로 전부 지워질 생각을 하니, 조금 우습기도 했고.
지워지고 난 뒤의 권순영은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은 미루기로 했다. 그리 중요한 고민은 아닐 것이다. 무슨 일이 난들 어차피 떠나야 할 존재를 걱정해서 무엇하겠나 싶었다. 그래서 권순영은 이제야 간신히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기분을 느꼈다. 드디어 원래 했어야 할 순리대로 흘러갈 수 있게 되겠구나 싶었다.
그럼 이제 전부 충분했다.
이제는 이번의 김민규도, 또한 그 어떠한 누구도 아프지 않을 것이다.
우습게도 바로 그 때 김민규에게서 연락이 왔다.
권순영 지금 뭐ㅎ 1
...실수로 삐끗해버린 그 과정이 아주 가득 담긴 채로.
*
권순영은 어떤 답을 할지 잠시 고민했었다. 민규야, 나 네 기억을 지울 방법을 드디어 찾았어. 그런 말을 다짜고짜 보내도 괜찮은 걸까. 잠깐 뜸을 들이던 권순영은 그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지는 레시피의 단계였으니까. 물론 권순영이 그것을 완성하는 일을 실패하는 경우의 수는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걸 완성하고서 말해도 아주 늦지는 않을 것이다. 어차피 일주일 내로 마무리 될 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려면 김민규의 협조 역시도 필요했기에 권순영은 그 얘기를 꺼내는 것은 김민규의 얼굴을 직접 대면하고서 하는 것으로 미루기로 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또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대게 되는 것이다. 뭐 한다고 대답하지. 솔직하게 말하는 건 확실히 문제였다. 나 세상에서 소멸할 준비 중? 그딴 건 농담 축에도 죽어도 못 끼었다. 그럼 선택지는 둘이었다. 또 거짓말을 늘어놓거나, 아니면 저번에 김민규를 만났을 때처럼 뻔뻔한 요구를 하거나. 잠시 고민하던 권순영은 결국 후자를 택했다. 민규야 나 있잖아.
정한이 형이랑 애들 밥 사주고 싶어.
그리고 그 때의 권순영은 정말로 깊은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제 지울 수 있어졌으니까, 괜찮아졌으니까. 같은 마음에 불쑥 튀어나온 분에 겨운 욕심일지도 몰랐다. 권순영은 그냥 일이 드디어 잘 풀리는 김에 또 제자리를 찾는 김에. 이제는 떠나게 될 멤버들에게 이름은 못 밝힐지라도 맛있는 것 한 끼 대접해볼까, 정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그게 딱히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그렇게 부탁했고, 김민규는 또 별 말 않고 자리를 턱 마련해 오기에 권순영은 어리석게도 그 과정이 별로 어렵지 않구나 여겼었다. 멤버들이 자리를 정리할 때 쯤에 맞춰 권순영은 결제를 하기 위해 식당의 카운터로 향했다. 긁은 카드에서 공교롭게도 사용할 수 없는 카드라는 나레이션이 흘러 나왔지만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 정도로만 가볍게 생각했다. 권순영은 그냥 품 안에서 이전에 준비해둔 현금 다발을 꺼내 툭 계산하고는 잔돈도 받지 않은채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권순영은 이 일련의 과정이 정말로, 정말로 나름대로의 작별 인사와 비슷한 수순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리고서 권순영은 남은 모든 시간을 그것을 완성하는 것에 모든 시간을 쏟았다. 일주일 쯤이 지나서야 무사히 완성된 그 액체를 손에 쥐고서, 권순영은 이제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다. 나름대로의 인사도 했고. 김민규의 문제 역시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럼 이제 정말로 모든 게 다 잘 된 셈이었다.
권순영의 생각은 정말 그게 다였다.
정말로.
정말로 어떠한 악의를 가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
김민규가 찾아오던 바로 그 순간의 권순영은, 비로소 완성된 액체를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김민규에게 언제 연락을 하는 것이 적절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우습게도 그 때 느낀 감정은 뿌듯함과도 조금 비슷한 듯 했다. 이제 다 잘 된 거 같아. 그치. 권순영의 생각은 딱 그 정도의 어린아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바꿔 말하면, 이 때의 권순영은 마음이며 생각이며 죄다 꽁꽁 덮어둔 채로 당최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단 거다. 권순영은 한 번 결론을 내면 작금의 이 상황이 최선이라고 미리 못 박아두고서 절대 재고할 생각을 않는 성향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권순영 역시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권순영이 김민규의 그 모든 행동과 감정들이 모두 제가 찰나의 실수로 김민규의 기억을 지우지 못함으로부터 비롯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권순영에게 그 시간들과 사건은 전부 애당초 존재했으면 안 됐을 실책 정도라는 거다. 상정되지 않은 일이 벌어졌으니 변수가 생겨버린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었다. 권순영은 그 일련의 사건을 딱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권순영의 아주아주 오랜 지구 생활에서 도출된 데이터 베이스에 기반한 결론이었다. 권순영은 이런 이별을 수도 없이 겪어보았고 그에 동반되는 인간의 부수적인 감정들을 너무 잘 알았고... 대충 그런 맥락이라는 거였다.
권순영이 지워지지 않으면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아파져야만 한다.
권순영이 사라지지 않으면, 또 누군가는 그 평생을 무수히 많은 짐을 떠안아야만 한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지는 굳이 그 대상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아도 자명하지 않은가.
그것들이 전부 애초부터 김민규가 권순영의 사라짐을 알아서는 안 되는 이유였고, 김민규가 권순영의 실종을 자각하기 전에 헛소리 코스프레를 하며 에둘러 자신의 정체를 밝힌 까닭이었으며, 또한 권순영이 상당히 큰 리스크를 짊어지면서까지 김민규의 자각을 죄다 지워버리려는 연유였다. 어차피 잊힐 걸 알면서도 여러 말들 사이에 거짓을 섞어가며 가타부타하지 않고 애매하게 구는 것도 어쩌면 비슷한 느낌이었다. 나름대로의... 가식? 노력? 연습? 권순영은 그 심리를 딱 그런 단어들로 정의했다.
하여튼 권순영에게 인간은 너무 어려웠다. 그 중에서도 김민규는 특히 더 어려웠다. 그래서 덮어놓고선 이렇게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그게 맞다고 딱 묶어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김민규의 이십 칠년 인생으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권순영의 아주아주 긴 지구 생활 기억을 바탕으로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어느 누가 미쳤다고 이런 상황에서 기꺼이 남기를 선택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권순영의 이 결론은, 웬일로 권순영 답지 않게 김민규의 의견을 묻지 않고서도 아주 완벽한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남은 생각들도 전부 여기서 끝. 권순영은 작은 유리병을 손 안에 꾹 쥐었다. 권순영은 가능만 하다면 당장 내일 김민규를 마지막으로 만나기로 마음 먹었다. 김민규를 마주하고서 아주 자랑스레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말해주고, 자신의 실수에 대해 김민규의 마음이 풀릴 때까지 실컷 사과를 하고. 그러고서 전부 빡빡 없던 일로 만들 셈이었다. 권순영은 그런 마음으로 여전히 손에 병을 쥔 채 핸드폰을 들었다.
근데 바로 그 순간에 현관문이 요란스레 두드려지는 것이었다. 누구도 자신을 찾을 일이 없는데, 몇 번이고 반복되는 노크 소리는 어쩐지 멎을 줄을 몰랐다. 아무래도 배달 주소 따위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권순영은 핸드폰을 내려놓은 채 후다닥 걸음을 옮겼다. 그 걸음이 닿을 끝자락에 죄다 닳아버린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아직 자각하지 못한 채였다.
그렇게 열린 문 너머로 권순영이 마주한 것은 아주 무너져버린 김민규였다.
...얘가 왜 여기 있어?
권순영은 표정을 관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곤 김민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김민규는 뛰어오기라도 한 것인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 잘난 얼굴 위로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있었고, 또 그 아래에 지어진 표정은... 정말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권순영은 순간 말을 잃었다. 김민규는 자신조차도 갈피를 죄다 잃어버린 낯을 하고 있었다. 김민규는 그런 얼굴을 하고서, 도무지 무슨 마음인지 모를 것으로 냅다 팔을 잡아당겨 권순영을 품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저보다 한 뼘은 넘게 클 몸에 권순영의 몸이 우겨 넣어졌다. 김민규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김민규는 마치 애틋하기라도 한 듯 평소보다 훨씬 거센 세기로 제 몸을 꽉 안고 있었다.
형.
왜 하필 나야?
그렇게 말하는 김민규의 목소리는 정말 아주 형편 없었다. 그 목소리를 듣고서야 권순영은 무언가 또 잘못되었음을 알았다. 잠깐 고민하던 권순영은, 결국 망설이던 손을 뻗어 오른손으로 김민규의 등을 얌전히 쓸어주었다.
민규야.
해돋이 보러 가자. 우리.
권순영은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김민규의 등을 다독여주지 않는 남은 손에는 방금 만들어진 그 약병이 아직도 꾹 쥐여져 있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었나보다. 권순영이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었나보다. 김민규의 마음은 권순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이 아팠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급히 뛰쳐와서 제게 왜 하필 자신이어야만 했냐고 책임을 묻고 싶은 것일 테고. 그래서 권순영은 그저 해가 뜨는 것을 보러 가자는 대답으로 말들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 결론을 짓기로 했다.
처음부터 내일까지 생각해서는 안 됐던 거였다.
김민규가 더 아파지기 전에, 권순영은 시급히 이 사안을 마무리 해야했다.
권순영은 해가 뜰 바로 거기에서 모든 매듭을 지어볼 생각이었다.
그래, 갈무리 하자.
거기에서 전부 네 기억을 지우자. 민규야.
이 이상으로 누군가가 슬퍼지기 전에.
*
남산도 하이브 사옥 옥상도 상관 없다는 제 말에도 김민규는 권순영을 조수석에 앉히고는 냅다 강릉을 향해 차를 몰기 시작했다. 이미 한참 늦은 시간, 까만 밤 아래의 도로를 달리면서 김민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곁눈질로 흘긋 본 김민규의 얼굴은 여전히 별다르지 않게 엉망진창이었으므로 권순영 역시도 구태여 철없는 소리를 늘어놓지는 않기로 결심한다. 얌전히 창 밖의 허공만을 바라보던 권순영은 어쩌다 김민규가 이렇게 무너진 얼굴을 하고서 자신을 찾아와야 했는지를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딱 하나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었다. 김민규에게 다짜고짜 정한과 멤버들의 밥을 사고 싶다고 한 날. 아마 김민규든, 혹은 다른 멤버들이든 어느 익명의 캐럿이 거액의 현금으로 냅다 정기모임을 결제했다는 사실을 전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랬다면 권순영은 지금 김민규의 반응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그 자리를 만드는 것이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던 모양이었다. 김민규는 그걸 계기로 권순영이 이제 카드도 쓸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신원조차 죄다 지워졌음도 알아버린 모양이었고, 거기에 덧붙여 멤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 보낼 수록 제 부재를 더욱 체감할 수밖에 없었을 테고.
아무래도 권순영의 생각이 짧았던 모양이다. 아니, 짧은 것이 맞았다. 괜히 불쑥 떠오른 옛정 비슷한 마음과 인사 따위의 명분으로 김민규를 자극해서는 안 됐는데. 어떻게 보면 제 아둔한 행동이 김민규를 무너뜨릴 아주 큰 스노우볼을 굴린 것일지도 몰랐다. 바닷가가 슬금슬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자 권순영은 다시 한 번 김민규의 눈치를 보았다. 여전히 영 굳은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보자 권순영은 이제 슬슬 확신할 수 있었다. 권순영이 더 빨리 이걸 준비했어야 했다고.
권순영은 땀에 젖은 손으로 손바닥 안의 약병을 슬슬 굴렸다. 권순영은 결국 김민규가 권순영을 곱씹을 너무 많은 시간을 줘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대고 김민규가 제 부재를 체감할 수밖에 없는 일들만 쏙쏙 골라서 했고. 그래서 권순영은, 바닷가에 나란히 앉아 제 어깨 위로 김민규가 담요를 둘러주는 그 순간에도 김민규에게 무슨 마지막 말들을 남겨야 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당연히 잊힐 말들이지만. 따지자면 이제 진짜 정말 마지막인데. 이런 마지막을 만들어버린 것에 대한 사죄로라도, 또 다정을 타고난 김민규가 또 행여나 다른 생각을 하게 될까 싶어서라도 꼭 최대한 다정한 말들을 골라내야 할 것만 같았다.
김민규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이제 해는 일렁이며 곧 뜰 것만 같이 굴고 있었다. 권순영은 정말 오랜 한참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기억을 지우자는 말을 꺼내기 전에 할 수 있는 말은 죄다 추상적인 종류의 것들 뿐이었다. 전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권순영만이 안고 가야하는 진실을 걸러내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런 전철도 없이 다짜고짜 김민규의 기억만의 지워내기에는,
사실 권순영은 김민규와 너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야 말았다.
