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
누구에게 걸어도 같은 소리가 돌아왔다. 민규는 멍하니 제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통화목록을 꽉 채운 빨간 글씨, 이어지지 않는 전화, 반복해서 들려오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의 음성.
치지지지지직...
소음을 흘리는 티브이를 끈 민규는 급히 숨을 삼켰다. 조용하다. 티브이엔 더 이상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목소리도, 음악 소리도 그 아무것도. 민규는 연락처를 뒤적였다. 전화를 걸지 않은 사람은 이제 단 한명 뿐이었다. 이 사람마저 아무런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Rrrr...Rrrr...
더는 견딜 수 없어 끊으려는 순간,
- ...여보세요?
- ...
- ...김민규, 너야...?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subtitle
서브타이틀
고요했다. 모든 것이 멈추고 생명이 사라진 거리는 너무나 고요하여 숨이 막힐 정도였다. 봄이 내려앉은 거리는 포근했으나 민규는 도리어 쓸쓸함을 느꼈다. 그것이 체온에 영향이라도 주는 것처럼 몸도 추웠다. 얇게 입고 나온 것을 조금 후회하며 민규는 재킷을 만지작거렸다.
조용한 거리엔 그야말로 사람도 동물도 그 어떠한 생명의 낌새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적막한 거리를 걸어본 일이 있었나,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런 적은 없었다. 도시의 밤은 아무리 어둠이 짙게 깔려도 완전한 고요를 불러오지는 못 했으니까. 자동차 소리도 사람들의 목소리도 하다못해 길거리를 배회하는 개나 고양이, 흔히 볼 수 있는 비둘기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민규는 약속 장소로 향하는 걸음을 서두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도리어 숨 막혔다. 그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음에도 무언의 감시를 받는 것처럼.
약속 장소는 둘의 아파트 사이에 있는 공원으로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진 않아도 어느 시간에 와도 산책하는 사람 두어명은 꼭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아무도 없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도 건강을 위해 천천히 걷는 사람도 벤치에 앉아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민규는 길게 숨을 뱉고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반대편에서 저와 똑같이 긴장한 듯 혹은 겁에 질린 듯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보인다.
민규는 그제야 숨이 트였다. 분명 상대로 그러리라 생각이 들었다. 저와 느끼는 것이 똑같으리라.
조심스럽던 걸음은 이내 조급하게 바뀌다 이내 달리기가 된다. 민규는 고요한 이 세계에서 저와 남은 단 하나의 사람을 향해 뛰었다.
"권순영!!!"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면서 숨이 턱까지 찰 정도로 달렸다. 불안이 가득한 얼굴을 마주 했을 땐 입술을 깨물며 그를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조심스러운 손이 저를 마주 앉았을 때, 비로소 이곳에 살아 있음을 느꼈다. 마주 닿은 몸이 뜨거웠다.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민규는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은 다리에 힘을 주었다. 땅을 디디고 서 있음에 감사하며 제 품에 안긴 사람을 조금 더 세게 안았다. 둘은 살아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 거리에서.
"그러고 보니 너 아까 이름 막 부르더라."
"...형은 지금 그게 중요한 거야?"
둘은 벤치에 한참 앉아 그저 가만히 숨을 쉬었다. 그야말로 숨만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 사실을 확인할 용기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눈을 뜨니 모든 생명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말하기엔 상당히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제 곁에 앉은 사람의 체온을, 숨소리를 느끼며 앉아 있었을 뿐이다. 그러다 불쑥 들린 엉뚱한 소리에 민규가 어이없어 대답했다. 그리고 그제야 제 옆에 앉은 권순영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그 순간 웃음이 터졌다.
"중요하지, 안 중요하겠냐."
"이럴 때 그런 소리부터 하는 건 정말 형밖에 없을 거 같긴 하다."
순영도 그 말에 웃었다. 이럴 때, 단 둘만 남은 이럴 때.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텅 빈 공원을 바라보던 둘은 천천히 일어났다. 닿을 듯 말듯 살짝 떨어져 천천히 걷기 시작한 둘은 그제야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멈춘 거리, 오로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자신들 둘 뿐이었다.
