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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순영네 집은 그리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편에 가까웠다. 친구들끼리 여행이나 용돈을 받아서 놀러간다고 했을 때 순영의 모습을 보기란 먹구름 낀 하늘에서 별 찾기와 비슷했다. 그 정도로 순영은 모습을 쉬이 드러내지 않았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같은 경우에도 독학으로 처리했다. 이유야 당연히 자금이 적어서 그런게 아니겠는가, 유치원 정도야 기본 예절만 가르쳐서 올라가게하면 되는거니까 더 쉬웠다. 초등학교 같은 경우에는 다르겠지만 아직 어려서 그것이 가능했을지 모른다. 물론 순영은 매일같이 그의 어머니가 펼치는 책을 마다하고 밖에 나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한바탕 구르고 왔지만 말이다.
2.
어린 아이는 더 빠르게 자라난다. 덕분에 5살이었던 그의 나이가 순식간에 8살로 휙휙 넘어갈 수 있었다. 이 말은 즉슨, 곧 학교라는 곳에 입학해야 한다는 뜻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순영은 9살에 학교라는 곳에 가볼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게도 불우한 가정 환경 탓이 컸다. 순영을 학교에 보낸다면 내야하는 돈이 몇 배로 뛰어버리니까, 안 그래도 저 넘쳐나는 에너지를 못 풀어서 곤란할 정도인데.일단 학교에 간다면 꽤 많은 자본이 요구된다. 태권도 학원같은 곳에 보내야지 친구들과의 친목도 쌓고 할텐데, 그럴 돈이 없으면 왕따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조금 더 돈을 모은 후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래봤자 몇 백만원 모으는게 고작이었지만. 고졸을 환영해주는 고수익 직장은 흔치 않았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돈도 빌리고 다니는 꽤 자식에게 희생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도 그러했고. 그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위해서 간이나 쓸개를 내다 줄 수 있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물론 줄 수 있는 남은 간이라곤 우엽 뿐이다. 좌엽은 이미 빈약한 통장의 연약한 기둥 일부가 되었다.-
3.
초등학교를 갓 입학하게 된 순영이 기대에 부푼 마음으로 검은 가방끈을 양 손으로 단단히 고쳐 잡았다. 어머니도 순영 못지 않게 행복에 겨운 표정이었다. 그의 누나는 고사리보다도 작은 그 손에 초콜릿 바를 쥐여주며 다른 손으로 문을 열었다. 앞으로 펼쳐질 행복들을 생각하기에도 벅차서 그들은 그저 긍정을 품는게 다였다.
순영은 친구들과 학교에 가서 어떻게 놀지를 연구하며 햇살보다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 미래란 찬란하고 빛나는 것이었으니.
열린 문 틈 사이로는 햇빛이 있었다. 문을 활짝 열고 앞으로 전진한다. 밝은 빛이 눈을 찌르고 순영은 주춤하며 그 작은 손으로 이마에 손바닥을 올렸다. 그의 하나뿐인 누나가 큽,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겹쳐 준 것은 비밀이다.
4.
“잘 다녀오렴, 다치지 말고! 친구들이 막 괴롭히면 엄마가 다 무찔러 줄테니까 다 말하고. 알았지?”
방긋 웃으며 말한 그 애정의 잔소리가 듣기 싫은지 순영은 귀를 틀어막았다. 누나는 심드렁한 얼굴로 등을 휙 돌며 순영의 손을 잡고 먼저 삐그덕대는 나무 계단으로 내려갔다. 벌레가 기척을 느끼자마자 화들짝 놀라 전부 달아나고, 그 뜨거운 공기가 순영의 볼에 잔류했다. 누나 나 더워… 좀만 참아, 곧 도착할거야. 습하고 더운 집에서 출발한지 몇 분이나 됐다고 순영이 칭얼거렸다. 검은 가죽 가방을 쥔 손에 땀이 찬 것인지 짧은 호랑이 무늬 반바지에 쓱 닦고선 다시 잡기도 했다.
확실히 덥기는 했다. 너무나 눈부셔서 콩알같은 순영의 눈이 더 작아졌다. 그의 친구가 본다면 비웃으며 놀릴 만큼이었다.
“언제 도착해?”
“응, 곧 도착해.”
거짓말이다. 부모님 형편에 그나마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려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쯤이 적합했기에 학교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순영의 누나 하영은 그 사실을 눈물로 호소하는 어머니 때문에 깨달았다. 굳이 알고 싶지 않았는데 ㅡ집과 학교의 거리가 이렇게나 먼 까닭을.
하영은 순영에게 이 사실을 말해준 적 없다. 돈 개념이 부족한 나이일 뿐더러 알려주기엔 너무 더러운 사회의 뒷편이어서. 머리가 좀 더 자란 후에 말해도 늦지 않는다.
5.
순영은 한계에 들이 닥치거나 너무 긴장하면 주먹을 꽉 쥐는 습관이 버릇처럼 남아있다. 어머니는 그것을 고치라 말하시지만 어쩌겠는가, 옷에 스며든 물처럼 짜버린다고 해도 이미 수분기가 충분히 남아버리는 걸.
순영이 주먹을 너무 꽉 쥐어 손바닥에 고스란히 손톱 자국을 남기고 나서야 학교 정문이 겨우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멀기도 해라, 하영의 이마엔 땀이 송글 맺혔다. 하지만 또다른 절망적인 사실 중 하나를 말해주자면 하영은 중학생이다. 순영이 다니는 초등학교와 뛰어서 7분 거리 정도에 위치한 중학교에 다니는.
“누나 이제 갈게, 친구들이 괴롭히면 누나한테 말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는 누나의 모습을 그리던 순영이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잘가라고 대답해줬어야 하는데.
6.