그래서 권순영은 최대한 말을 골랐다. 가지고 있는 말들 중에서도 극히 일부만을 겨우 뱉어냈다.
민규야. 있잖아.
별 말이야. 해가 뜬다고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냥 태양이 너무너무 밝아서 보이지 않는 거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사실 빛을 쏘고 있잖아.
나도 그런 거 같애.
권순영은 그런 말들을 뱉어내는 제 표정이 최대한 담담할 수 있도록 제법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김민규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가만히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래서 권순영은 조금 더 용기를 내서 나머지 말들을 뱉을 수 있었다. 나도 아마 어디에서든 빛을 쏘아 올리고 있을 거야. 어디에 있든. 계속해서, 닿을지 모르는 지구로 끝없이. 그냥 단지.
네가 태양인 거야.
그 말들은 사실 권순영이 처음 김민규를 봤을 때부터 아주 오랫동안 곱씹고 있던 것들이었다. 김민규는 정말로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언젠가의 김민규는 오히려 나를 더러 별을 닮았다며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는 것이 참 비슷한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었지만, 권순영이 만약 정말로 빛을 만들어낸다 하더라도 그건 절대 김민규에 비할 바는 되지 못할 것이었다. 권순영이 쏘는 빛은 너무나 미약해서 김민규에게는 결코 닿을 수 없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순영이 김민규에게 빛을 보내지 않는 일도 없다. 권순영은 그런 의미를 적당히 담아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지워질 나에게 마음 쓰지 말라고. 네게 닿지 못하더라도 아무튼 나는 그럭저럭 언저리에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나는 이 그대로 괜찮을 거라고. 대충 그 비슷한 맥락의 분위기를 담아서.
그제야 권순영은 고개를 조금 돌려 김민규를 마주볼 수 있었다. 미안해. 그 세 글자는 권순영의 아주 오래도록 닿은 진심이었다. 그 말을 뱉어내는 권순영의 목소리는, 다행스럽게 권순영의 귀에도 퍽 사근사근하게 들렸다. 김민규의 짙은 눈동자가 제 동공에 닿았다. 김민규의 눈은 하여튼 또 김민규를 닮아서, 그 시선 역시도 언제나 짙고 뜨겁기만 했다. 가득해서 절대 시리지 않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권순영은 다시 고개를 돌려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 마법이 너한테만 통하질 않았나봐.
버겁지. 권순영은 그 뒤로 토해내듯 한가득 말을 쏟아냈다. 몇 번을 사과해도 부족할 미안함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네가 이런 기분을 알게 하면 안 됐는데. 사실, 아무도 그런 기분을 몰랐으면 해서 죄다 지우려고 했던 거였는데. 힘들지. 나 사실 기억을 지울 방법을 찾았어. 내일 얘기하려고 했는데, 널 보니까 지금 바로 기억을 지우는 게 좋을 거 같애. 내가... 너를 너무 힘들게 만들어버렸네. 김민규가 이런 말에 대답하는 성격이 아니란 걸 알아서, 권순영은 여전히 빠른 템포로 담아왔던 문장들을 이어나갔다.
지우는 데에 오래는 안 걸릴 거야. 그러고 나면 또 괜찮을 거야. 전부 다 지우는 거니까. 있지, 너도 봐서 알겠지만 잊는다는 건 사실 잊었다는 사실조차도 까먹어버리게 만드는 거거든. 그래서 이번은 정말로 다를 거야. 이제는 정말로 하나도 안 아프게 될 거야. 그러니까...
사실 정말 많이 고마웠어 민규야
이제 전부 지우자
권순영은 딱 그렇게 김민규에게 얘기할 참이었는데. 김민규가 형, 하고 부르며 말을 뚝 끊었다. 순영이 형. 나 좀 봐봐. 하고 오히려 다른 말을 붙여왔다. 왜? 권순영은 그렇게 되물으려다, 한참을 망설이면서 간신히 다시 김민규에게로 시선을 떨궜다. 이제 진짜 거의 다 왔는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득 제게로 와 닿는 김민규의 시선이 너무 더웠다. 이제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는 태양보다도 곱절은 뜨거웠다. 김민규의 그 눈동자가 너무나 단단했다. 지극히 견고하게, 또 집요하게 자신을 바라보아서. 권순영은 홀린 듯 불가항력적으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없었다. 둘의 시선이 기어이 얽히는 바로 그 때. 그 순간에 김민규는 말을 뱉어내었다.
형.
내 기억 지우지 마.
하고.
*
그게 무슨 말이야? 그렇게 되물었어야 했는데. 김민규가 그 뒤로 잇는 말들은 하나도 막힘이 없었다. 가슴에 콕 박혀있던 말인 마냥 술술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형. 형은 기다리는 것이 아플 걸 알아서 그랬다고 했잖아. 형이 하나하나 직접, 그리고 전부 지웠다고 했잖아. 나만 지워지지 못한 거라고 했잖아. 그게 너무 미안하다고. 그래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고.
형이 방법 찾은 건 알겠는데, 그래도 그러지 마.
나는 그냥 여기에 이렇게 남겨줘.
그 말에 권순영은 잘 떼지지도 않는 입을 버끔거리려고 했다. 아니야, 민규야. 하고 말하려고 했다. 너 남는 거 잘 모르잖아. 그게 어떤 느낌인지, 이번에는 또 안 해봤잖아. 형이 그거 되게 많이 봤었다? 그리고 형도 되게 많이 해봤다? 근데 그거 진짜 너무,
너무너무 아파.
권순영은 그래서 다른 말은 차마 다 못하더라도 그것만큼은 절대 안 된다고 단호히 말할 작정이었다. 근데 김민규는 아주 확신에 차서는 자꾸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갈피가 되잖아. 내가, 형이 다시 여기로 돌아올 이유가 되잖아. 다시 오고 싶을 때 길을 찾을 방향이 되잖아.
순영이 형.
형은 남아서 기다리게 될 내 마음을 생각하겠지만.
그러니까 나는 우리를 기어이 떠나야 할 형의 마음을 헤아려야지.
그런 김민규의 문장에 권순영의 말문은 그야말로 턱 막혀버렸다. 김민규는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건지 제대로 자각은 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내 말의 어느 부분이 저 아이가 이렇게나 허튼 결심을 하게 만들었을까. 온갖 생각들로 머리가 삽시간에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나 김민규는 갈수록 확신에 차서는, 이게 정말로 김민규의 온전한 해답인 것처럼... 점점 더 뚜렷한 목소리를 하고서. 남겨진다는 건 사실 일방적인 게 아니라고, 누군가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라고. 근데 그럼 그 떠난 누구는 또 어떤 누군가가 생각해주는 거냐고. 나까지 없으면,
형이 여기에 있었다는 건
무엇도 증명할 수 없지 않냐고.
그래서 나는 그게 싫다고.
김민규는 권순영에게 그런 말들을 돌려주었다.
권순영은 사실 그 뒤의 말들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조차 못했다. 대충 김민규 역시도 서툴고 불안한 마음에 그랬다는 느낌의 말들이었던 거 같긴 한데. 이미 앞선 말들로 권순영의 머리가 아주 요란스러워져 있었던 탓에 그걸 제대로 인지할 수는 없었다. 김민규가 아주 천천히, 그리고 또 사근사근. 그렇게 확신에 가득 차올라서 말하는 동안 권순영은 필연적으로 정말 수백가지의 기억을 곱씹으며 다 뱉어낼 수 없을 생각들을 했다.
민규야.
너 지금 네가 하는 그 말들이 무슨 의미인지는 아니.
너 정말로, 죄다 지워지고 남지 않을 나를 기다리겠다고 하는 거니.
그게 무슨 무게인지는 알고서 나의 표식이 되겠다고 하는 거니. 그걸 전부 알고서 감히 내 마음을 넘겨짚는 거니. 권순영은 금방이라도 토할 듯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건 정말로 안 될 말이었다. 정말로, 정말로 안 될 일이었다. 목구멍 너머로 게워내기에는 너무 많은 기억들이 넘실거렸다.
너 아직 삼십년도 안 살았어. 채 삼십년도 안 되는 시간이면 너에게는 살아온 것의 두 배는 되는 시간들이 남아있을 텐데. 네가 살아보낸 시간 중에서 절반도 되지 않는 나 하나를 위해서 네 남은 인생을 전부 태우겠다고. 그 십 년 동안 보아온 내가 아주 멋있고 대단한 존재였을지라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텐데. 하물며 우리는 잘 맞지도 않았잖아. 잘 맞지 않도록 내가 엉망으로 굴어왔잖아.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달랐지. 너는 내 무모한 행동에 쉽게 토라지기 바빴지. 그 모든 시간의 어디가 그렇게 예뻐서.
감히 날 떠안겠다고 하는 거니.
기다린다는 건. 네가 감히 나의 부표가 된다는 건.
그건 네 가슴을 아주 갈가리 찢고 난도질하다가도 택도 없는 희망으로 억지로 다시 붙이는 과정을 반복하는 일이야. 아주 곤죽이 된 조각을 하나하나 고집스럽게 모아서, 진짜 티끌만한 찌꺼기를 어떻게든 긁어모아선 최대한 멀쩡해 보이도록 예쁘게 포장을 하는 일이야. 그러고 나면 너는 네 손으로 그걸 다시 찢어 발겨야 해. 그걸 일평생을 반복하는 거야. 일 평생을. 너의 남은 모든 생을...
...나 너 아픈 거 싫어서 이러는 거잖아. 응?
내가 수도 없이 해봐서 안다잖아. 너무 잘 안다잖아. 그거 진짜 죽도록 비참하고 칼에 찔리는 것보다 더 아프다고 지금 말하고 싶어하는 거잖아. 네가 지금 하려는 게 또 끝없는 가시밭길이 될거라는 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근데 차마 그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스러워서. 그래서 그냥 그렇게 되기 전에 전부 다 지우려고 하는 거잖아. 어떻게 그게 너의 정답이 아닐 수가 있어. 정답이어야지. 너는 마땅히 그게 정답이어야지. 그게 가장 뻔한 해답이고, 그게 세계의 이치대로 흘러가는 길이고. 무엇보다도 그게 너에게 가장 좋을 결말이잖아. 그래야 하는 거잖아.
민규야.
내가 너에게 권순영은 이제 영영 소멸하는 거라는 말까지 뱉어내야 정말로 그 마음을 접을 작정인거니.
아마도 아주 오랫동안 쌓여왔을 그 말들에 권순영의 심장은 이제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어지러웠다. 마음이 죄다 울렁거렸다. 김민규의 시선이 너무 더웠다. 김민규가 뱉어내는 다정이 데일 것 같이 뜨거웠다. 김민규가 권순영을 잊지 않았을 때에 견뎌내게 될 것들은 권순영만이 잘 알고 있을 뿐, 김민규는 거의 아무 것도 모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았다. 근데 김민규는 자기가 짊어지겠다는 게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이만 굴었다. 그리고 김민규의 말과 행동은, 덧붙여 시선까지도. 김민규의 모든 게 그걸 진짜로 다 해낼 수 있을 것마냥 올곧기만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건 분명히 진짜 너무 아픈 일들인데. 겪어봐서 아는 것들인데. 나는 그게 사실은 너무 쓰렸어서, 그래서 자꾸만 너 역시도 그걸
몰랐으면 하고...
그러니까, 나는 사실 그걸 이겨내지 못하고 무너진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너도 만약 나처럼 될까봐 그 하나가 실은
무서운 건데
권순영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니까 결국은 아니라고 해야했다. 단호하게 거절해야 했다. 김민규가 싫다고 해도, 억지로 약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죄다 지워내야 했다. 권순영이 무슨 리스크를 짊어지게 되더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다. 권순영은 어거지로 성대를 긁었다. 하지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제대로 만들어지지도 못한 채 그대로 꿀꺽 삼켜졌다. 김민규가 말을 마무리 짓는 탓에.
형 있잖아.
형이 아무리 떠나는 사람이라고 해도...
어떻게 스스로가 누구에게도 증명할 수 없는 뭔가가 되어도 될 수 있겠어.
그렇게 말하며 김민규는 똑똑히 웃어보이기나 했다. 권순영은 정말이지 김민규에게 쏟아낼 수 있는 말들이 아주 많았다. 하다못해 김민규를 말리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들 역시 수없이 많았다. 권순영에게는 김민규의 곱절의 곱절의 곱절보다도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가 있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그런 선택을 할 김민규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될지 몹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들은 정말 셀 수 없게 존재했다. 그래서 권순영은 이걸 비워내기 위해서 뭐든 다 할 수 있었다. 그걸 다 알아서 스스로 이 약을 만들었고, 자신을 지우는 것을 끊임없이 택해왔다. 뭐든 다 해내이고 싶어서.