한살 차이지만 소꿉친구이자 동네 친구로 자란 탓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을 풍경이 너무나 낯설었다. 아무런 생명체도 없이 멈추어 버린 도시란 적막하다 못해 공포심을 불러온다는 것을 이날 처음 알았다. 비슷한 느낌을 공유함이 분명한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떨어진 거리를 좁혔다. 걸을 때마다 손등이, 팔이 닿을 듯 말듯 스친다. 그것만으로도 술렁이던 마음이 가라앉는다. 곁에 살아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너무 조용하다. 이렇게 조용한 거 처음 보는 것 같아."
"나도."
"평생 여기서 살았는데 완전 다른 곳 같아. 저기가 원래 저렇게 생겼던가? 그런데... 전기도 들어오고 다 되는 거 같지? 진짜 이상하다."
"그러게."
종알종알 건물들을 살펴보며 조잘대는 민규의 말에 조금은 건성으로 대답한 순영이였지만 그 머릿속은 충분히 복잡했다. 자신 둘 외에 모두가 사라진 듯한데 전기도 들어오고 모든 것이 멀쩡하다. 그냥 모든 것이 그대로 인데 생명체만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로지 김민규와 권순영 단 둘이었다.
"민규야."
"어?"
"나 부탁이 있는데."
"뭔데?"
"나 한대만 때려주면 안 되냐?"
"뭔 소리야... 혹시 꿈인가 싶어서 때려달라는 거야? 이 정도면 그런 방법을 쓰지 않아도 꿈이 아니란 것을 충분히 알 때가 되지 않았을까, 형?"
"...그야 그렇지."
그렇게 정처 없이 걸었다. 목표도 정하지 않고 둘은 시시한 이야기나 나누며 한참을 걸었다.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익숙했던 집이 낯선 공간이 된 것이 참을 수 없어서. 딱히 그것을 말한 것은 아니었지만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가족이 모두 사라진 곳을 더 이상 집이라 부르기 두려웠다. 그저 잠을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모든 것이 달라진 공간을 제대로 받아 들일 수 없는 탓이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는 장소 임에도 너무나 달라져 버린 장소를 이제 집이라고 부를 용기는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 배가 고파 눈에 보이는 편의점에 들어가 머뭇 거리다 물과 빵, 과자 같은 것을 집었다. 전기도 돌아가고 오늘 벌어진 일이라 그런지 물건에 문제는 없었다. 그저 카운터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빼면. 둘은 고민하다 지갑 속에서 현금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두고 나왔다. 기분이 이상했다. 분명 돈을 두고 왔음에도 꼭 도둑질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앞으로 어떡하지, 학교를 가야 할까, 아무래도 쓸데없는 생각 같지, 전기는 언제까지 돌아갈까, 갑자기 모두가 사라진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것이 원래 대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까, 혹시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둘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것은 아닐까, 사실 이곳은 저승이 아닐까.
아무것도 정답을 알 수 없었다. 아무도 없는 편의점을 딱 세 번 정도 들어가니 위화감이 조금 옅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둘은 현금을 놓고 왔다. 비록 세 번째 가게에선 현금을 거의 다 쓰는 바람에 동전 몇 개를 올려두고 나온 것이 전부였지만.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본 둘은 급격한 불안을 느꼈다. 그저 앞만 보고 걸었을 뿐인데 주변의 풍경은 익숙하지 않은 거리여서 덜컥 겁도 났다. 생각해보니 몇시간을 걸었으니 원래 살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것이 당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전기가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혹시 몇시간 후면 이것도 멈출까 걱정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렇지는 않았다. 둘은 삼십 분 정도를 더 걸어 호텔 하나를 찾았다. 역시나 호텔엔 아무도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둘은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도시 속 호텔 엘리베이터가 멀쩡히 움직이는 것이 정말 기묘했다.