이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 줄줄 새는 발음으로 중얼거린 순영은 천천히 학교로 들어섰다. 가는 길에 마주친 색이 3개로 나뉜 얼룩이-순영이 지은 이름이다.- 도 마주쳤다. 웬만하면 도망치는 녀석인데 오늘따라 꼬리를 흔들며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을 지나칠 수 없어 머리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히히, 기분 좋다… 순영이 잔뜩 늘어진 모양새로 바보처럼 헤실 웃었다.
잔뜩 쓰다듬받던 고양이가 갑작스럽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리고 저 멀리로 사라질 듯 네개의 다리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것이 마치 누나와 닮아 있어서 순영은 얼룩이에게 무언가의 호감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됐었을 것이다. 물론 순영은 그 사실을 체감하지 못했지만.
7.
무엇을 했는지도 모르는데 학교에선 예비 종 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영의 귓가에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온 몸에서 내뿜는 열기가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짧은 다리로 총총 뛰니 겨우 신발장에까지는 닿았다.
휴우우우… 안도의 안숨을 푹 내쉰 순영이 새 것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신발을 실내화로 교체했다. 진짜 큰일나는 줄 알았다… 순영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숨이 거세다. 여러 번 숨을 폐 끝까지 욱여넣어야 겨우 괜찮아지는 강도의 힘듦이었다.
하지만 고난이 이뿐이랴, 엄청난 계단의 향연에 결국 순영은 무릎을 꿇을 뻔 했으나 ㅡ 그가 누군가. 권순영이다. 자존감 덩어리로 똘똘 뭉친 권순영이란 말이다. 포기란 사전에 없다!!
8.
“순영이 위험했어요~ 자리에 어서 앉읍시다!”
“네헤엑, 훅, 흐악,”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시키며 눈 두덩이를 꾹꾹 누르는 순영 주위로 친구들이 모여 들었다. 또 지각할 뻔 했다며,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는 그 순간이 익숙했다.
“권순영! 지각했으니까 춤 춰줘!"
친구들의 시덥잖은 장난에 순영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요즘 몸이 근질근질해서 안달이었던 모양이다. 지각하지도 않았지만 순영은 몸을 뚜둑 풀었다. 귀에 걸린 미소가 그 나잇대의 어린이다웠다.
9.
순영은 어린 나이답지 않게 꽤 폭발적인 힘으로 친구들이 추천해주는 춤을 전부 한 번에 보고 춰냈다. 그것이 그저 즐거웠다. 자신의 장래희망도 댄서 라고 적었다. 그만큼 그 일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태권도 선수해 볼 생각 없냐 그랬지만, 순영에게는 춤이 더 끌렸다. 본능적인 것이었다.
"우와, 순영이 잘 추네."
지나가던 원우쌤이 그리 칭찬해줄 정도였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은가. 순영은 선생님이 쉬는 시간에 빌려주시는 공공 노트북으로 춤을 연습했다. 집에 전자기기는 물론 전화기도 없어서, 이런 걸 직접 보고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이었다.
순영은 이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들에게. 이를 테면, 얼룩이라던가, 호랑둥이라던가.-순영이 정말 아끼는 호랑이 인형이다. 그 집에서는 가장 비싼 물건 탑10에 든다.-
10.
순영은 오늘도 학교에 가서 춤을 출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누나의 손을 꼬옥 붙잡고 히히 웃는 낯이 지독할 정도로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그 어떤 불행이 오더라도 그의 밝음 앞에서는 한 수 접고 갈 정도였다. 순영은 방방 뛰며 낡은 철문을 끼익 열었다.
친구들의 박수 소리와, 함성 소리가. 어제 원우 쌤한테 들었던 그 칭찬이. 너무나도 달아서 순영은 그저 춤을 추게 되었다. 그것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수업시간마다 자고, 쉬는 시간마다 귀신같이 일어나 춤을 추는 걸 알면 어머니가 왕창 혼내시겠지만... 순영은 그 사실을 외면하며 품 안에 호랑둥이를 안았다.
열린 문 틈 사이로는 눈이 실명될 듯 밝은 햇빛이 집 안에 드리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슬며시 가리는 엄청 커다란 남자. 검은 양복을 입고 손에는 순영이 좋아하는 쨍한 계열의 색깔 스티커가 들려 있었다.
11.
"여기, 권성은씨네죠?"
남자가 고개를 불쑥 내밀더니 중얼거렸다.
"아, 네. 맞는데 무슨 일..."
"연락 못 받으셨습니까?"
순영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손을 가지고 어머니 소매만 죽죽 늘렸다. 한글도 방금 깨우친 거나 다름없는 그에게 두 어른의 말은 이해하기 어려울 뿐더러 무어라 얘기하는지 조차 들리지 않았었다. 기껏해봐야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남자를 경계하면서도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를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머리가 자란 그의 누나는 그들의 말을 듣고 사색이 되더니,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지으며 칭얼거렸다. 전부 엄마 탓이라면서.
누나는 가방을 바닥에 내던지며 끼익거리는 나무 계단을 거침없이 밟아 내려갔다. 순영은 이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빤히 도망치듯 뛰쳐나가는 누나의 어깨만 바라볼 뿐이었다. 문 밖으로 빠르게 뛰어가는 것이 마치 고양이같았다. 전에 보았던 얼룩이. 왜 그것에 누나를 비쳐보았을까. 순영은 눈을 감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노래에도 흥이 끌어오르지 않았다. 한없이 가라앉았다.
12.
아, 그래. 그의 누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상처도 완전 많았었다. 순영의 손으로 세기엔 수없을 정도의. 고양이또한 그랬었다.
"누나! 어디가?"