근데 민규야
너는 내게 잊지 않겠다고 또 그리 말하네.
감히 내 마음을 다시 짐작을 하네, 네 다정으로.
형 그게 어떻게 괜찮을 수 있는 건데요, 하고 나한테 되물으면서...
김민규는 이제 아주 떼를 쓰듯이 말하면서도, 또 그 상냥한 말투는 버리지 못한 채 연신 권순영에게 물어보기만 했다. 그러니까 지우지 마, 응? 지우지 말자. 말아주라. 김민규가 그런 말을 하는 새에 결국 해는 완전하게 떠올라 버렸다. 선명하게 맑아진 햇빛이 김민규에게 내려 앉았다. 태양이다. 이건, 하나의 별에 불과한 권순영은 실로 탐할 수도 없는 강렬한 빛이다. 권순영은 그제야 그 모든 생각들을 하면서도 제가 김민규에게서 단 한 번도 시선을 떼지 못했음을 자각할 수 있었다.
김민규는 아마 평생을 모르겠지만, 바로 그 순간 김민규는 사실 또 한 번 권순영에게 쐐기를 박아버렸다.
흔히 불가항력이라고 부르는.
권순영이 휩쓸려 사라져버릴 세계의 법칙보다도 더욱 강하고 위대한, 그런 이끌림으로.
권순영은 그래서 거스를 수 없다. 김민규도 아마 그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김민규는 가만히 손을 뻗어 권순영의 작은 머리통을 제 어깨 위로 기대게 했다. 형. 해돋이 예쁘다, 그치. 되게 오랜만에 보네. 형이랑 둘이서는. 권순영은 결국 한참 뒤에야 조용히 대꾸할 수 있었다. 그러게. 예쁘네.
...정말 예쁘다.
민규야. 너는 어떻게 매번 나에게 이래.
권순영은 덧붙이고 싶은 벅찬 이름 석 자를 간신히 삼켜내었다.
*
그 뒤의 일들은 정말 빠르게 진행되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권순영은 어느새 김민규가 계약한 오피스텔에 바리바리 싸두었던 짐을 풀고 있었고, 김민규가 계약해준 핸드폰을 쓰고 김민규의 계정으로 넷플릭스를 보며 김민규의 카드로 저녁을 배달해 먹고 있었다. 이게 뭐지. 진짜 이게 맞나. 정말로 이래도 돼? 권순영은 그 때까지도 여즉 갈팡질팡하는 마음에 한참 헤매고 있었다. 진짜 얘한테 이렇게 다 기대도 되는 거야? 정말로? 근데 쟤가 먼저 전부 다 책임질 것처럼 굴었잖아. 그래도 나중의 김민규는 어떡하고? 쟤가 그러고 싶다잖아... 오락가락 하는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탓에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괜한 불만이 늘었고,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에게조차 자꾸만 능청스레 굴기 바빴다. 너 무슨 돈으로 이런 오피스텔을 그냥 냉큼 계약했냐. 음... 형이랑 같이 번 돈? 난 하나도 안 아까운데. 그렇게 말하던 김민규는 결국 권순영에게 손등을 얻어 맞았다. 나 공기계 있는데 무슨 새 폰을 또 사왔어. 그렇게 말하는 권순영에게 걍 새거 써~ 하고 능글맞게 굴던 김민규는 또 한 번 권순영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내야만 했다. 그런 권순영의 반응이 미울 법도 한데, 김민규는 권순영이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권순영의 주변에서 서성거릴 뿐이었다. 자꾸만 그 큰 몸을 여기저기에 붙여왔다. 김민규가 내민 김민규의 투폰에는 오로지 김민규의 번호만 저장되어 있었다. 권순영은 사실 그 때에 가슴이 다시 조금 울렁거리는 기분이긴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동거 아닌 동거를 시작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돌 민규의 삶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 아주 일반인이 된 권순영과 다르게 십 년차에 톱을 찍은 인기 아이돌의 멤버는 촬영이며 컴백 준비며 화보 따위의 일정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야만 했다. 근데 그러는 와중에도 김민규는 권순영에게 쉴새없이 연락을 남겼다. 몇 시간 핸드폰에서 눈을 떼고 있으면 두 자리 수로 연락이 쌓일 정도로, 김민규는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권순영에게 쏟아냈다. 얘 짬 날 때마다 죄다 나한테 연락하는 거 같은데. 그래서 권순영의 그 의심은 아주 합리적이었으며, 그리고 실제로 사실이기까지 했다.
김민규가 제게 보내오는 연락은 다양했다. 촬영 컨텐츠를 실시간으로 중계해주기도 했고, 스틸컷과 함께 화보 후기를 한가득 써보내기도 했다. 멤버들 사이에 생기는 사소한 에피소드며 실없는 이야기들도 빼먹지 않고 늘어놓았다. 가끔은 위버스에도 올리지 않은 미공개 셀카를 굳이굳이 보내주기도 했다. 나... 보여주려고 찍은 건 아니겠지. 권순영은 아무튼 그 가능성 하나만큼은 부정하기로 했다.
김민규가 다양한 연락을 보내왔기 때문에, 권순영 역시도 다양한 반응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이쪽으로 기울 때면 좀 단답을 했다가도, 아주 그냥 저쪽으로 가버리면 저 역시도 꾸물꾸물 핸드폰을 들어 방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또 마음이 다시 헷갈릴 때에면 정말로 질색을 하며 괜히 성질을 좀 부릴 때도 있었다. 아무튼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의 반응을 죄다 괜찮아했다. 아니, 괜찮아했다는 말보다 조금 더 상위의 개념으로 보일 정도로... 어쨌거나 김민규는 권순영에게 한결같이 다정했다는 뜻이다. 너 남들한테도 이러면 착각해. 권순영은 그 말을 대화창에 썼다가 지웠다. 겠냐고. 그거보다 얘가 뭘 하든 말든 내가 무슨 상관. 보냈으면 진짜 삼 주는 놀림받았을 게 뻔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결국 알음알음 권순영에게도 쌓였다. 그것들은 자꾸만 권순영의 마음을 편한 쪽으로 기울게 만들었다. 김민규를 좀 믿어보고 싶게 만들었다. 사실 믿는다는 말보다도 의지하고 싶게 만들었다는 쪽이 더 맞을지도 몰랐다. 권순영이 김민규를 신뢰하지 않은 적은 아무튼 없었으니까. 권순영은 김민규가 바삐 컴백 준비를 하는 동안 무언가의 생각으로 홀린 듯 우쿨렐레 하나를 주문했다가, 그게 집에 도착하자마자 깜짝 놀라 상자도 뜯지 않은 채 침대 아래에 쑤셔박아버리기도 했다. 이게 무슨 주책이야.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러다가도 또 며칠이 지나면 다시 마음이 다른 이유로 불편해졌다. 종종 편하지 않은 그 마음은 결국 권순영이 우쿨렐레 연주 영상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생각나는 게 사실 있기는 한데, 정말 그래도 되나. 모르겠다. 한참 영상을 들여다 보던 권순영은 핸드폰을 그냥 턱 엎어버렸다. 그래도 책을 읽는 것 정도는 김민규가 알아도 괜찮을 것 같아서 권순영은 종종 김민규에게 제가 밑줄을 쳐 둔 책의 사진을 찍어 보내기도 했다. 그 구절들이 사실 권순영이 십 분 넘게 고민해서 고른 구절이었다는 건 아마 김민규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결국 머지 않은 미래의 권순영은 침대 아래의 우쿨렐레 상자를 열어버렸다. 튜닝을 하고서 손가락으로 몇 번 건드려보다 질색을 하며 다시 쑥 밀어넣어버리긴 했지만. 아마 내일이나 내일 모레의 권순영은 김민규가 스케줄을 하는 동안 그걸 슬슬 뚱땅거리고 있을 게 뻔했다.
몇 번 튕기던 우쿨렐레를 다시 침대 밑으로 숨긴 권순영은 그대로 침대 귀퉁이에 걸터 앉았다. 요새의 김민규는 부쩍 더 바빠 보였다. 컴백이 목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권순영은 으레 자신이 겪었던 컴백 스케줄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다가, 문득 항상 굵직한 컴백 전에는 짧게라도 소속사에서 휴가를 줬음을 떠올렸다. 그럼 민규도 곧 휴가 받겠네. 또 뭐하자고 하려나. 아님 내가 뭐를 좀 하자고 준비해야 하나. 거기까지 생각한 권순영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으, 내가 걔한테 뭘 또 하자고 그래. 무슨 염치로... 그렇게 생각한 권순영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뭐 하자고 하는 건 좀 그렇고, 앞으로 더욱 바빠질 테니 소소한 것쯤은 하나 준비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도 정 마음이 불편하면 김민규가 준 오피스텔과 핸드폰과 각종 오티티 계정과 신용카드들의 핑계를 대 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쿠당탕.
권순영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무너졌다.
아, 맞네. 나 곧 죽는 사람이지.
권순영은 김민규의 다정에 그만 그걸 깜빡해버리고 말았다.
*
권순영이 다시 멀쩡히 걸을 수 있게 되는 데에는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꼴사납게 엎어진 권순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코에서 코피를 줄줄 쏟아내기 시작했다. 어지러운 감각에 권순영은 애써 눈을 꾹 감고는 콧대를 손으로 눌렀다. 손에도 영 힘이 들어가지 않을 모양인지, 통 압박이 제대로 되지를 않아 권순영은 한참동안 코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권순영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겨누어지는 몸을 억지로 이끌고 일어날 수 있었다. 권순영은 일어나자마자 바닥에 흩어진 핏자국을 닦고 코피가 묻은 옷을 벗어 세탁기에 넣었다. 딱 새 잠옷으로 갈아입는 그 순간에 김민규가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 왔다. 형 나 왔어. 근데 왜 오늘 내 연락 안 봄.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순간에도 와르르 쏟아지는 말에 권순영은 뭐 하느라 좀 바빴어. 하는 대꾸로 일축할 뿐이었다.
원래의 권순영은 꼴에 외계인이라고 꽤나 출중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서의 출중하다는 것은 평범한 인간의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니까 아마 권순영이 정말로 돌도끼로 사냥하던 시대에 떨어졌다면, 맨주먹 하나로도 어렵지 않게 세상을 평정할 수 있었겠지... 만. 지금의 권순영은 사정이 아득히 달랐다. 권순영은 고향별을 정말 너무나도 오래 떠나 있었다. 가질 향수병 따위는 당연히 없었지만, 그런 긴 시간의 여파로 몸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권순영의 몸은 자꾸만 약해지고 약해지고 약해져서 지금의 김민규와 같이 연습생 생활을 할 때 즈음에는 평범한 성인 남성의 수준 쯤이 되어 있었고, 그리고 또 당장의 권순영은 툭하면 아무 이유 없이 코피를 쏟아내고 바닥에 풀썩 쓰러질 정도로 병약해지기까지 했다. 확실히 내가 곧 가야하긴 하나보다. 권순영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생각했지만,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바로 며칠 뒤가 김민규의 휴가라는 것이었다. 권순영의 몸은 가까스로 평범한 수준을 유지하다가 삽시간에 마음대로 나빠지기를 반복했다. 지금이 바로 그 나빠지는 주기였고. 그에 반해 김민규는 벌써부터 어디를 가면 좋을지 무엇을 하면 재미있을지 늘어 놓기 바빴다. 그렇다는 건, 권순영이 김민규의 계획에 적극 동참했다가는 기어이 김민규 앞에서 가녀린 주인공마냥 쓰러지는 클리셰를 피할 수는 없을 거란 뜻이었다. 음. 망했군. 권순영은 작금의 상태를 그 세 글자로 줄여버린다.
그러니까 그게 권순영이 김민규의 제안을 죄다 퇴짜 놓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였다. 김민규는 바다며 산이며 캠핑이며 오만 제안을 한가득 했지만, 권순영은 갖가지 핑계를 대어가며 그걸 쏙쏙 피해갔다. 너 오래 운전하면 피곤해서 안 돼. 너 사람 많은 데 가면 다들 알아봐서 안 돼. 네가 너무 고생해서 안 돼. 기어이 권순영이 너 멀미하지 않았나? 아니면 말고. 근데 이번에 할 수도 있잖아... 라고 답했을 때쯤이 되자 김민규 역시도 결국 포기한 듯 보였다.