최상급 호텔은 아니었다. 겉보기엔 조금 낡은, 퍽 오래된 디자인의 건물이었는데 안은 그래도 리모델링을 하였는지 깨끗하고 최신식 스타일의 모습이었다. 건물의 크기 때문에 보통 티브이에서 보았던 스위트룸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 과장하면 둘이 누워 뒹굴어도 될 것 같은 커다란 침대도 있었고 야경도 보였다. 비록 사람들이 없는 탓에 건물에 불빛이 제대로 들어와 있진 않았지만. 멀리 보이는 빌딩에 띄엄띄엄 켜져 있는 불은 혹 사라지기 전 사람들의 흔적일까.
듣기로 지상에서 바라보는 밤하늘 속엔 사라지는 별들의 잔해로 남은 빛들이 보인다던데 혹 빌딩의 불빛들도 저 사람의 마지막 별 꼬리는 아니었을까.
전기와 마찬가지로 수도도 제대로 나오는 덕분에 둘은 따뜻한 물에 몸을 녹였다. 각각 긴 목욕을 마치고 지친 기색으로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몸을 씻고 앉으니 몇시간 동안 무작정 걸었던 피로가 몰려왔다. 다리 근육도 욱신욱신 했는데 그것이 살아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주는 것이 조금 웃음이 났다.
"배는 안 고파?
"글쎄... 걸으면서 먹어서 그런가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가 별 생각은 없네."
"나도. 그냥 맥주 한잔하고 잘래?"
"맥주가 있어?"
"냉장고에 있더라고."
민규가 웃으며 냉장고에서 차게 식은 맥주를 꺼내와 순영에게 건넸다. 그렇게 까지 마시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여러 가지 피곤하여 그런가 맥주캔을 손에 쥐자 갑자기 목이 탄다. 민규는 조금 급히 캔을 따 목을 축였다. 제 곁에 앉은 순영을 곁눈질 하며 두어모급 더 넘겼다.
'그러고 보니 단 둘이네.' 오늘 하루 내내 같이 있었음에도 밀폐된 공간에 들어오자 새삼 그가 의식 된다. 그러고 보니 지금 권순영과 단둘이었다. 민규는 술기운인지 무엇인지 훅 달아오르는 열기를 애써 무시하려 괜히 손바닥으로 뺨을 문질렀다. 이런 상황에 할 생각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호텔에 권순영과 단둘이라는 것을 깨닫자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여태까지 벌어진 상황에 대한 고민이나 두려움을 빠르게 덮는다.
사실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대학에 들어가니 각자 생활에 바빠 전처럼 자주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본 사이라고 해도 초중고를 같이 나왔다고 해도 아무리... 김민규가 좋아하고 있다고 해도. 권순영의 얼굴을 전보다 자주 보게 될 수 없음을 새삼 깨달았을 때 김민규는 본인들이 어른이 되었다고 느꼈다. 물론 통상적으로 말하는 진짜 어른이 되었다고 하기엔 어려운 감이 있었지만.
제대로 마음을 고백한 적도 없으면서 김민규는 꼭 실연한 사람처럼 힘들어했다. 그때 김민규는 제가 마음을 고백하지 못함을 힘들어하는 것인지 그저 비련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인지 조금 헷갈려 일부러 더 순영에게 거리를 두었으나 여전히 그것에 대한 정답은 알지 못했다.
언제부터 였는지 이제는 까마득한, 정신 차려보니 만개한 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도 그렇다고 버리지도 못하고 곯아버린 상처처럼 달고 지내다 문득 그것이 너무 아프면 거리를 벌리고 그럼에도 보고 싶어 견딜 수 없으면 불쑥 연락을 했다. 순영은 무슨 생각인지 밀어내도 당겨도 그저 밀려났다 다가올 뿐, 제멋대로 멀어지는 것에도 제멋대로 가까워 지는 것에도 그 어느 쪽도 뭐라 한 적이 없었다. 때로는 그것도 답답하여 제 마음을 알아주지 않아 원망스러워 하는 이기심이 울컥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도 이내 꾹꾹 내려 삼켰다. 그를 원망하기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 이었으니까. 이 원망도 서러움도 모두 자신의 이기심일 뿐이었으니까.
민규의 사랑은 고요했다. 고요하고 잔잔했다. 마치 지금 이 세상 처럼.