밝은 목소리의 순영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아스팔트 도로를 달려가는 누나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르고 졸라서 겨우 한 갈색깔의 어깨까지 오는 머리카락이 허공을 흩날리며 빠르게 사라졌다. 여름에도 항상 긴 소매의 옷을 고수하던 누나의 옷이 바람에 살짝 들쳐 보였다. 아빠가 낸 상처와 매우 흡사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순영의 손에는 누나가 쥐여준 초콜릿 바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맘껏 주물럭대며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지?
계속 문 쪽에 있던 순영은 점차 더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오늘 날씨도 날씨지만, 그것보다 앞서서 한 발 내딛으면 벌레가 튀어나오는 나무 집에 에어컨과 선풍기라곤 없었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바람도 이젠 불지 않았다. 무척 더웠다. 순영이 옷을 펄럭거리며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13.
"엄마, 나 학교 언제가? 나는 학교가 더 좋은데, 집은 너무 더워."
유치가 빠져서 줄줄 새는 발음으로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검은 아저씨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집에 그 붉은 스티커를 마구 붙이고 문을 닫아주었다. 어머니는 순영을 보자마자 안으면서 엉엉 울었다. 동물의 포효같았다. 그는 우는 것을 별로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물론 울면 어머니와 누나가 달려와 뚝 그치라며 뒷말을 덧붙이고 관심을 주었기에 아주 가끔 그러긴 했지만 말이다. 뭐라 그러면서 달래주었더라, 아빠가 때릴지도 몰라, 였나? 역시나 모르겠다. 순영은 턱없이 작았다.
어머니가 순영을 계속해서 토닥여주었다.
"... 일주일 밖에 안 남았어, 어떡해... 순영아... 이 엄마 탓이야, 네 누나가 도망간 것도, 너네 아버지랑 결혼한 것도, 내가 가난한 것도... 전부 내 탓이야 순영아... 엄마 어떡해, 어떡해..."
순영의 어깨는 천천히 무채색의 습한 것으로 물들었고, 어머니가 세일 한다고 동네 마트에서 사준 회색 티셔츠는 금세 색이 진해졌다.
순영의 속이 따끔거렸다. 다리가 저렸다. 그도 곧 이 요상하고 불행한 감정에 붙잡힐 것만 같았다. 그래도 꾹 참았다.
"... 우리 순영이 다 컸네."
그녀는 순영의 짧고 복실복실한 머리카락을 원없이 쓰다듬었다. 이젠 그러지 못할 수도 있어서.
14.
ㅑ
순영은 그 일 이후에 누나의 머리카락 한 올도 못 봤다. 누나가 가,ㅊ,가추,ㄹ... 역시 발음이 너무 어려워서 일까 그는 간단한 두 글자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심지어 엄마도 요새 집에 잘 안 들어왔다. 보고 싶었다. 아빠는 누나랑 엄마가 무척 싫어하지만 그래도 순영은 지금 찬 밥 더운 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곰팡이가 슬었어도 먹을 수만 있다면 그는 먹었다. 실제로도 그랬다.
노오란 포스트잇이 붙은 밥 그릇에 숟가락을 찔렀다. 그리고 입에 오물오물 넣었다. 밥 맛이 오늘따라 유독 맛없었다, 하지만 순영은 괜찮았다. 엄마가 순영이 다 컸다고 그랬는걸! 그러니까 밥 하나 쯤은 스스로도 먹을 수 있다. 그 쯤이야 이젠 쉬웠다. 눈 감고 죽 먹기였다. 아, 이거 아니었나? 뭐 어쨌든. ...그나저나 오늘은 밥이 유독 부슬부슬했다. 입 천장이 까슬했다.
발을 동당거리며 식탁에서 리듬을 탔다. 그저께, 순영이 반 아이들 앞에서 춤을 췄는데, 다들 엄청 멋있다고 해줬다. 반응 없기로 유명한 원우쌤이 지나가다가 이번엔 박수까지 쳐주시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었다. 그 때 순영은 온 몸에 피가 들끓는 기분을 다시금 느꼈다. 엄마가 순영을 위해 값비싼 호랑이 인형-호랑둥이가 맞다.-을 사줬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15.
똑 똑 똑 -
노크 소리다. 누나일까? 엄마여도 좋다. 아니, 아빠여도 좋았다. 지금은 너무 외로웠다. 호랑이 인형을 품고 있어도 이 감정은 해소되지 않았다.
"계세요~?"
"안돼요! 차라리 그럴거면 제 장기라도 팔아먹으세요, 네? 저 작은 얘가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가난한 게 죄지, 그럼 뭐가 죄야!"
문을 열려고 의자에서 점프한 순영과 누군가의 허리를 잡으며 필사적으로 막고 있는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왜 울고 있지? 순영은 엄마가 울었을 지라도 얼굴은 본 적 없었다. 한껏 일그러지고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듯한 엄마의 표정을.
"뭐든 할게요. 그러니 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새끼만은 살려주세요. 네?"
엄마는 순영의 앞에 서더니 무릎을 꿇고 우람한 체격의 남자들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손을 싹싹 빌며 울었다. 가장 앞에 있던 남자의 양발이 찐하게 젖었다. 순영보다 몇 배는 컸다. 아니, 그 말은 부족했다. 순영은 태어나서 아빠보다도 큰 몸집의 사람은 처음 보았다.
"뭐든 한다 그랬다? 야, 저 애새끼 내보내."
"엄마? 잠깐만여, 엄마, 엄마!"
"순영이 사랑해, 엄마가 엄청 많이 사랑해, 그러니까 우리 순영이는 절대로, 이렇게 되면 안돼? 엄마가, 사랑해, 그러니까 멀리 도망쳐야 해. 아주 멀리로."
16.