그러나 댓발 나온 김민규의 입은 너무나 티가 나는 것이었다. 권순영은 그래도 나름 미안한 마음에 최선을 다해 이런 저런 제안을 해보았다. 뀨야, 우리 영화나 볼까. 우리 이거 시켜먹을까. 영화를 보자는 말에 김민규는 비쭉 나온 입으로 형 그럼 나랑 같이 심야 영화... 까지 얘기했고, 권순영은 넷플릭스를 두둥하고 트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결과적으로 김민규의 입은 두 배가 나와버린 셈이었다. 권순영은 도무지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자꾸만 지끈거리며 흐트러지는 시야가 이유의 반, 그리고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축 쳐진 거대 댕댕이 티를 숨기지 못하는 바로 옆의 김민규가 나머지 반절의 이유였다. 권순영은 영화 내용의 단 한 줄도 기억해낼 수 없었기 때문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마자 미련없이 바로 화면을 뚝 껐다. 씻고 얼른 자자, 민규야. 김민규는 그냥 웅... 하고 대답하며 터덜터덜 화장실로 향했다. 그 때 권순영은 내심 속으로 빌었다. 제발 내일은 좀 그럭저럭이라도 멀쩡하게 해주세요. 쟤 삐치면 진짜 오래 간단 말이야.
권순영이 다음 날 눈을 뜬 것은 아침 열 시였다. 권순영은 번쩍 눈을 뜨자마자 몸 상태부터 확인했다. 주먹 펴고 쥐기, 이상 없음. 시야, 이상 없음. 걷기, 이상 없음. 상태를 보아하니 대충 오늘 밤까지는 괜찮을 것 같음. 오케이.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자 권순영은 벌떡 침대 아래로 성큼 발을 내디뎠다. 원체 잠이 많은 김민규는 구태여 깨우지 않으면 아마 늦은 점심까지도 내리 쿨쿨 잘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권순영은 시무룩한 마음을 달래도 볼 겸 김민규를 위해서 요리라도 해 볼 참이었다. 물론 제대로 요리를 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원래 다 정성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침 댓나절부터 인덕션 앞에서 끙끙댔을 노력을 감안해서라도 김민규가 좀 덜 시무룩해지지 않을까. 그러고 김민규 마음이 조금 풀리면... 내 몸이 괜찮은 것 같으면.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을 딱 하나만 욕심내보자. 권순영은 대충 그런 마음이었다.
요리 재료는 전적으로 배달에 맡겼다. 요새는 식자재도 배달이 된다는 걸 권순영은 얼마 전에야 처음 알았다. 완제품을 주문해서 그릇만 바꾸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권순영은 유튜브에서 본 김치찌개 레시피를 참고하여 식재료를 주문하였다. 물론 계량은 제맘대로였다. 김민규가 고기 좋아하니까 고기는 두 배. 내가 김치 좋아하니까 김치도 두 배. 김치찌개에 고기랑 김치 많으면 대충 된 거 아닌가. 두부는 덤이고. 권순영은 정말 딱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밥은 햇반을 돌렸다. 권순영이 뭐 얼마나 대단하게 쌀을 씻어서 적정량의 물을 부어 안칠 수 있을까 싶어서. 김치찌개 레시피는 전적으로 백종원 선생님께 의지했다. 그러니까 뭐... 고기를 썰어? 고춧가루 두 스푼? ...근데 무슨 숟가락으로? 백종원 선생님도 언제나 만능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도 삼십분이 지나자 썰었다기 보다는 난도질한 쪽에 가까운 고기가 섞인 재료와 물의 혼합물이 그럭저럭 끓어가기 시작했다. 권순영은 저게 좀 그럴듯한 모양새를 갖추는 동안 밥 위에 계란후라이라도 얹어볼 생각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 계란을 굽는 것은 두 번째 시도만에 성공했다. 권순영은 자연스럽게 예쁘게 구워진 반숙란을 김민규의 몫으로 두었다. 냉장고에서 찬을 꺼내 식탁 위에 놓고 그릇에 옮겨담은 밥과 수저를 차리자 생각보다는 멀쩡해 보이는 한 상이 만들어졌다. 먹고 죽지는 않겠다. 권순영이 그런 생각을 할 때 쯤에는 드디어 그놈의 김치찌개만이 남았을 때였다. 권순영은 조금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숟가락으로 국물을 슬쩍 떠먹어 보았다. 음.
이게 무슨 맛이지.
아니 그 맛없다는 게 아니라...
...진짜 이게 무슨 맛이지?
권순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세 스푼을 연신 떠먹어보고는 한참 입을 짭짭대 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맛도 나지를 않았다. 느껴지지 않았다는 쪽이 더 맞았다. 아하, 그러니까 슬슬 여기저기 고장나다 못해 이제 결국 미각도 파업을 했다는 거구나. 아니근데왜하필지금. 권순영은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좀 신경질이 났다. 이러면 사람이 먹어도 되는 건지를 판단할 수가 없잖아. 권순영은 야속한 마음으로 김치 한 점을 씹어보았지만 그리도 사랑해 마지않는 김치에서도 어떠한 맛을 느낄 수 없었다. 푹 익어서 느물느물해진 배추의 식감만이 느껴질 뿐. 그냥 완제품으로 시킬 걸. 한숨을 푹 내쉰 권순영은 애써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했다. 맛을 못 느끼는 거지 아주 모르는 건 아니니까. 먹자마자 기침 안 하고 토 안 했으면 일단 섭취는 가능한 쪽이지 않을까. 억지로 그런 결론을 내렸을 때가 두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다. 안방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김민규가 일어났나보다.
나... 진짜 괜찮겠지?
권순영은 어쩐지 다른 이유로 지극히 불안해지고야 말았다.
김민규가 밥을 먹는 동안 시선을 도무지 떼지 못한 것은 다 그런 이유에서였다. 못 먹겠으면 그냥 뱉어. 알았지. 권순영은 그 말을 두 번 세 번 반복했으나, 제가 앞치마를 입고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부터 실실 웃고 있던 김민규는 느물느물 알겠다며 대답할 뿐이었다. 권순영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굴며 김민규만 봤다. 다행스럽게도 김민규는 한 공기를 싹싹 비웠다. 다행이다. 먹고 구토할 수준은 아니었나보다. 권순영은 그런 마음에 활짝 웃었다. 권순영은 자리는 자신이 치운다는 김민규의 제안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그래도 요리 두 번은 안 해야지. 그런 결심도 속으로 얌전히 세웠다.
이러구러 제가 늘어놓는 변명을 들은 김민규는 기어이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권순영은 그런 김민규의 등짝을 아주 야무지게 때려주었다. 삐친 건 꽤 풀린 것 같아서 내심 다행이었다. 권순영은 입술을 조금 샐쭉대다가 김민규의 어깨에 제 머리를 푹 기대어버렸다. 다행히 아직까지도 컨디션이 괜찮았다. 민규야, 하고 얌전히 이름을 부르면 김민규도 순순히 웅. 하고 대꾸를 해준다. 내가 오늘 점심 만들어줬으니까 오늘은 내 말 잘 들어야 해. 알았지. 그렇게 고집을 부려도 또 고분고분 그럼, 당연하지. 하고 대답하는 김민규는 정말로 상당히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래서 권순영은 어렵지 않게 제법 예전부터 그려왔던 계획 하나를 김민규에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 나랑 데이트 가자. 카페 잠깐 들러서 마실 것 좀 챙기고...
서점 가서 책 구경하자, 우리.
나 너랑 그거도 꼭 해보고 싶었어.
빨리 당장 좋다고 말해. 그렇게 새초롬하게 말하면 김민규는 또 웃으며 형이 하자면 또 해야지. 내가 뭐가 싫어서. 하고 대꾸해주는 것이다. 결국 권순영도 그런 김민규를 따라서 슬쩍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다정하게 들려오는 김민규의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청각은 과연 언제 없어지게 될까?
그게 제일 마지막이면 좋겠다. 권순영은 김민규 몰래 그런 생각도 했었다.
*
권순영은 김민규와 함께 나란히 스타벅스에서 자허블을 한 잔씩 테이크 아웃 했다. 권순영은 이제 어떠한 단 맛도 풍미도 느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티의 향과 온도를 느낄 수는 있어서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권순영이 김민규의 손을 잡고 향한 곳은 거기서 멀지 않은 지하 교보문고였다. 김민규는 퍽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권순영에게 물었다. 혀엉, 근데 형 원래도 책 좋아했어? 그렇게 말해놓고는 제가 또 무어라 면박을 줄까 겁이 났는지 급히 말을 덧붙이는 것이다. 아니, 그. 안 어울린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그냥 평소에 형 책 읽는 거 많이는 못 본 것 같아서... 영 걱정되는지 말 끝을 흐리는 김민규에 권순영은 가볍게 웃으며 답을 돌려주었다.
민규야.
옛날에도 핸드폰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 시절 세상의 도파민은 다아, 요 서책이었다 이 말이야. 응? 뭔 뜻인지 알지?
오.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김민규는 납득한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말은 정말 진실이었다. 권순영은 보기보다 오랫동안 지구에서 인간 행세를 하며 묵어온 존재였다. 본격적으로 티비가 확산되기 전까지 지구의 메인 컨텐츠는 대부분 서책에 있었다. 그 때의 권순영은 생각보다 책을 가까이, 그리고 자주 읽었었다. 하나는 책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 사실들이 상당히 많았어서. 또 하나는 그렇게 인간들을 살펴보는 과정이 제법 재미있어서. 영 서점과는 친해보이지 않는 김민규를 위해 권순영은 구역 곳곳을 누비며 하나하나 구획을 설명해 주었다. 여기는 에세이, 여기는 자기개발 서적들. 여기는 교양 서적이고 여기는 소설. 장르는 크게 가리지 않고 다 잘 읽지만 SF는 영 안 좋아해. 왜요? 하고 되묻는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태연하게 답했다. 고증이 너무 안 되어 있어서. 김민규는 짧게 아, 하고 깨달음의 탄식을 뱉었다. 그건 권순영 나름대로의 농담이었다.
대충 서점 소개를 마친 권순영은 김민규를 학습 만화 코너 앞에 데려다 놓았다. 나 뭐 좀 찾을 게 있어서, 여기서 마음에 드는 것 좀 골라 읽고 있어봐. 형 근데 굳이 골라도 왜 학습 만화 코너야. 저기 원서 코너에 다시 데려다줄까? 아냐, 나 와이 시리즈 좋아해... 순순히 자신을 보내주는 김민규에 권순영은 슬쩍 웃으며 뒤를 돌았다. 마침 근처를 지나가는 직원 분이 있으셔서 권순영은 어렵지 않게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기 죄송한데요, 혹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의 예전 번역본이 이 서점에 있을까요.
아아, 절판이라 한 번 확인해보셔야 한다고요.
그럼 혹시 합본은 있나요? 제가 사실 그 버전을 찾고 있어서요. 네, 그 두꺼운 거요. 네.
직원 분은 핸드폰을 들어 몇 번 이리저리 재고를 확인하는 듯 보였다. 조금 뜸이 들여지는 시간에 권순영은 슬쩍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없으면 아마 온라인으로 사야 하려나. 그건 조금 아쉬운데. 권순영은 기왕이면 그걸 바로 턱 김민규의 품에 안겨주고선 당황할 그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었다. 아주 생색도 되바라지게 내며 몇 번 툭툭 장난을 치고 싶기도 했다. 권순영은 괜히 눈동자를 도륵, 굴리며 반응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머잖아 서점 직원 분은 핸드폰 화면을 제게 보여주었다. 딱 한 권이 남아 있었다. 예스! 권순영은 주먹을 불끈 쥐고선 곧장 계산을 위해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권순영은 오래 지나지 않아 뿌듯한 얼굴을 한 채로 다시 김민규를 찾아갈 수 있었다. 괜히 신난 목소리가 이런 저런 밑밥을 깔았다. 민규. 나 가서 계산까지 다 하고 왔어. 사실 이 책 선물해주고 싶어서 서점 오자고 한 거였거든. 인터넷으로 사도 되기는 하는데, 이런 건 원래 눈 앞에서 직접 현물로 주는 맛이 좀 있어서. 그런 말을 하며 괜히 뜸을 들였다. 등 뒤에 숨긴 천이백삼십오페이지짜리 책을 꼼지락대고 있으면, 김민규는 역시나 예상한 반응을 돌려 주는 거다. 어엉, 형. 나 읽고 독후감까지 빠방하게 써올 테니까 무슨 책인지 좀 보여주면 안 될까. 권순영은 결국 잔뜩 신이 나서 냅다 책을 들이 밀었다.
짠! 자, 선물.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책이야.
은하수... 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은하수를 여행하는... 뭐?
권순영은 그 순간 얼빠진 김민규의 표정을 아주 똑똑히 보았다. 딱 예상대로의 모습이었다.