어쩌면 포기에 가까운 감정이라 그랬던 것일까. 간절하여 어쩔 줄 몰랐던 적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렇다면 자신의 사랑은 대체 뭐였을까 싶어진다. 그럼에도 곁에 있음을 떠올리면 요동치는 심장에 귀가 달아오른다.
한달 떨어져 있으면 괜찮을까, 그것도 안 되면 두 달. 그것도 안 된다면 반년. 그렇게 홀로 거리를 벌렸다 좁혔다 아무도 모르는 조용한 발버둥을 치곤 했다. 문득 웃음이 났다. 그러고 보니 애써 모른척한 거지 홀로 버둥대는 짓은 다 한거나 다를 바 없었다.
"되게 조용하다."
"..."
"아무도 없는 도시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네."
꼭 이런 상황을 상상해본 사람처럼 말을 한다. 민규는 멍하니 새카만 창밖을 바라보는 순영의 옆모습을 눈에 담았다. 생각보다 드라마를, 그것도 로맨스물을 좋아하는 권순영이니 어쩌면 어떠한 로맨틱한 상황을 상상해 봤을지도 모른다. 조난이나 무언가에 쫓기는 주인공들이 이런 곳에 숨어 들어 사랑이 싹트는 내용 같은 것은 로맨스 물의 단골 이었으니까. 권순영의 취향이면... 조난 쪽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했어?"
"어?"
"아무도 없는 도시가 낭만 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냐고."
"제대로 해 본 적은 없어.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직접 보니 뭔가..."
"..."
"좀... 무섭네."
불빛이 가득한 곳이었으니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다. 그래도 민규는 씁쓸했다. 이런 감정을 느낄 때는 아니지만 자신과 단 둘이 있는 것이 싫다는 식으로 들려서 또 이기심이 삐죽 솟아 오른다. 그런 자신이 한심하여 더욱 입안이 쓰다. 민규는 남아 있는 맥주를 단번에 마시고 테이블 위에 캔을 올려두었다.
"아 피곤해서 안 되겠다. 이 닦고 올게. 자야겠어."
"나도 잘래."
다 마시지 않은 캔을 테이블에 올려둔 순영이 따라 일어난다. 둘은 어린 시절 서로의 집에 자고 갈 때 그랬던 것처럼 같이 리를 닦았다. 꽤 오랜만에 같이 이를 닦고 있자니 어릴 때 이를 닦겠다 해놓고 장난만 치다 혼이 났던 기억이 났다. 칫솔질을 하다 작게 웃는 순영을 보며 분명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분명하다 느낀 민규는 가슴 한구석 어딘가가 간질간질 한 것이 느껴졌다.
둘은 근처 편의점에서 대충 산 속옷만 입고 가운을 입었다. 잠옷도 갈아입을 새 옷도 생각지 못했기에 별수 없었다. 자고 일어나면 또 걸어 다니다 옷 가게를 찾아봐야 하나, 아니면 걸어 왔던 길을 되돌아 그냥 집으로 돌아가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피곤하여 눕긴 누웠는데 머릿속을 배회하는 잡생각들과 한 침대에 누워 있으니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민규는 슬쩍 옆을 보았다. 잠이 든 건지 뭔지 눈을 감고 가만히 숨만 색색 내쉬는 순영의 얼굴이 보였다. 힐긋 몇번이나 눈치를 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민규는 혹시 순영을 깨울까 조심조심 숨까지 참아가며 몸을 돌려 옆으로 누웠다. 정말 잠들었는지 순영은 미동도 없었다. 하긴 피곤했을 것이다. 자신도 별 다를 바 없긴 하지만 갑자기 마주한 상황에 사실 머리가 잘 따라가지 않았다. 어쩌면 아직 제대로 느끼지 못 했기에 이렇게 태연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것이 정답인 듯하다. 현실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 이렇게 태연하게 짝사랑하는 상대의 얼굴을 하염없이 훔쳐보진 못 할 것이다.
문득 멈춰버린 우주 속에 단 둘이 남은 기분이 들었다. 새카만 도시의 밤, 단 둘이 남은 밤.