남자 한 명이 순영을 짐 나르듯 어깨에 실어 밖에 내동댕이 쳤다. 엄마는 방 안에 끌려가면서도 순영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남자들이 실실 웃었고, 근처의 여자 한 명은 겁에 질린 얼굴로 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울부짖었다. 과거의 엄마처럼. 그러다가 혀를 씹었고 순영을 날랐던 그 남자가 피식 웃었다.
쾅 - !
문이 닫혔다. 엄마가 순영을 버렸을까, 아니. 그럴리 없었다. 하지만 순영의 뇌리에 마지막 말이 박혀서, 그래서 그는 결국 그 나무 계단 아래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누나의 감정이 이랬을까, 모든 게 거짓이었으면 좋겠다.
17.
집은 잘 방음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집에 계실 때면 누나는 순영의 손을 잡고 근처 놀이터에 가서 시간을 때웠다. 물론, 그런다고 구슬픈 귀신 소리와 아빠의 분노가 귀에 박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집의 방음이 심각하다는 걸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순영또한 알고 싶지 않았다.
...엄마의 괴로운 외침이 연이어 들리자 순영은 두 귀를 막고 엄마의 말 대로 멀리로 도망쳤다. 아주 멀리로, 집이 보이지 않을 만큼. 여태껏 와본 적 없는 아주 외지고 허름한 곳으로. 그리고 몸을 웅크렸다.
미래가 싫었다. 차라리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담임 선생님이 들려주었던 피터팬 얘기를 들으며 춤 췄던 그 때였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게 꿈이었고 순영은 그저 끔찍하고 참담한 악몽을 꾼 것 뿐이었으면 좋겠다. 마른 침을 삼켰다. 너무너무 건조해서 물이 닿자마자 따가움을 느꼈다. 그것이 이곳은 네버랜드가 아니라 일깨워주는 듯해서, 순영은 더욱 고개를 아래로 파묻었다.
순영은 울었다. 아주 조용하게, 아무도 그를 찾지 못하도록. 설령 찾아도 죽은 것이라 오해해 내버려두도록.비가 내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풀벌레 소리 가득 차 있었다.
아무도 보기 싫었다.지금은 혼자가 좋았다. 외로움을 그 누구보다도 잘 타는 순영은 생각했다.
더욱 몸을 웅크렸다.
누나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다면 누나는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겠네. 나는 바보같이 누나를 기다렸던 거고.
18.
비가 더이상 몸에 닿지 않는 듯한 기분까지 느꼈다. 눈을 슬그머니 뜨니 잡초 위에 이슬 하나가 있었다. 그것이 끝에 이르렀을 쯔음엔 거의 잡초가 끊기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이슬을 내뱉고나자 처음 상태로 돌아왔다. 그러기를 반복했다. 순영은 그 과정을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얼마나 굶엇을까. 얼마나 이 진드기와 벌레 많은 곳에서 뒹굴었을까. 등가죽이 뱃가죽에 달라붙는 기분이다. 숨 쉬기도 벅차다. 너무나도 배고파서 토할 것 같은 기분에 순영은 눈을 감았다.
내가 이 곳에서 죽게 된다면, 부디 내가 행복한 네버랜드에서 눈을 뜨길.
19.
정신을 차렸을 땐 아무런 벽지도 없는, 아주 좁은 공간 안이었다. 순영은 그 아저씨들이 자신을 납치해왔나 생각하며 잔뜩 경계했다. 혹시라도 전에 엄마가 얘기했던, 위험한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순영은 이불 속으로 더 파고 들어가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목 뒤로 식은 땀이 흘렀고 눈이 부르르 떨렸다. 눈꼬리가 눈물에 젖어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안 울기로 다짐했는데. 잔디밭에서 한 다짐이 한 순간에 녹아내렸다.
"...끙차."
문 밖에서 난 소리는 놀랍게도 어린 아이의 것이었다. 순영은 있는 눈치 없는 눈치 다 끌어모아 저 사람을 탐색했다. 목소리는 일단 성인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동생같은... 많이 해봤자 한 12살? 잘 모르겠다.
순영은 더더욱 이불에 몸을 맡겼다.
20.
"저는 김민규라고 해요. 나이는 7살."
자신을 주워왔다고 설명한 김민규의 자기 소개에 권순영은 더더욱 의심의 씨앗을 놓치 않았다. 그야 물론, 그보다 어린 아이가 그를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애초에, 그가 왜 이곳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권순영은 안심할 수 없었다. 눈을 가늘게 떴다. 고작 며칠 봤다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김민규는 그를 해치치 않을 것 같다.
저 작은 몸집으로 뭘 할 수 있겠냐만은, 그랬다. 어른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속이려 하는 낌새도 없고.
"...날 왜 데려왔어?"
21.
그 질문을 하고서 그도 놀랐는지 눈이 커졌다. 그래봤자 거기서 거기지만. 순영의 질문에 민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가볍게 입을 뗐다.
"저랑 비슷해 보이는 처지였어서요. 버려진 것 같길래."
민규의 답변에 순영은 다시금 눈을 가늘게 떴다. 너, 나이가 몇인데 나보다 더 고급져 보이는 말을 하는거야. 진짜 7살이야? 순영이 속으로 생각한다고 한 생각들인데 밖으로 삐져 나갔나 보다. 민규가 피식 웃더니 물컵에 손을 댔다. 그 손은 한없이 작았다.
"저도 모르겠어요. 그냥, 모든 게 본능이었어요. 그 순간 제게 이성이란 없었다고 해야하나..."
순영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춤 출 때를 본능이라고 치면, 이성은 뭐지? 아직 학교에서 배운 적 없는 말인데. 순영의 궁금증은 안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이성이 뭔데?"
"...음, 지금 몇 살이에요?"
"나, 9살."
"이름은요?"
"권순영."