*
권순영은 내심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책 제목을 다시 읊었다.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어어, 형. 나도 지금 책 표지를 보고 있기는 해. 제목은 아주 잘 알겠어. 근데... 이거 뭐 이렇게 두껍지? 이게 책이야? 김민규는 권순영이 내민 책을 양 손으로 후다닥 받아들었다. 김민규는 뭐라 말도 더 못 붙이고 멍하니 표지를 요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소설... 이라는 게 원래 다 이래? 내가 본 사전보다 더 두꺼운 거 같은데? 그 말에 권순영이 슬쩍 더 거들었다. 짱 두껍지. 이거 천이백삼십오페이지야. 천이백... 뭐? 천이백삼십오페이지. 형 미안한데 내가 못 알아들어서 되묻는 게 아니지 않을까. 그 말에 권순영은 정말 힘들게 웃음을 참아야 했다.
결국 권순영은 주절주절 처음부터 준비했던 설명을 슬쩍 늘어 놓았다. 여섯 권짜리 소설인데 이건 합본이라서 그래. 이거는 다섯 권 분량 다 합쳐둔 거라, 천이백삼십오페이지. 이거 다 읽고도 아쉬우면 남은 마지막 6권 읽으면 돼. 내가 이 버전으로 구하느라 좀 고생한 거라니까. 이 번역본은 예전에 한 번 절판됐어가지구... 꼭 이걸로 구하고 싶었거든. 다행히 남아있었대. 짱이지. 김민규는 그 말의 절반은 못 알아들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답은 또 꼬박꼬박 잘했다. 어어... 짱이다. 짱인데 형. 방금 내 수준 고려해서 학습 만화 코너에 날 던져줘 놓고선 냅다 또 선물이라고 천이백삼십오페이지짜리 소설을 주면 내가 어떻게 할까. 형 아까는 나보고 SF 싫어한다며... 이거도 SF 아냐? 맞지 않나?
김민규는 그런 말을 하며 울상이 된 채로 반쯤 앓는 소리를 냈다. 권순영은 결국 이 대목에서 웃음을 참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 웃지 말라고... 그 말에도 아랑곳 않고 꺄르르 웃어버린 권순영은 잔뜩 웃음기 어린 말투로 김민규에게 자신이 굳이 이 선물을 고른 이유를 찬찬히 들려 주었다.
좀 어려우라고 일부러 이걸로 고른 거야.
여섯 권이 한 권씩 떨어져 있는 세트 아니라, 굳이굳이 절판도 한 번 된 합본으로 책을 산거도 그런 거고.
나는 너한테 이게 쪼금 어려웠으면 했거든.
나 생각날 때마다 한 페이지씩 읽으라고 사주는 거야. 앞선 말들이 반쯤은 김민규를 놀리기 위한 장난이었다면, 이건 정말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었다. 권순영은 사실 한참 전부터 김민규에게 무엇을 남기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만일 그것이 책이 된다면 책은 어떤 장르여야 하는지, 또 분량은 어느 정도가 적절할지. 그런 것들을 한참 골머리 앓으며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나 돌고 돌아 내린 결론은 결국 이 두껍기 짝이 없는 다섯 권 플러스 알파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어쩌구의 합권이었다. 권순영이 처음 이 책의 번역본을 읽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참 잘 어울리는 책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이었다. 권순영은 슬쩍 눈을 접어보았다.
제목도 딱이지 않아?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나 은하수에서 온 사람이잖아. 여행이라는 대목도 얼마나 딱 맞게.
그냥 제목 한 줄만 읽어도 딱, 너한테 내가 생각날 거 같잖아.
그러니까 나 생각날 때마다 한 페이지씩 아껴 읽어. 그렇게 뱉어낸 말은 어렵사리 골라낸 것이었다. 권순영은 아직까지도 자신이 김민규에게 어떤 온도로 남아야 할지를 한참 고민하곤 했다. 너무 뜨거우면 오래 앓을까 걱정이 되었고, 너무 차가우면... 그래. 솔직히 권순영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김민규의 온도는 단 한 순간도 권순영에게 차가운 적 없었가애, 권순영은 그래서 제가 김민규에게 어떤 온도일지 더욱 고민하게 되는 거였다. 한참 고민한 권순영은 조금은 미련한 답을 내놓았다. 그럼, 끝을 정하면 되잖아. 기왕 정하는 김에 아주 후하게 제법 길게 기간을 잡아버리면 되지. 그럼 아마 미운 정 고운 정 가릴 것 없이 죄다 털어버리기에도 충분한 시간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천이백삼십오페이지는 그런 의미 역시 가지고 있었다.
매일 읽지도 말고, 생각날 때에만 한 페이지씩 읽어. 기억 안 나면 전에 읽었던 페이지 다시 또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이면 읽었던 거 한 번 더 읽고. 그렇게 읽어. 두 페이지는 안 돼. 딱 한 페이지만 읽어.
그렇게 아끼고 아껴서, 정말로 나를 네가 정녕 기억해야겠다면.
딱 그렇게 이 책만큼 무거워야지. 안 그래? 권순영이 그렇게 마무리 한 말 뒤에는, 그러니 이 책 이상으로는 나를 무겁게 생각하지 말아달라는 문장이 생략되어 있었다. 일부러 제법 묵직하고 불편할 것으로 골랐으니 그것 이상으로는 의미를 부여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권순영은 괜히 종알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운동하면서도 들고 다니고 스케줄 갈 때 캐리어에도 넣어가고 그래. 일부러 무거우라고 그러는 거야. 불편하라고 고른 거야. 그럼 좀 묵직하니까 미워서라도 쪼끔은 더 인상 깊게 기억날 거잖아. 딱 그러라고 얄밉게 고른 거야.
천이백삼십오페이지랬잖아. 그럼 적어도 천이백일은 나를 곱씹을 방법이 있겠다. 그치. 그러니까...
권순영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김민규가 권순영을 갑자기 와락 당겨 안았기 때문이었다.
김민규와 권순영의 사이에 두께 8센치가 넘는 두툼한 책이 불편하게 꼈다. 권순영은 불편함에 조금 낑낑대는 소리를 냈지만, 김민규는 그걸 싸그리 무시하고선 권순영을 더 당겨안기나 했다. 권순영 진짜 웃긴다. 언제 그 작은 머리통으로 그런 생각을 다 했지? 뭐 인마. 내가 너보다 책은 몇 천 권을 더 읽었는데요. 퉁명스레 그리 대꾸하자 김민규는 뭐가 웃긴지 또 왈칵 웃었다. 뭔데. 뭐가 재밌는 건데... 권순영은 도무지 그게 뭔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김민규는 아. 형은 진짜 안 되겠다. 나도 뭐 좀 사줘야겠네. 하며 비실비실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잇는 것이다. 너 책 잘 모르잖아. 권순영이 그렇게 일갈하면, 김민규는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대꾸했다. 뭐래, 형.
내가 언제 책 사준다 그랬나.
그렇게 이번에는 김민규가 권순영의 손을 잡고 앞장섰다. 권순영은 그렇게 뺀질나게 서점을 드나들었으면서 서점에 이런 코너도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다. 권순영은 눈이 조금 동그래졌으나, 김민규는 그걸 보지 못했는지 재잘재잘 문장을 뱉었다. 형, 형은 알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원래 교보문구에는 책만 파는 거 아니거든. 잡화도 팔고, 뭐 굿즈 같은 것도 팔고.
그리고 앨범도 팔지.
김민규가 향한 곳은 바로 가수들의 앨범이 가득 전시된 곳이었다. 권순영이 잠시 멈칫하는 동안, 김민규는 거기서 어렵지 않게 세븐틴의 이름을 찾았다. 김민규가 종류 하나도 빼먹지 않은 채 바구니에 종류별로 하나하나 세븐틴 앨범을 쏟아 넣는 것을 보며, 권순영은 조금 아방한 목소리로 되물어야만 했다. 민규야, 너 뭐 해...? 그럼 김민규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것이다. 보면 알잖아. 우리 앨범 사지.
생각해보니까, 내가 형한테 줄 수 있는 것 중에서는 이게 제일 낫지 않을까 싶어서.
내가 인생에서 제일 오래한 게 이건데. 전부 다 불태운 게 이건데.
그리고... 형이랑 같이 한 것도 결국 이거잖아.
형, 우리 집 가면 이거 다 까서 덧칠 좀 하자. 가사집 펴고 형 파트였던 줄에다가 밑줄도 좀 치고. 나 휴대용 폴라로이드 같은 거도 있거든. 원우 형한테서 쌔벼 와서. 그걸로 사진도 좀 뽑아서 앨범 표지 사이에 오려서 끼워넣고 그러자. 김민규는 빼먹은 게 없는지 살피며 바구니에 앨범을 차곡차곡 담느라, 그 말을 들은 권순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는 보지 못했다. 아, 이번에 새로 나오는 앨범은 아직 선예매라 없네. 그건 좀 아쉽다. 그렇게 능청스레 말하던 김민규는 다시 권순영의 손을 잡아 계산대로 향했다.
형. 나한테는 아무튼 평생 열 셋이잖아.
형이 그렇게 형의 흔적을 남겨 줬으니까, 나는 이렇게라도 형 자국을 좀 남겨보려고.
형 여기 있다고 아주 고래고래 얘기 좀 해보려고.
권순영은 차마 그 말에 답을 하지 못했다.
김민규는 가끔 이렇게 다정한지도 모르면서 아주 상냥하게 정곡을 찌르는 때가 있었다.
*
그 날의 데이트는 서점을 벗어나서도 끝나지를 않았다. 권순영은 완전히 녹초가 된 채 침대에 뻗어 버렸다. 지난 일정을 전부 꼽으려면 손가락을 생각보다 많이 써야할 것이 뻔했다. 외식을 해도 된다는 제 말에도 굳이굳이 점심을 얻어 먹었으니 저녁은 제가 만들어야겠다며 고집을 부린 김민규. 한참을 투닥거리며 마트에서 실컷 장을 보고선 뭐가 또 아쉽다고 김민규는 집에 돌아가질 않은 채 냅다 영화관으로 향했다. 팝콘에 나쵸 콜라까지 야무지게 쪽쪽 빨아먹은 김민규의 말은 아주 가관이었다. 에이, 장 보고 영화 볼 수도 있지. 이 정도는 음식 안 상해서 괜찮아. 하여간 김민규는 갈수록 너스레만 늘었다. 권순영은 그렇게 배가 터질 때까지 맛도 모르는 음식을 먹여진 뒤 뽀득뽀득 몸을 씻고서야 간신히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이미 반쯤은 흐물흐물해진 권순영의 옆에 두툼한 온기가 슬쩍 곁을 비비고 들어왔다. 형 오늘 같이 자까. 권순영은 그 때 정말로 지쳐있었지만, 그럼에도 김민규의 등짝을 두 대 정도는 때릴 기력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아무튼 결국 둘이 나란히 같이 자기는 했다. 김민규는 그 모든 걸 퍽 마음에 들어하는 티가 났다.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권순영은 그런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뜨끈한 체온이 어쩐지 배로 몸을 노곤하게 만드는 느낌이라 권순영은 오래지 않아 까무룩 잠에 들었다.
그러나 권순영이 눈을 떴을 때에는 더 이상 김민규가 옆에 있지 않았다. 삼 일의 휴가가 끝이 난 탓이었다. 김민규는 그 휴가를 마지막으로 정말 눈코뜰새 없이 바빠졌다. 마에스트로 활동이 시작되며 김민규는 각종 예능이며 음방이며 사이사이에 낀 자체 컨텐츠까지 쉴틈없이 소화해야 했기에, 김민규가 권순영과의 오피스텔로 퇴근하는 것은 이제 이틀에 한 번 꼴이 되었다가 또 가끔은 삼 일에 한 번이 되기도 했다. 그래도 아주 적적하지는 않았다. 김민규가 음방 직캠이 뜨는 족족 바로 유튜브 링크를 보내준 탓이었다. 보고 감상문 제출해. 이모티콘이 덕지덕지 붙은 그 연락에 권순영은 선선히 알았다고 대답하곤 했다. 김민규는 이제 가득 쌓아두는 연락 사이에 보고 싶다는 말도 어렵지 않게 섞었다. 권순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짧게 두 글자의 답을 보냈다.
나도.
권순영은 이제 아이돌을 덕질하는 마음으로 김민규를 살폈다. 김민규는 마에스트로에서 도입부 안무를 맡았다. 홀로 무대에서 뒤돌아서 멤버들을 바라보며 지휘를 하는 역할이었다. 김민규야 원래 몸을 쓰며 춤 추는 데에 능하다지만, 그 부분의 김민규는 특히나 배로 눈에 띄는 느낌이라 권순영은 김민규 몰래 그 부분을 몇 번 돌려보기도 했다. 요새 입덕 직캠은 그 사람만 아주 확대해서 집중적으로 찍어주는 모양이었다. 권순영은 현란히 지휘봉을 휘두르는 잘 뻗은 김민규의 손도 한 번 보고, 볼캡 밑으로 반짝 빛이 나는 눈동자도 한 번 보고. 그렇게 남몰래 직캠 조회수를 올렸다. 심지어 권순영은 김민규의 투폰으로 음방 실시간 문자 투표에 참여하기도 했다. 홀린듯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문득 이게 김민규의 세컨드 폰이라는 것이 생각이 났다.