민규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바라보다 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걸었다. 느껴지는 체온에 절로 웃음이 났다. 약속하듯 손가락을 걸고 민규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분명 무척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어쩐지 오늘이 마지막 일 것 같아서. 눈을 뜨면 권순영마저 사라지고 이 세계에 홀로 남을 것 같아서.
정말 그렇게 되면 자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사랑하는 이를 모두 잃고 멈춰버린 도시에 홀로 남아 버리면 그대로 폭발해 버릴까, 생명을 잃은 별처럼.
동그란 코끝이 귀여웠다. 동그란 이마도. 새카만 눈동자를 감춘 눈도 좋았고 보드라운 뺨도 좋았다. 만지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며 민규는 순영을 눈에 담았다. 고른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느리게 눈을 감았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체온과 귓가를 간질이는 숨소리에 온 집중하고 잠을 청했다.
부디 일어났을 때 홀로 남지 않기를 바라면서.
"민규야, 일어나."
너무 깊게 잠든 모양이다. 자신을 흔들며 부르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인지 부스스한 머리의 눈이 조금 부은 모습의 권순영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규는 순간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순영을 끌어당겨 안았다가 깜짝 놀라며 그를 놓아주었다. 순영은 조금 당황스러운 얼굴 이었지만 민규의 행동에 무어라 말을 하진 않았다. 민규는 자신의 행동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는 상황이라 그런가보다 납득하면서도 머쓱한 얼굴로 일어나 욕실로 도망쳤다. 거울을 보니 벌겋게 익은 얼굴의 자신이 보여 그대로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야기를 나눈 끝에 둘은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다시 돌아갈 수도 있으니까. 모르는 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것도 한계가 있을 것이니 집에 돌아가기로 결정 한 것이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아주 근사한 여행이 될 텐데, 민규는 제 곁에서 어제 보다는 편한 얼굴로 걷는 순영을 바라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름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봄볕도 꽤 따가운 마당에 여름 땡볕에 걸었다면 둘 다 탈수로 쓰러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모두 잠겨있는 탓에 어쩔 수가 없었다. 차 키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만약 돌아가면 뭐 하고 싶어?"
한시간 정도 걷다가 배가 고파 들른 편의점을 나오면서 순영이 물었다.
"돌아가면?"
"응...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음."
조금 남은 샌드위치 조각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민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뭘 하고 싶냐고? 그런 질문을 받으면 무슨 거창한 각오나 다짐 같은 것이 나올 줄 알았는데 가족들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고 같이 식사를 하고 싶고 때론 지루하다 생각했던 평범한 일상을 그저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싶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생각의 끝에 닿는 것은,
"고백."
제 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생각 이었다.
"고백 하고 싶어, 좋아하는 사람한테."
"...좋아하는 사람?"
"오랫동안 좋아한 사람이 있거든."
'...그렇구나.', 작은 소리로 대답한 순영이 앞서 걸었다. 손에 남아 있는 빵 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진 민규가 서둘러 순영을 따라잡았다. '날씨 좋다.', 민규의 말에 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전날 만났던 서로의 집 딱 중간에 있는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 순영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민규는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순영이 무척 가라앉아 보였기 때문에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다. 생각해보면 애써 밝은 척을 했던 것일지도 모르고 이틀째 많이 걷다 보니 힘이 들거나 몸이 아플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 귀찮게 말까지 걸면 더욱 힘들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래서 둘은 묵묵히 걸었다. 중간중간 정말 필요한 대화만 했다. 묘하고 조금은 어색한 시간이었다.
그렇게 공원에 도착했을 때도 순영은 한참 말이 없이 가만 서 있었다. 꼭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처럼.
"어쩌면 다 꿈일지도 몰라."
"...꿈?"
"지금 이거, 전부."
"그럴까...?"
"어쩌면."
가만히 서 민규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던 순영이 말했다. 이것은 모두 꿈일지도 모른다고.
민규는 문득 순영의 말에 궁금증이 떠올랐다. 이것이 꿈이라면 누구의 꿈일까, 하고.
"집으로 돌아가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돌아와 있을지도 모르지."
"꿈이라서?"
"응. 이건 꿈이니까."