"그러면 순영이 형이라고 부를게요. 음, 그러니까... 본능의 반대인 거에요."
간단명료한 설명에도 순영은 모르겠다는 듯 꿍한 표정을 지었다. 마냥 기뻐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그 전에 보이던 의심과 불안, 그리고 슬픔의 감정들은 그나마 무뎌진 느낌. 민규는 내심 속으로 다행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에도 긴장을 풀 순 없었다. 어린 얘들은 모르는 법이니까.
22.
순영은 알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김민규를 보았다. 친구들과 학교 마치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가 오는 김민규를. 무덤덤하게 눈을 돌렸다. 김민규도 그랬다. 밖에서는 아는 척 안하기로 약속했으니까.
회색깔들이 줄줄이 이어져 있다. 아주 길고 커다란 아파트들이. 순영은 그것들을 모조리 지나쳐 아주 허름하고 작은 아파트 공동현관 문을 열었다. 하품이 쭉 나왔다. 하기사, 아침 알바 하느라 새벽 일찍 일어나긴 했지. 반강제였지만... 고맙긴 한데 욕 나오네? 순영이 헛웃음을 내지었다.
생각해보니 제가 오늘 이렇게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순영은 민규가 집에 오면 붙들어 매고 몇 시간이고 화를 낼테다, 하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다짐이었다.
근데 왜 민규가 날 이렇게 일찍 깨웠지? 아무리 천하의 김민규라도 9시 알바를 6시에 깨우진 않았을 텐데. 아닌가, 깨웠으려나. 하지만 내 말의 요점은 그게 아니다. 김민규가 날 터무니 없이 이른 시각에 깨웠다는 게 중요하다.
23.
띠디딕-
아, 김민규다.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민규의 양 손 가득 채소와 식재료들이 있었다. 그의 눈 밑에 내려온 다크서클은 존재감을 뽐내려는 듯 몸을 길게 내뺐다. 순영은 그 식재료들을 받아서 부엌 식탁에 올려뒀다. 김민규가 냉큼 챙겨 냉장고에 차곡차곡 정리해뒀지만.
*
밥 먹을 때를 노려 순영이 반대편에 앉은 민규를 10시 10분으로 노려봤다. 그래봤자 민규의 눈에는 햄스터가 뽀작거리는 모양이었겠지만.
"야, 그러고 보니까 나 오늘 왜 이렇게 일찍 깨웠어?"
"..."
민규가 잠시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커가면서 말수가 없고 잔잔한 성격에서 정반대가 된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근심이 엿보였다. 진짜 뭐길래 저러지? 저래 놓고 아무것도 아니면,
24.
"하아... 나 요새 꿈 꿔."
긍정맨 김민규가 부정을 가득 내비치며 말한 말이 그거였다. 고작 꿈 때문에 김민규가 이런다고? 원래였으면 꿈은 꿈일 뿐이지 하고 지나갔을 녀석인데. 그게 설령 악몽이더라도. 권순영은 더더욱 신경을 기울였다. 밥을 먹기 위해 들었던 식기까지 내려놓았다.
"뭔 꿈?"
그 말을 하고서 다시 숟가락을 들어 국을 퍼먹었다. 맛있다. 부들하고 따뜻한 밥이 온 몸에 에너지를 전달해주는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김민규는 아닌 것 같았지만. 이 정도면 진짜 엄청 걱정된다. 민규가 이럴 정도면 얼마나 부정적인 꿈이겠는가. 한숨을 내쉬던 민규가 말을 이었다.
"말해도 안 믿을 것 같아."
"아니야, 믿을게, 뭔데?"
"...그게, 막 지구 평균 온도가 막 지금보다 5도 높아지고, 백두산 폭발해서 풍비박산됐는데 거기서 또 와중에 외계인 나오는... 봐바 안 믿잖아."
시무룩해진 김민규가 코박고 밥이나 먹기 시작했다. 좀 허무맹랑한 얘기라서 고작 이거에? 싶었지만 뭐 그래도 많이 진지하게 생각 중이니까 권순영도 진지하게 꿈에 대해 발언했다.
"좀 웃기긴 했어."
"..."
순영의 말에 민규는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형은 진짜 내 꿈이 가벼워? 나 진짜 진지한데. 요즘 이 꿈 때문에 일도 손에 안 잡히고, 하루 종일 꿈 생각만 하고. 이런 꿈을 한달 내내 꿔서 더 그런 것 같아. ...권순영 진짜 밉다.
민규는 진짜 삐져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본인은 나름 걱정해주는 순영을 위해 말해준 것이었는데 순영은 냅다 웃으며 이 일을 넘겼다. 생각할 수록 서운해서 민규는 튀어나오는 입술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순영은 달랠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생글생글 웃으며 부엌에서 말했다.
"한달 되면 불러!"
"아오, 권순영!"
명쾌하고 장난스런 목소리에 문을 벌컥 열고 민규가 순영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아 진짜 미안해. 농담이었어! 순영이 민규를 피해 이리저리로 뛰어 다녔다.
에이, 얼마 안 가서 안 꾸겠지. 순영은 마음 편하게 생각했다.
25.
"형, 진짜 어떡하지."
다크서클이 이젠 아예 발 끝에 닿을 기세다. 순영은 흡사 가오나시를 닮은 민규를 보다가 뒤로 주춤 물러섰다. 너 누구야. 민규. 형 동생 김민규. 자연스럽게 티키타카 하던 민규가 갑자기 자리에 주저 앉더니 아예 머리를 쥐 뜯기 시작했다. 뭐 하는거야! 순영이 서둘러 말렸다.
"나, 1년 내내 꾸고 있단 말이야!"
민규의 절규에 순영이 흠칫했다. 뭘? 당연스레 나오는 말이었다. 1년 내내 무얼 꾸고 있단 말인가?