...최측근이 투표 참여했다고 뭐라 하지는 않겠지? 권순영은 문득 그 생각을 했지만 아주 당연히 뭐라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었다. 세븐틴은 마에스트로 활동에서 좋다고 해도 나쁘지 않을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다. 티비 속의 김민규는 음방 1위 트로피를 들고서 소감을 말하기 위해 마이크를 받아들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 관객석을 바라보는 김민규는 단어 그대로 정말 별보다도 더 밝게 반짝반짝 빛이 났다. 권순영은, 확실히 김민규는 무대 위가 참 잘 어울린다 싶었다.
이제 권순영은 한 때 그런 김민규의 옆에 있던 자신의 모습은 조금도 상상이 가지를 않았다.
애초에 권순영은 단 한 번도 자신이 아이돌을 할 만큼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를 않았으니까.
그래서 따지자면 딱히 아쉬운 것이 남아 있을 이유도 없었다. 권순영은 미련 없이 티비를 껐다. 얌전히 이불을 덮고 침대에 누워선 오늘도 수고했어, 하고 김민규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권순영은 무대에서의 자신이 한 번도 대단하다거나 또 궁금하다거나 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걸 남겨둬야 할까, 하고 티끌만치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이불 속의 권순영은 얌전히 눈을 깜빡였다. 그럼에도 김민규가 몇 번이고 가득 늘어놓던 말들이 문득 귓가에 맴돌기도 했다. 나는 형 같은 사람이 진짜 난 놈이라고 생각해. 대충 그런 느낌의 말이었던 거 같은데. 권순영은 눈을 꾹 감았다.
있지, 민규야.
나는 사실 그 때의 나에게 별 마음이 없거든.
그치만 그것도 너에게는 혹시 새기고 싶은 기억이 될까?
권순영은 한참 고민하다 결국 이불을 홱 걷어내었다. 침대 밑으로는 몇 번 가지고 놀아 아직 먼지가 쌓이지 않은 우쿨렐레가 있었다. 권순영은 그걸 빤히 바라보았다. 민규야.
혹시 너는 나의 그런 모습 역시도 안아보고 싶을까.
권순영은 그 밤이 제법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
그리하여 지금의 권순영은 조금 초조하다. 김민규가 바쁜 걸 뻔히 알면서도 고집을 부려 딱 오늘의 목요일을 비우게 하였다. 맛도 못 느끼고 평소에도 별로 관심 없었던 스테이크를 들먹이면서까지 대학로를 찾게 하였다. 권순영은 공연이 모두 끝난 뒤의 아주 작고 초라한 공연장을 딱 삼십 분 정도만 빌릴 수 있겠느냐고 온갖 사정을 했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것이 바로 오늘이었다. 미니 콘서트. 미니라는 표현을 붙이기에도 조금 부끄러울 만큼, 미흡하고 또 너무나도 작을 공연. 관객은 너무나 자명하게 단 하나였고, 가수 역시도 그에 맞게 딱 하나일 것이다.
권순영은 정말 어찌저찌 김민규를 이 작달막한 공연장에 앉히는 것에 성공했다. 김민규가 순한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저렇게 의구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도 싫다며 자리를 뜨지는 않았으니까. 권순영은 화장실을 간다는 핑계로 냅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후다닥 백스테이지로 달려가 관객석의 불을 끄고는, 몰래 김민규의 서랍을 뒤져 찾은 선글라스를 썼다. 무대만큼이나 작은 우쿨렐레 하나를 들고서 긴장되는 마음으로 썩 좋지 않은 음질의 마이크를 테스트 했다.
아아, 아.
지금부터... 어, 그 뭐냐.
미니 콘서트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초라한 무대 위에 올라 내려다 본 단 하나뿐인 관객의 얼굴은 다행스럽게도 아주 밝았다. 권순영은 멋쩍게 볼을 긁으며 그를 보고선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야매 가수 호시입니다. 아 맞다 불 안켰네. 그러곤 후다닥 뒤를 돌아 황급히 무대 조명을 켰다. 김민규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커튼 너머로 들려왔다. 그래, 네가 웃었으니 됐다. 멈출 줄도 모르고 비실비실 웃어대는 김민규에게 아씨 웃지마. 하고 퉁을 주긴 했지만, 권순영의 마음은 사실 그 쪽에 가깝긴 했다. 권순영은 잠시 숨을 정리하곤 큼큼거리며 목을 골랐다.
큼큼, 아무튼. 준비한 곡은 하나입니다.
미니잖아요. 그래서 진짜 미니하게 준비했습니다. 네, 이거 하고 싶어서 너 부른 거 맞으니까 자꾸 그렇게 보지 말아줄래?
미니 콘서트. 관객 딱 하나한테 바치는 공연. 그거 한 번 해보고 싶었어.
아무튼 엄청 짧으니까 집중해서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김민규가 요란하게 박수를 치는 소리가 들려와, 권순영은 귀 끝을 조금 붉히며 네 줄 우쿨렐레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럼 시작할게요. 권순영은 긴장에 축축하게 젖은 손바닥을 애써 무시하고선 노래의 첫 가사를 간신히 떼었다.
You are the most beautiful moment in my life
이건 movie에서 이렇게 불러 best part
권순영이 고른 곡은 STAY였다. 언젠가 권순영이 솔로로 발매했던 자작곡이었다. 권순영은 이 노래가 우쿨렐레로 연주하기에 적합한 곡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이제야 처음으로 악기를 잡아본 쌩 초보인 자신에게 적합한 난이도 역시 아니라는 것을 아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이 곡이 욕심이 나서 권순영은 조금 혼자만의 고집을 부려 이 노래를 골랐다.
생판 초면인 악기로 자신만이 겨우 기억하고 있는 멜로디와 반주를 구현해낸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권순영은 온전히 제 기억에만 의지한 채 같은 부분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불렀고, 입반주를 둠빠둠빠 부르며 그것에 맞는 음을 줄 하나하나 한 칸 한 칸을 튕겨가며 하나씩 찾아 새겨 넣어야 했다. 그래서 권순영이 만든 STAY의 악보에는 제대로 된 정식 코드명이나 음표 따위가 그려져 있지 않았다. 알아보기 쉽게 네 줄 위의 손가락이 그려져 있기도 했고, 읏차읏차나 챠르르 같은 온갖 이상한 의성어가 섞여 있기도 했다. 그래도 권순영은 제법 긴 시간을 들여 그 악보를 완성했을 때에 슬며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완성한 엉망진창의 악보를 자연스럽게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연습하는 데에는 또 그 곱절의 시간이 걸렸다.
이건 그렇게 준비한 곡이었다.
운명의 경계를 넘어서 만났고
거짓말처럼 첫눈에 알 수가 있었어 널
그래 내가 찾던
권순영이 그만큼이나 고생하며 이 곡을 골라야 했던 이유가 있다면, 글쎄. 그건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다만 권순영은 어렴풋이 언젠가 그 곡에 한참 골머리를 앓으며 새겨 넣었던 가사가 제법 마음에 들어서가 아닐까, 하고 그 취향을 조금 더 또렷하게 정의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권순영이 한 때 살던 우주는 정말 말도 안되게 커다랬고 돌고 돌아 정착하게 된 지구별 역시 결코 작지 않았다. 그러니 거기에서 김민규를 만난 건 실은 아주 기적적인 일이라는 거다. 권순영이 기어코야 다시 만들어낸, 놓고 싶지 않았던... 누군가는 운명이라고 부르고 싶을 무언가와 비슷한 그런 존재. 권순영이 놓치는 법을 잊어버린 김민규는 결국 꿈과 비슷했기에. 언젠가 결국 세상이 끝나더라도, 적어도 권순영은 김민규를.
권순영은 천천히 가사 하나하나를 담아 부르며 노래의 막바지로 향했다. 잔뜩 긴장한 권순영은 제가 악기용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이었나, 이 공연의 유일한 관객은 그마저도 오히려 좋다고 했으니 사실 이 공연에 더 이상 문제될 것은 없을 것이다.
Baby hold me, stay with me
그렇게 권순영은 꿈에서 깨어나듯 천천히 마이크에서 입을 떼었다.
감사합니다. 그 다섯 글자가 어찌나 어리벙벙하니 낯설게 느껴지던지.
그래, 민규야. 네가 정녕 나를 기억해야 한다면.
나는 감히 네가 이런 것들만 안고 가기를 바라볼까 한다.
*
김민규는 노래가 끝나자마자 그 긴 다리로 겅중 무대를 뛰어 넘어 제 앞으로 달려왔다. 김민규는 이미 가득 설렘과 흥분 따위로 젖은 목소리로 벅찬듯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언제 이걸 다 준비했어. 응? 막상 또 그렇게 물으니 뒤늦은 부끄러움이 몰려오는 것도 역시 사실이라. 권순영은 제법 새초롬하게 뭐 그냥 너 바쁜 동안... 하고 대충 대꾸했다. 권순영이 생각하기에 이건 분명 수준 이하의 무대였을 테지만, 아무튼 제 관객이 이렇게나 행복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을 보고 있으니 그냥저냥 넘어가기로 하였다.
김민규는 권순영의 손을 질질 잡아 끌고서 굳이굳이 꽃다발 하나를 샀다. 권순영의 상체를 가득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큼지막하고 싱싱한 꽃다발이었다. 김민규는 화려한 생화가 아낌 없이 들어간 꽃다발을 내밀며 멋진 공연에 대한 답이야, 라고 말하며 웃음 지었다. 권순영은 그래서 하릴 없이 또 그 얼굴을 따라 해사하게 웃을 뿐이었다.
돌아가는 길은 이제 그렇게 시원하지 않다. 해가 모두 기울었음에도 낮의 열기가 모두 식지 못한 탓이었다. 이렇게까지나 오래 잡고 있으면 사이에 배어 나올 땀이 찝찝할 법도 한데, 김민규는 권순영의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은 권순영의 안전벨트를 직접 매주고선 잘 쓰지도 않는 기어 위에 권순영의 손을 올리곤 그 위에 제 손을 겹쳐 올려 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날,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간 권순영은 코피를 한 사발 쏟아냈다. 갑자기 쿨쩍 쏟아지는 그것에 권순영은 급격한 어지러움을 느끼며 결국 맨 타일 바닥 위에 주저 앉아야만 했다. 도무지 멎을 생각이 없는 그것을 권순영은 또 억지로 쥐어 틀었다.
그래서 권순영은 모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권순영이 예상한 대로 본능적인 영역이 맞았다. 가까워지면 아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었다.
아주 확고해서 결코 무시할 수도 없는 각인 같은 것이었다.
이제 권순영에게 주어진 유예 기간은 모두 끝났다.
*
권순영은 이제 종종 숨을 쉬는 것조차 벅차게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김민규에 대한 것은 권순영에게 죄다 어렵기만 했다.
그래서 그냥, 김민규가 기어이 권순영을 새겨내야겠다면. 이런 것들은 전부 하나도 몰랐으면 했다. 그게 전부였다.
*
권순영이 말을 꺼낸 것은 김민규가 본격적인 해외 투어를 며칠 남겨두고 있지 않았을 때의 시점이었다. 김민규는 이제 되는 날마다 권순영과 같은 잠대에서 잠들고 깼다. 그렇게 잠이 많은 애가 꼭 권순영을 먼저 재우고서는 권순영보다 먼저 일어났다. 권순영은 그래서 종종 아직도 잠에서 깨지 않은 척을 하기도 했다. 김민규가 제 잠든 얼굴을 빤히 보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스케줄 때문에 바빠 며칠씩 자리를 비워야 하는 날에도, 김민규는 꼭 카레며 육개장 같은 대용량 요리를 한 솥 가득 만들어두고 가곤 했다. 권순영은 억지로라도 그걸 입에 밀어 넣어보았으나, 그건 십 분도 채 가지 않아서 도로 다시 게워졌다. 이제 권순영은 미각만을 잃은 것이 아니게 되었다. 몸의 장기들이 하나 둘 망가져가기 시작했단 뜻이었다. 머지 않아 제 기능을 모두 멈출 거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었다.