바람을 말하는 것인지 진실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이 꿈이든 아니든 변하지 않는 것은 정말 모든 것이 돌아왔으면 하는 것이었다. 순영은 민규 너머 어딘가를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민규와 눈을 맞췄다. 민규는 까만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홀린 듯 가만히 바라보았다. 꼭 새카만 눈동자가 어젯밤 같이 보았던 밤하늘과 닮았다 생각하면서.
"이것이 꿈이라 원래대로 돌아가서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
"뭐라고 말할 거야?"
새카만 눈동자가 마지 민규의 깊은 속마음을 들여다보려는 듯 움직이지 않고 바라본다. 진실을 말하라고, 진심을 말하라고 종용하듯 재촉하듯 혹은 간절히 비는 것처럼 바라본다.
"안녕."
"..."
"안녕 이라고 말할 거야."
다시 만나서 다행이라고,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와 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안녕이라고 전할 거라고. 당연함이 사라진 적막한 우주 속이 아니라 우리의 당연함 속에서 너를 좋아한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인사를 할 것이라고.
"그렇구나."
순영은 민규의 말을 곱씹듯 한참을 서 있다 이제 집에 가자 했다. '잘 가.' 둘은 서로에게 인사하며 등을 돌려 각자의 집으로 걸었다. 공원을 완전히 빠져나가기 전 민규를 걸음을 멈추고 뒤돌았다. 멀어져 가는 순영의 뒷모습이 보이고 순간 쫓아가 잡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을 때 그 마음을 읽은 것처럼 순영이 뒤돌았다. 거리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순영이 손을 들며 무어라 외치려는 순간 민규는 바닥이 꺼지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주변이 모두 일그러져 눈을 질끈 감았다. 끝이 없는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 아찔했다.
"헉!!!"
악몽을 꾼 듯 온 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시끄럽게 울리는 알람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언제나 일어나는 시간에 맞춘 알람을 끄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이 현실인지 무엇인지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분명 방금 까지...
"민규야 일어났어? 아침 먹어."
"엄마?"
땀에 흥건하여 창백한 안색으로 부르는 아들이 걱정되어 어디 아픈 것이 아니냐 묻는 다정한 얼굴에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놀라 달래주는 엄마에게 그저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둘러댄 민규가 가족들을 바라보며 정말 꿈이었다는 생각에 그제야 자신이 생각보다 정말 모두를 잃었다는 것을 무서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꿈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모두가 사라졌던 것이 현실이고 이게 잠든 자신이 꾸는 꿈이라면?
어떤 얼굴로 밥을 먹고 가족들을 보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가족들은 오늘따라 이상하다며 정말 병원을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걱정해 주었고 본래 다정한 자신의 가족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꿈이라면 자신이 충분히 기억을 만들어 낼 수도 있지 않은가 싶었다. 이것은 꿈일까?
수없이 걸었던 연결되지 않은 통화 기록이 없는 깨끗한 핸드폰을 바라보며 민규는 정말 이것이 꿈이면 어떡하나 생각했다. 계속 연락처를 바라보며 망설이던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여 괜히 이불을 매만졌다. 통화 연결음이 이어지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다 끊으려는 순간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렸다.
- ...여보세요?
- ...
- 민규야?
권순영이었다.
공원에서 만나기로 정하고 민규는 집에서 뛰쳐나갔다. 언제나처럼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자동차 소리는 시끄러우며 가게에서 틀어놓은 음악 소리가 달려가는 민규의 귀를 간질이고 흘러갔다.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닐 것이다. 분명 권순영은 모두가 사라진 쪽을 꿈이라고 했으니까.
저마다 산책을 하든지 벤치에 앉아 쉬든지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급히 뛰어왔더니 숨이 차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땀이 난 이마를 닦는데 저 멀리서 꿈속에서 보았던 것처럼 익숙한 인영이 보인다. 다만 달랐던 점은 그 사람도 저처럼 뛰어오고 이었다는 것.
저를 보며 환히 웃으며 달려오는 권순영을 본 민규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쳤다.
"안녕!!!!!"
제 마음을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큰소리로.
더는 꿈이 아니었다,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순영이 환히 웃고 있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