"형, 진짜로 지구 멸망하면 어떡해? 형한테 처음 얘기해줬을 때는 이렇게까지 안 이랬는데, 말한 이후로 갑자기 엄청나게 막,"
민규는 혼돈과 불안에 감싸여진 채로 울먹였다. 당황도 엿보였다. 권순영은 눈에 띄게 당황했다. 김민규가 이리 무너졌던 적이 있던가. 아마 그의 말은 전에, 한 1년 전 쯤에 말했던 꿈에 대한 내용일테다. 그걸 아직까지 꿔? 더욱 당황한 순영이 눈물을 글썽이는 민규의 등을 토닥였다.
"..."
순영은 그를 달래줄 말을 생각해내지 못하고 머리만을 굴렸다. 침묵이 흘렀다. 김민규도 슬슬 진정된 듯 보였다.
26.
"자 형, 일로 와바. 그러니까 지금까지 이루어진 내 꿈에 대한 내용들이거든 이거?"
민규가 종이를 쓱 건냈다. 꿈에 대한 특징들과 현재의 상황이 나열된 글들이었다.
1. 지구 평균 온도 상승 ( 현재 상승 중 )
2. 자연재해 ( 여러 나라에서 일어남 )
3. 혜성 ( 75년마다 나타나야 하는데 갑자기 예고도 없이 나타남)
4
*
*
*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
!1. 호랑이가 외계인한테 잡혀감
"내가 이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맨날 뉴스 보면서 나라 걱정하고..."
김민규가 자신의 비루함에 대해 궁시렁거려도 순영은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종이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였다. 특히 마지막 줄. 일어나지 않은 오직 하나. 그리고 그것이 의도치 않게도 호랑이가 외계인한테 잡혀간다는 내용이라는 것.
순영은 유독 힘겨워 보이는 민규를 바라보았다. 전에는 못 봤던 다크서클이 눈에 띄였다.
"...너, 나 걱정해?"
권순영이 무표정으로 김민규를 바라봤다. 민규의 표정은 오묘했다. 감정이 많았다. 너무 많은 감정들이 들어가 있어 읽기가 어려웠다.
"...내가?"
27.
그들은 무당에 찾아가기로 했다. 혹시 몰라, 이러다가 진짜 권순영이 외계인에 잡혀갈지. 김민규가 세상 걱정에 지쳐 쓰러질지. 복합적인 까닭이었다. 이런 문제로 무당에 찾아가도 되나 싶지만, 이런 문제 아니면 귀신 말고 뭐가 있겠는가. 타로 집이라도 찾아가? 하지만 너무 멀었다. 그들은 여전히 그 낡고 헌 집에 살고 있었기에. 시내, 특히 가게가 몰려 있는 곳은 땅값이 너무 올라서 알바하며 살기 급급한 이들은 이 곳조차도 힘겨웠다. 그래서 타로같은 신문물이 있는 시내 쪽으로 가기에는 절대 무리었다.
"준비 됐어?"
민규가 순영을 챙겼다.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무당집이 있다고 한다. 그것도 아주 용하기로 소문난 무당. 좀 떨어진 곳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좀 많이 멀었지만. 그래서 그들은 물통을 챙겼다. 슬리퍼같은 후즐근한 것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어서 새로 신발도 샀다.
"..."
순영은 처음, 그 신발을 보고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과거를 지울 수 없었다. 그의 꼬리 뒤로 줄줄이 과거라는 빨간 스티커의 흔적이 끈적거렸다.
"형, 가자고."
"아, 엉."
민규가 순영을 보챘다. 순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28.
"진짜, 멀다."
순영이 숨을 헥헥댔다. 아침 이른 시간에 나왔음에도 벌써 해가 뉘웃뉘웃 지고 있었다. 새삼 집이 정말 촌골이라는 것을 떠올린 순영은 무당집 안으로 들어갔다. 헐겁지 않은 문고리가 새로웠다. 정말 새삼이었다.
민규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무당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둘은 그 눈에 작아졌다. 당장이라도 그들을 잡아먹을 호랑이같았다. 분명히 덩치가 크지 않은데도, 아주 오래 전 느꼈던 것 같은 기백이 느껴져 순영은 절로 몸이 움츨어들었다.
둘이 쭈뼛대며 자리에 앉자마자 무당이 책상을 쾅 내리쳤다.
29.
"네가 지구를 이리 만든 녀석이구나."
무당이 매서운 눈으로 순영을 노려보았다. 순영은 그 눈에 지지 않겠노라 생각했지만 역시나 무리였다. 자리 싸움에서 완패당한 강아지처럼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섰다. 숨이 훅 꺼지는 느낌이었다. 순영은 스스로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제발 정신 차려, 권순영. 그 사람은 이젠 여기 없다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김민규는 의문문의 어투가 아니었다. 되려 자신의 것을 침범 당해 이를 올리는, 마치 그의 배우자 같은 면모를 보였다. 순영은 내심 민규의 어깨가 넓다 생각하며 눈을 꽉 감았다. 그리고 다시금 떴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서. 그리 간단하게 과거라는 존재가 부정당할 수 있었다면 민규는 그 날 순영을 만나지 않았을 터였다.
"네가 이 지구에 온갖 재앙을 불러 모으고 있어. 너, 어디 다른 행성으로든 다른 나라로든 썩 꺼져 버려. 얼른!"
무당이 손에 들린 방울을 신명나게 흔들었다. 순영은 상체를 뒤로 조금 이동했다. 과거의 흔적이 온 몸을 더듬었다. 식은 땀이 주륵 났다. 과거에 지지 않겠노라 다짐했는데.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영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숙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서 자꾸만 고개가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이것은, 초자연적인 것이었디.