권순영은 김민규가 있을 때에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든 억지로 억눌러 보다가, 김민규가 스케줄 때문에 바삐 자리를 비우면 그것들을 죄다 쏟아냈다. 김민규가 바빠서 차라리 다행일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제 김민규와 권순영의 대화방은 일방적이게 되었다. 권순영이 김민규가 없는 대부분의 시간을 잠으로만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착한 김민규는 불평 하나 없이 꾸준히 대화를 쌓아두었다. 한참 쌓여 있는 대화를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가던 권순영은, 기어이 최초의 대화에 도달했다. 김민규의 투폰에 김민규의 번호를 저장하기 위해 보낸 안녕 나 민규. 그 다섯 글자의 대화였다. 권순영은 그것을 한참 빤히 쳐다보다가 아주 느린 손짓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김민규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권순영은 최대한 담담하게, 그리고 조금은 생기를 담아 말을 뱉었다.
뀨. 지금 뭐하고 있었어.
권순영은 지금 자신의 목소리가 평소와 비슷하기를, 그리고 오히려 평소보다 조금 더 밝게 들리기를 바랐다. 권순영은 이제 어떻게 김민규를 대해야할지를 한참 고민했었다. 한참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은 언제나와 같이 하나였다. 평소같이 가볍고 밝게 대할 것. 이제와 자신이 진지한 태도를 보여봤자, 혹은 행여라도 아픈 기색을 티내봤자 남겨질 이의 마음만 무겁게 할 뿐이었다. 권순영은 그래서 지금 김민규에게 마지막 여행을 제안하고자 했다. 제가 영영 사라지기 전의 마지막 기억을 새길까 했다. 그리고 권순영은, 그 곳에서의 시간이 아주 특별하지도 아주 나쁘지도 않기를, 그래서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름 괜찮았다는 김민규의 말, 그리고 거짓으로 읊은 자신의 하루. 곧 촬영을 들어가야 한다는 김민규를 붙잡고서 권순영은 기어이 선고했다.
민규야.
혹시 내일 바빠?
김민규는 잠시 당황한 듯하다 금방 답을 돌려주었다. 어? 아니, 음. 아마 쉴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 사이에 잠깐의 공백이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사이에 바삐 스케줄을 확인한 모양이다. 아마 조금은 빼곡했을 테고, 그럼에도 가능하다는 답을 돌려준 것일 테고. 그래서 권순영은 차분하고 사근사근하게 마지막 말을 뱉었다. 그럼 뀨야, 우리...
안양으로 별 보러 갈래?
너랑 보고 싶다. 별. 김민규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고 그냥 그리하겠다고 답하곤 스케줄에 들어가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김민규도 이게 마지막인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근데 왜 하필 안양이야? 그렇게 묻는 김민규에게 권순영은 그곳이 김민규의 고향이라 궁금했다는 답을 돌려주었다. 한 번쯤은 거기를 가보고 싶었어서. 그 말에 김민규는 조금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형 근데, 내가 안양에 어디가 좋은지를 잘 모르는데... 그런 말을 늘어 놓는 김민규의 표정에서 어렵지 않게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좋은 걸 주고 싶은 모양이다. 마지막일 걸 아니까. 그래서 권순영은 그냥 가벼운 어투로 상관없다고 대답하며 슬쩍 몸을 붙여댔다. 권순영에게는 굳이 특별한 게 필요하지 않았다. 특별하면 특별할 수록 김민규의 기억에 깊게 남아 잊기 어려울까 걱정 되었으니까. 그리고 권순영은 김민규 하나로도 이미 차고 넘치게 특별했으니까. 어디 갈지는 같이 찾아보면 되지. 그리구 나 엄청 좋고 화려한 데 안 가도 돼. 그냥 너랑 시간 보내는 게 다 좋을 텐데. 너랑 같이 별 보고 싶어서 가는 건데 뭐가 문제야, 뀨. 응? 대충 보이기만 하면 됐지. 고양이가 으레 그러듯 머리를 콩, 어깨에 부딪히고는 살짝 부비적거리자 결국 김민규도 자신을 품에 당겨 안아주었다. 그래, 그러자. 같이 찾아보자. 권순영은 제 몸 전체를 완전히 감싸 안는 김민규의 익숙한 체온에 슬쩍 눈을 감았다. 가슴팍에서 일정하게 두근두근,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권순영은 괜히 실없는 말들을 늘어 놓았다. 있지, 안양에 어린이 천문대가 있다는 거야. 혹시 볼 수 있을까 하고 좀 찾아봤는데 원칙상 성인은 안 된다는 거 있지. 내 눈에는 솔직히 김민규도 어린이고 갓 태어난 갓난애인데... 좀 치사하게 느껴졌어. 그렇게 웅얼대자 김민규 역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형, 나만큼 큰 애가 또 어디 있다고 그래... 권순영은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침실의 꽃다발은 아직 시들지 않았으나, 권순영은 그 희미한 장미 향을 맡지 못할 것이 뻔했다.
권순영이 무거운 눈을 뜬 것은 오전 열한시 쯤의 일이었다. 권순영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에 지장이 없도록 어제 저녁부터 진통제를 끝도 없이 털어넣었다. 이제는 인간보다도 훨씬 약해진 자신의 몸에 약효가 부디 무사히 돌기를 바라며, 권순영은 진통제 한 갑을 다 까고도 몇 알 더를 목구멍 너머로 밀어넣었다. 작은 물병 한 통을 다 비워야 했다. 알약이 넘어간 목구멍이 뜨끔뜨끔했다. 그래도 진통제가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인지,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약간의 어지러움과 가슴 통증 빼고는 크게 증상이 남아있지 않았다. 이정도면 김민규에게 작별 인사를 할 때까지는 괜찮은 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멍하니 눈을 뜨자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 안고 있던 김민규의 체온이 가장 먼저 느껴졌다. 권순영은 고개를 돌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간신히 뜨려고 했다. 민규야, 그냥 깨우지 그랬어... 다 가라앉은 성대를 억지로 긁어 그런 말을 뱉으면, 김민규는 잘 잤으면 됐다는 말과 함께 슬쩍 웃으며 형 지금 눈 뜬 건지 안 뜬 건지 하나도 모르겠어. 라고 하며 제 얼굴을 가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김민규는 그대로 권순영을 번쩍 안아들고서는 식탁으로 향했다. 남은 반찬들을 꺼내 제 입에 이것저것 밀어넣어 주고는, 평소보다 배로 꼼꼼히 설거지를 하고 식탁을 닦았다. 김민규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권순영은 혹시 모르는 마음에 조금 남아있던 진통제를 몰래 마저 털었다. 어차피 이제 더 먹을 일도 없을 테니까. 주머니 안으로 약통 포장지를 구겨서 쑤셔놓고는, 가만히 의자에 앉아 김민규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모든 채비를 마친 건 열두시 반 쯤이었다. 민규의 머리가 웬일로 허전해서, 권순영은 나막히 모자 안 써도 돼? 하고 물었다. 김민규는 그냥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 말았다. 김민규도 나름대로 자신을 보내주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내내, 김민규와 권순영은 쉴새 없이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의 진통제는 생각보다 약효가 좋았다. 안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둘은 온갖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따라 부르기 바빴고, 안양에 도착해서는 별이 잘 보일만한 곳을 찾는다는 핑계로 이곳저곳을 바삐 구경하였다. 박물관에 가서는 아직 해가 밝다는 이유로 전시관 구경을, 어느 공터에서는 근처에 유명 떡볶이 집이 있다는 이유로 군것질을, 또 어딘가의 산자락에서는 근처에 계곡이 있다는 이유로 괜한 물장난을 했다. 권순영은 그 모든 순간에 연신 웃음을 터뜨리기 바빴다. 계곡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푹 젖은 김민규가 기어이 권순영을 품에 꽉 껴안았다. 아 차갑다고 김민규! 그렇게 괜한 소리를 해도 김민규는 놓아줄 생각이 없는 양 제 허리를 더 힘껏 감아올 뿐이었다.
김민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제 당신을 떠날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혹시 미울까. 아니면 꿈에라도 붙잡고 싶을까. 물에 젖었음에도 김민규의 체온은 여전히 따스했다. 언제나와 같이. 그래서 권순영은, 아주 천천히 김민규의 어깨를 밀고는 그 품에서 빠져나왔다. 제 몸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음을 느낀 탓이었다. 권순영은 저보다 한 뼘은 높은 얼굴을 가만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글자 하나하나를 간신히 씹어가며 입 밖으로 뱉어냈다.
민규야.
우리 이제 갈까?
여름은 머지않아 절정을 맞을 것이다.
짧은 꿈은 끝났다.
이제는 정해진 결말으로 나아갈 때였다.
*
둘이 자리를 잡은 곳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정자였다. 문이었다. 적당히 산 중턱에 걸쳐있는 탓인지 높은 건물 따위가 시야를 가리는 일은 없었다. 날이 흐려 별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실 정말 실낱같은 하늘만 볼 수 있다면 별은 선명하든 희미하든 크게 상관이 없었기에 차라리 다행이었다. 두 명은 넉넉히 앉을 크기의 정자였으나, 김민규는 꾸역꾸역 권순영의 바로 자리를 비집고 앉아선 까만 밤하늘을 가만 올려다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김민규는 별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쉽다느니 같은 말을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형. 형이 사는 별은, 여기서 보면 어디쯤에 있어? 많이 멀어?
김민규가 그렇게 묻기에 권순영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둘러보았다. 권순영은 잠시 고민하다 하도 어두컴컴하여 아주 희미한 별조차도 보이지 않는 하늘 구석을 대충 가리켰다. 권순영은 제 별이 어디있는지는 이미 까마득히 잊은지 오래였다. 그래서 한참을 들여다 보아도 아무 별도 찾지 못할 적당히 어두운 아무 귀퉁이를 손으로 대충 가리킬 뿐이었다. 행여나 하늘에 보이기라도 하면 김민규가 또 오만가지 생각들을 덧붙이며 한참 그것만 볼까봐 그랬다. 아마 저기쯤. 많이 멀더라. 우주선 타고 오는데 얼마나 한참을 걸렸는지 몰라. 그런 말도 적당히 덧붙여 주었다. 그러면 김민규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 컴컴한 너머를 죄다 내다볼 수 있는 마냥 구는 것이다. 그러게. 잘 안 보이는 거 보니까 되게 먼가보다. 형 가는 길에 심심하겠다. 권순영은 굳이 육성으로 대꾸하지 않았다. 응, 정말정말 멀어. 그렇게나 지극히 멀어서 사실 내가 이 지구에 올 때부터 돌아가는 법을 잊었던 걸지도 몰라. 그래서 이제 한 번 그 먼 길을 짚어보려고. 그렇게 속으로만 간신히 말을 붙였다.
권순영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김민규는 혼자서 말을 잘 이어갔다. 속도가 아주 빠르지 않고 잔잔한 말씨를 써서, 이제 조금씩 깜빡이기 시작하는 권순영의 귀에도 김민규의 목소리는 흩어짐 하나 없이 선명하게만 들렸다. 형 멀미할지도 모르니까 멀미약도 챙기고. 가는 길에 밥 거르지 말고. 기왕 돌아가는 김에 형 고향 별에 있는 컨텐츠들도 좀 야무지게 즐기고 그래. 형이 형 입으로 그랬잖아. 형 도파민 찾아서 왔다며. 그런 시시콜콜한 말들을 늘어놓는 김민규의 마음을 권순영도 아주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서 권순영도 그와 비슷한 온도의 말들을 내뱉았다. 너야말로 나 없다고 춤 연습 대충하지 말고. 닭가슴살 맛 없다고 식단 실패하지 말고. 운동 열심히 하고 관리도 좀 하고 그러구 살아. 너 자기애 넘치는 거 다 아니까 그거 좋은 쪽으로 쓰라구. 권순영은 이제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떠야 했다. 그러다 김민규가 문득 말을 뱉었다.
형.
다시 올 거지?
김민규는 그렇게 입을 열었다 황급히 다시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니야. 그거보다도...
올 수 있으면, 와 줄 거지?
...오고 싶을 거지? 다시 여기로.
그 말을 하며 김민규는 컴컴한 밤하늘에서 시선을 돌려 다시 권순영의 얼굴을 바라 보았다. 두어번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던 권순영 역시 그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김민규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흐릿한 시야에 오로지 김민규의 얼굴만이 또렷하게 잡혔다. 김민규는 크게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언제나와 같이 더웠다. 권순영은 무어라 더 덧붙이지 않고 그냥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어. 그렇게 말하며 김민규는 권순영의 손을 꽉 붙잡았다. 권순영은 지금 자신의 몸이 차가울지 뜨거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언제나 열이 많은 권순영의 몸은 원래대로라면 뜨거웠어야 할 테지만, 신체의 모든 전력이 하나 둘 꺼지고 있는 지금은 몸이 아주아주 차가울 것도 같았다. 그래서 권순영은, 그냥 지금 제 손을 잡아챈 김민규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적당한 체온이기만을 바랐다.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게. 뜨뜻 미지근하게. 그래서 김민규가 놀라지 않을 수 있게.