"...혹시, 좀 더 자세하게 알려주실 순 없으세요?"
30.
김민규는 최대한 유순하게 말하려고 온갖 힘을 다 썼다. 아무리 무당에게 전할 생각을 몇 십번이고 곱씹고 다듬어도 옆에 있는 권순영이 온 몸을 부르르 떠는 것이 눈에 스칠 때마다 핀트가 나가는 기분을 견뎌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하는 말이 또 저거라서, 민규는 입술을 아득 깨물었다. 그러면서도 옆에 있는 권순영을 어깨에 기대게 해주는 행동을 놓치지 않았다. 순영 걱정도 좀 되고, 기분도 좀 나쁘고. 그가 아는 권순영은 저런 말에 조금 긁힐 지라도 이런 반응을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고로 지금 이 행동은, 저 사람의 무언가를 보고 과거를 비춰보고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아무도 보지도. 보이지도 않는 곳으로 멀리 도망가. 되도 돌아보지 말고. 그게 너의 살 길이고, 너희의 유일한 해결책이 될 테니. 하필이면 그 아이 때문에, 이게 무슨 난리니. 얼른 데리고 썩 나가거라. 꼴도 보기 싫다."
무당이 민규에게 타박하듯 말했다. 민규는 절로 어깨가 움츨어 들었다. 하지만 민규의 손에 의해 귀가 막힌 채로 어깨에 기대 숨만 헉헉대고 있는 순영 덕에 그는 작아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게 어딘데요."
"어디든 좋다. 사람이 없으면 돼. 하지만, 한가지 유의 사항이라면 갈 때는 그 아이 혼자서여야만 한다는 거다. 옆에 사람이 있으면 역효과가 날테야. 이를 테면, 네가 저 아이 옆에 딱 붙어서 같이 도망간다면, 그 때는 세계에 종말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이제 말 다 들었으면 빨리 나가라."
무당이 손을 휘 저었다. 흡사 파리 내쫓는 모습과도 비슷했다.
민규는 다시금 입술을 물었다.
31.
민규는 엄마와 아빠가 둘 다 두 명이다. 지독히도 이상했다. 다른 평범한 가정의 부모님은 남여로 딱 2명인데. 왜 저는 그 2배인 4명이란 말인가. 게다가 매번 민규를 보면 그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이들이 그의 입을 막고 있었다. 옆에는 처음 보는 사람의 팔을 꽉 끌어안고 말이다.
그 때마다 민규는 그저 입이 막혔으면 막힌 대로, 뚫렸으면 뚫린 대로 살았다. 무척이나 어릴 때였다. 순영을 만나기도 전인, 지금이 18살이니 아마도 약 13년 전. 솔직히 말해, 그 나잇대의 아이가 도대체 무엇을 알겠는가. 알아봤자 할 수 있는 건 이상함을 표현해내는 것 뿐이었다.
그것을 알아챈 부모님들은 더욱 과감해졌다. 심지어는 두 분 다 11시가 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을 때도 허다했다. 민규는 그 때마다 심심함을 울부짖으며 작은 아기용 침대에서 몸을 낑겼다. 그 스스로 부모님 침대에 들어가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서.
민규는 자기 직전마다 부모님이 민규를 불러주는 목소리를 떠올리며 잤다. 민규야 사랑해, 엄마가 민규 많이 아껴.
그리고 아빠의 까슬한 수염을 느끼며 받던 볼뽀뽀. 아, 민규는 속상해져 눈물이 울컥 터져나왔다.
왜 요즘은 그런 말을 해주지 않는건지. 애초에 왜 얼굴을 보여주지도 않는건지.
민규는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같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이유는 그 작은 머리를 아무리 모른다는 결과만 도출했다. 하지만 그의 뇌는,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허나 그가 단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다면, 부모님들은 서로 메세지로 11시 후에나 들어갈 것 같다고 말하며 뒤를 덧붙였다. 민규 너가 좀 챙기라고.
수천번을 겪은 그도 모를테지. 어쩌면 당연하다. 이것은 무대의 백스테이지의 내용이니까. 앞만을 보며 살던 민규는 알리가 없었다.
32.
방치만 계속 되던 어느 날이었다. 부모님 두 분이 집에 들어오는 길의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선 서로를 쓱 훑어보더니 둘은 무언가 통했다는 듯 피식거렸다. 침대에서 홀로 외롭고 쓸쓸히 자고 있는 민규를 그들은 멀뚱히 바라만 보았다. 그 나이에 스스로 기저귀 가는 법을 깨우친 그는 이미 동난 분유 봉지를 보며 배를 굶고 있던 참이었다,
"민규야, 자니?"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먼저 씻고 올게요."
민규는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했다. 효과적으로 방금 일어난 척을 하기 위해서. 그러면 부모님이 예전처럼 일어났어, 우리 아기~ 하면서 안아주시겠지? 그리고 팔을 쭈욱 늘리곤 눈을 비볐다.
"...아. 일어났구나."
33.
왜 그렇게 차가운 말투에요 엄마?
민규는 멈칫했다. 부모님은 흰 종이에다가 도장을 누르고 있었다. 민규는 손 대지도 못하게 하는 도장이 한가득인 파우치에서 꺼내서. 민규는 이 장면이 마치 꼭 데자뷰인 것 같다며 증폭되는 불안감을 찍어 눌렀다. 그럴리가 없어, 그치? 민규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마, 지금 뭐해요?"
"...민규. 김민규. 잘 들어. 이제 곧 6살이면 민규도 이제 어엿한 형 오빠지?"
무심한 그 말투에 민규는 온 몸이 아스팔트 도로에 긁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 나잇대의 민규는 그러한 말을 내뱉었을 것이다.
"자, 이 통장 받아. 앞으로 1년씩 저 아저씨 집에 살고, 다음 1년에는 우리 집에서 살거야. 그 다음엔 통장에 돈이 쌓인 민규는 독립을 할거예요. 알아 들었지요? 민규는 똑똑한 어린이니까."
33.
솔직히 말도 안된다고, 그 시절의 김민규는 생각했다. 고작 5살, 뭐 2년 후면 7살짜리 얘가 무얼 알곘느냐고. 통장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돈의 단위도 아직 모를 나인데.
그래서일까, 그의 도망은 충동적이었다. 아빠 집에서는 누군지도 모르는 아줌마랑 집에서 살다가, 또 엄마 집에서 누군지도 모를 아저씨랑 사는 것이 너무 숨 막혀서. 그동안 전학만 2-3번은 족히 다녔다. 친구들도 속속들이 다 빠져나갔다. 민규의 곁엔 통장 하나밖에 없었다. 유일한 그의 물건. 그가 어디를 가더라도 끝까지 옆에 붙어다닐 물건.
아저씨와 엄마가 침대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을 무렵에 민규는 주변에 보이는 통장들을 싹 쓸어 몰래 창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그 누구도 뒤에서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들만의 시간을 즐기기에 바빴다. 민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야 뭐 당연한가, 주워 온 자식이나 다름없는 아이를 누가 신경 쓴다고.
34.
"허억, 흐윽,"
순영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이었다. 민규는 순영의 상태를 확인하곤 곧장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절박한 그 손길에 화장실에서 나오던 남자들은 길을 터주었다.
"권순영, 권순영!"
숨을 헐떡거리다 겨우 눈에 초점이 돌아온 순영을 보고 민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영영 잃는 줄 알았어서. 다신 못 보게 되면, 그는 또다시...갇히게 될까봐.
"..."
드디어 정신 차린 순영의 어깨를 두어번 정도 친 민규가 그를 업고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40도, 체감 온도 45도인 지금 화장실은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더 있다간 순영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영영. 그것도 얼굴 한 번 못 보고.
35.
"아, 민규야. 고맙,"
숨을 턱 뱉은 순영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려고 할 때, 덩치가 무척이나 컸던,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천천히 다가왔다. 그래, 이 기분이었지. 아까 무당에게서 느꼈던 기백과는 차원이 다른, 숨이 턱 막혀오고 온 몸이 조이는 것 같은 기분.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지만, 순영은 필사적으로 인상까지 써가며 억지로 버텼다.
"그 꼬맹이가 진짜 여깄어. 아니, 전에 봤던 창년 아들이 누구한테 업혀져서 뛰어다니고 있다길래 찾아왔는데, 횡재했네? 잘 지냈니?"
남자가 거만한 미소를 짓더니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의 너머로 보이는 햇볕은 무척이나 따가웠다. 살이 다 타버리고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온도였다. 민규는 몸을 순영의 쪽으로 돌렸따. 겁에 질린 얼굴, 하지만 잔뜩 분노에 찬 표정. 민규는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이 남자가 그에게서 말로만 듣던, 아저씨들인 게 분명하다고.
"우리, 우리 엄마 어디 갔어!!"
순영이 아저씨의 멱살을 잡아챘다. 멱살을 잡힌 남자는 표정을 잔뜩 구겼다. 퍽 기분이 나쁜지 실실 웃던 낯이 금세 사라져 버리고 없었다. 민규는 금방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것 같았기에 순영의 편을 들 준비를 햇다. 몸으로든, 말로든.
"아, 말했잖아. 창년이라고. 남자들이 좋아 죽던데. 역시 경력직이라서 그런가. ...하하, 농담이야. 너무 매섭게 쳐다본다, 둘 다. 특히 넌 덩치도 큰 게 우리쪽 일 해보면 어때?"
아저씨는 무척이나 역겨운 제스쳐를 취하곤 혀를 삐쭉 내보였다. 민규는 화가 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그래선 안됐다. 그 사실을 알았다.
"이, 씨발년이...!!"
순영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저씨는 순영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순영은 허무하게 뒤로 넘어졌다. 아저씨는 실실 웃고 있었다. 뭐가 그리 웃긴지. 민규는 그 남자를 단숨에 제압했다. 몸으로. 그냥 인간의 급소를 때리면 되더라. 너무 역ㄱ겨워서 언젠가 한 번은 차줘야지 하고 생각했었느넫, 민규 본인도 이리 금방이 될 줄은 몰랐다.
무척이나 흥분해 숨을 고르지도 못하고 과호흡이 올 정도로 숨을 들이 마시던 순영이 민규를 흐리멍텅하게 쳐다보았다.
"형, 그 사람들 지금 형 어딨는지다 알아요. 곧 있으면 집 안까지 찾아올지도 몰라요."
민규가 순영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순영은 그 말을 듣더니 입을 허하고 벌렸다. 뭐, 뭐...? 절망에 바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퍽 안타까웠다. 그래서, 민규는 순영의 손을 놓지 않고 눈을 마주쳤다. 그 작고 날카로운 눈이 왜일까 오늘따라 우울해 보였다.
순영은 지금 사리 분별이 잘 되지 않는 듯 보였다. 흐리멍텅한 그 눈을 제대로 마주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덩치가 커서 그런가 그 아저씨와 지금 저를 비교하고 있는 듯 보였다.
"형, 도망가지 말아봐. 나야, 민규. 형 동생 민규."
순영은 울었다. 아주 깊게 울었다. 민규는 그저 눈을 감은 채 어깨에 그를 파묻었다. 어깨가 촉촉히 젖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의미 모를 감정이 팍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순영의 미약한 울음 소리 너머로 누군가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남자의 목소리였다.
민규는 순영에게 나즈막히 말했다.
"우리 도망갈까, 아무도 보이지 않을 곳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