권순영은 다시 한 번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닿은 너머로 김민규의 맥박이며 심장이 펄떡이는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생의 흔적으로 아주 선연하게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다. 권순영과는 아주 상반되도록. 권순영은 찬찬히 김민규가 제게 건넨 말들을 곱씹었다. 그건 권순영을 다그치기는 커녕, 올 수만 있다면 혹시 다시 와줄 수 있냐며 아주 조심스레 부탁하는 청유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여기로 혹시 오고 싶을 거냐고. 그 먼 우주에서 혹시 이 푸른 별이 간혹 떠오르를 것 같냐고. 그러다 어쩌다 가끔 김민규의 생각이 난다면, 또 마침 절묘하게 올 수 있을 것만 같은 상황이 기적적으로 벌어지기까지 한다면.
그런 순간에는 또 나를 곱씹어 줄 수 있겠냐고.
권순영은 김민규가 자신에게 그렇게 묻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에 대한 답은 너무나 뻔하다고도 생각했다. 권순영은 너무나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니까. 애초에 권순영이 여기에 오고 싶지 않을 이유는 사실 하나도 없으니까. 권순영은 김민규에게 지는 법 따위는 진작 까먹은 채 살았다. 그게 무엇이라도 권순영은 순순히 따를 테였고, 더욱이 자신을 찾아줄 수 있느냐는 지극히 당연한 말은 애초에 부탁하지 않아도 당위처럼 권순영에게 머물 것들이었다. 권순영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앳저녁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하나 뿐이었다.
영영 올 수 있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권순영은 차마 그 말들을 입으로는 뱉지 못한 채 고개만 간신히 끄덕인 것이다. 권순영의 시야가 조금씩 꺼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정말로 소멸이 머지 않은 것이다. 권순영은 오래 숨을 고르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입을 뗄 수 있었다. 목소리가 갈라지지 않도록, 말들이 행여나 떨리지 않도록 부던히 애를 쓰면서.
민규야.
잠깐 눈 감아봐.
하고.
빨리. 나 할 말 있어서 그래. 그렇게 재촉하자 김민규는 순순히 눈을 감는다. 그제야 권순영은 시선을 내려 자신을 마주하지 못할 김민규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으로 쓰다듬었다. 벌벌 경련하듯 떨리는 몸을 애써 진정시키며 김민규를 물끄럼 바라보기만 했다. 넌 내 취향은 아니지만 진짜 잘생기긴 했어. 언젠가의 권순영은 그렇게 말했던 것도 같으나, 사실 그건 전부 일부러 얄밉게 굴기 위해 만들어낸 거짓말이었다. 따지자면 김민규는 권순영의 천 년의 완식에 훨씬 가까웠다. 물론 천 년보다 좀 더 되기는 했겠지만. 권순영은 그 얼굴을 한참 보고서야 비로소 말들을 골라낼 용기가 났다.
민규야, 있지. 내가... 진짜 많이 고마워. 무슨 뜻인지 알지. 나도 내가 너한테 엄청 멋대로 군 거 나도 알아.
근데 사실 그냥 미안해서 그랬어.
나는 가야하잖아. 어쩌다 네가 나한테, 아니면 내가 너한테 정을 붙여버리면 어떡해. 그러면 너무 슬퍼지잖아.
근데 너는 자꾸 나보고 아니라고 했어.
안 슬프다고 그러고, 지우지 말라 그러고. 기꺼이 네가 부표가 되겠다고. 매번 그런 말만 하잖아.
그래서, 그래서...
거기까지 말을 이은 권순영은 잠시 뜸을 들였다. 김민규는 여전히 권순영의 말대로 정말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조차도 정말 지극히 김민규 같았다. 권순영은, 언제나 자신을 보던 김민규의 더운 시선을 떠올리며 눈 감은 김민규의 얼굴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시선으로 다독였다. 눈꺼풀이 떨리는 탓에 시야가 자꾸만 흐려져서 권순영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이며 애써 또렷하게 초점을 맞췄다. 쌍꺼풀이 짙게 있는 눈도, 잘 빠진 눈썹도. 오똑하면서도 끝자락에 귀여운 초코칩이 하나 있는 코도. 미운 말을 할줄 모르는 입도 전부 다. 아주 가슴에 꼭꼭 새기고 또 새겼다. 잊지 않을 수 있도록, 아주 새삼스러울 정도로 그 얼굴을 계속해서 살폈다. 김민규 없이도 김민규를 그려낼 수 있도록. 아주 지문마냥 선명히 박혀버리도록. 그렇게 전부 다 선명하게 새겨내고서야 권순영은 가장 하고 싶었던 마지막 말을 꺼내었다.
...미안해.
민규야.
그렇게 권순영이 부르는 이름 뒤에는 실은 꺼내지 못 할 미안해라는 말 한 마디가 한 번 더 붙어 있었다. 민규야, 너 혹시 나보고 형은 참 거짓말 못한다고 놀렸던 거 기억하니. 넌 매번 나를 마주칠 때마다 항상 그 말을 하더라. 그래서 이번 거짓말은 좀 잘 해보려고 정말 엄청 노력했어. 웃지도 않고 울지도 않고, 그렇게 하나도 티 안 내면서 최대한 의연하게 있어보려고 부단히 애를 썼어. 웃지 않는 건 네가 자꾸 옆에 있어서 결국 엄청 많이 실패했지만. 그래도 우는 건 잘 참았으니까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너한테 정말로 하고 싶었던 거짓말에는 물론 사실은 여기를 떠나기 싫다는 칭얼거림이나, 너를 내가 정말 무수히 소중히 여긴다는 투박한 말들도 당연히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하고 싶었던 거짓말은 내가 영원히 소멸한다는 걸 네가 영영 모르게 하는 거였어.
그래서 결국 여기까지 왔는데.
그럼 이만하면, 나 잘 한 걸까. 잘 한 거겠지. 적어도 나는 정말로, 정말로 열심히 그리고 많이 힘을 낸 것 같아.
김민규.
한 번 더 그 이름을 부르면,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훨씬 자신의 목소리가 일렁이고 있음을 스스로도 느낄 수 있었다. 김민규. 그래서 사실 나는 내내 고민했었다? 내가 맞는 선택을 한 건지 도무지 생각해봐도 잘 모르겠는 거야. 내가 내 전부를 잃더라도 너의 기억을 아주 지워버리는 게 좋았을까, 아니면 지금처럼 네게 이런 거짓말을 늘어놓고서 이기적이게도 네가 평생을 기다리게 하는 게 맞았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사실 나 죽는다고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게 옳았을까. 나는 비겁하게 온갖 거짓말을 늘어놓고선 내가 너의 평생이 아니기만을 오래오래 바랄 뿐이었어. 네가 딱 그 천 이백일 남짓만을 날 기억하기를 바랐어. 그걸 최대치만큼의 욕심으로 하기로 스스로 결정했어. 그 이상이 되면 네가 너무 아플지도 모르잖아. 나는 정말 직전의 직전까지도, 그러니까 지금 여기에 앉아서 너를 바라보는 이 순간까지도 사실 그런 고민들을 했어. 근데 그래도 막상 이렇게 닥치게 되니까 도무지 모르겠는 거야.
어떤 게 맞는 답인지는 정말로 영영 모르겠는데,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그냥
그냥 죽기 싫어지기만 하는 거야...
권순영은 그래서 그 뒤로 말을 잇지 못했다. 숨이 가빠졌다. 민규야,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자꾸 죽기 싫어졌어. 웃기지. 나쁘지. 못됐지. 근데 나는 너무 좋았나봐. 너랑 그냥 같이 자고 깨는 것도 좋았고,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는 것도 좋았고, 어쩌다 가끔 나란히 영화를 뒤적이는 것도 좋았고. 내가 심술궂게 굴어도 그 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다정하게 굴어주는 네가 정말 좋았어. 나보다 한 뼘 넘게 커다래서 네 품에 꽉 안길 때면 원래도 너 뿐인 네 세상이 더욱 생생한 것 같았어. 네가 바쁘면 바쁜대로 한가하면 한가한 대로 그것 역시 전부 좋았어. 너는 모든 틈에 나를 끼워 넣어 주었잖아. 너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도 나를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더라. 별 것 아닌 걸로도 가슴이 일렁여서 이 커다란 세상이 너 하나로 가득 차는 것만 같은 느낌을 주더라. 너랑 있으면 네 빛이 나한테 옮는 기분이었어. 초라하기만 한, 별이 되지도 못할 내가 네 빛을 받아서 정말로 반짝이게 되는 느낌이었어. 진짜 별이 된 것처럼.
그래서인가봐. 그래서 내가 자꾸 욕심을 냈나 봐. 내가 가야한다는 걸 너무 잘 알았는데. 영영 지워질 걸 누구보다도 너무 선명하게 알고 있어서, 내가 너에게 큰 의미를 가지지 않기를 바랐는데. 내가 기어이 너에게 큰 존재가 되어버려서 네가 꿈결에라도 아파할 일이 없기를 정말 간절히 소망했는데. 근데 네가 나한테 이만큼이나 커져버려서. 너도 나를 보면 그런 비슷한 느낌을 아주 조금이라도 받았으면, 하고 생각하게 되었어. 가슴이 몽글몽글해지는 느낌을 나도 너에게 줄 수 있었으면 했어. 근데 그 마음이 자꾸 커지더라. 한 번만 하던 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어서 결국 여기까지 왔어. 나는 너를 기필코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할 텐데도. 내 이기심 하나로. 너에게 무언가를 남기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정도면 되지 않을까, 자꾸 합리화하면서 네게 자국을 남겼어.
진짜 못났지. 미안해.
아주 예전에, 아마 김민규는 기억조차 하지 못 할 날들에. 권순영이 혼자서 그런 말들을 곱씹고 있을 때면 언제나 김민규가 그런 권순영을 기필코 찾아내고야 말았다. 김민규는 그런 권순영에게 무언가 더 묻지도, 잔소리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찾아내고서는 훌쩍이는 얼굴을 닦아주고 달래주기만 할 뿐이었다. 권순영은 그럴 때마다 항상 김민규에게 전부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했지만, 매번 김민규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곤 했다.
너는 내가 그러고 있다는 걸 항상 어떻게 알아채는 거야.
그럼 김민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답하곤 했다. 그냥 알아. 형이잖아.
이번에도 그래서였을까? 권순영이 한참 말을 잇지 못하는 동안, 김민규는 여전히 눈을 지긋이 감은채 또 권순영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것이다.
순영아.
잘 가.
권순영은 결국 숨을 삼켰다. 잘 가라는 두 마디에 참 많은 순간들이 삼켜졌다. 네게 결국 나를 남겨서 미안해. 그게 너를 아마 아프게 할 것이라는 것도 알아. 그치만 욕심이 났어. 민규야. 실은 단 한 순간도 떠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나는 너라는 핑계를 대고서 자꾸 그런 행동을 하게 됐어. 못 되먹었지. 알아, 미안해.
그렇게 나쁜 나니까, 나는 네게 남은 내가 너무 길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는 그냥 좋은 것들만 기억하면 정말로 좋겠어. 그래서 그 좋은 것들만 가지고 살다가 이제 슬슬 슬퍼질 것 같으면 그냥 전부 버리고 잊어버릴 수 있으면 기쁠 거 같아. 너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건 실패했으니까, 나는 이제 너에게 딱 그정도의 존재만 되었으면 해.
민규야.
나 사실 죽어보는 건 또 처음이야. 신기하지. 외계인이라서 산도 바다도 우주도 전부 다 가보고 지긋지긋한 시간 동안 온갖 걸 다 해봤지만. 하필 또 죽어보는 건 처음이네. 그게 하필 또 네 앞이라서. 나는 사실 조금
어쩌면 많이
무섭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사실 정말로 가고 싶지 않지만
...그치만 내가 그래야만 한다니까 또 해야지. 그치? 네가 잘 가라고 해줬으니까 한 번 잘 가봐야지.
응.
나 이제 갈게, 민규야.
그리하여 권순영은 오래지 않아 김민규의 마지막 통신에 대한 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안녕
...안녕, 민규야
안녕
그리고 그게 기나긴 권순영의 진정한 끝이었다.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울었을까. 그건 이제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는 그 거짓말을 기어코 완벽히 마무리하고야 말았으니까.
한다면 하는, 김민규가 아주 지극히 잘 아는 그의 성미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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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야 있잖아 나 사실
정말 오래도록 너에게 하지 못한 말이 하나 있어
나는 너를
어쩌면 너의 모든 생에 걸쳐서
그리고 나의 무수한 순간들과 더불어 기어이 너를
이별에 아무리 새겨넣어도 모자랄 만큼 너를 안고 또 안아서라도
그래서 가능하다면 정말로
영원히 너를
영원히
그것이 결국 영영 닿지 않을 메아리에 불과할 지라도
민규야
나는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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