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3
그 날은 이상하게 숙소에 사람이 없는 날이었다. 어린 소년들이 꽉꽉 들어찬 좁은 숙소는 사람 없을 때라는 게 존재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 정말로 이상하다 말할만한 사건이었다. 게다가 그 둘이 하필이면 권순영과 김민규라는 것은 더더욱 그러했다. 수도권 거주 중인 둘이 연습이 없는 날에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남았다는 것도, 어디 나갈 곳도 없어 숙소에 얌전히 남게 됐다는 것까지도 전부 다.
마치 운명이 그 둘만을 숙소에 남기기 위해 안배한 날인 듯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둘이 뭔갈 하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한창 잘 자고 잘 먹을 때인 것치곤 잠이 모자란 생활을 계속해오고 있던 그들이었기에 늘어져라 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결국 정오가 다 되도록 잠들어 있다가, 배가 잔뜩 고파서 비척비척 거실로 걸어나오고 나서야 서로를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거실로 나온 직후 순영은 소파 위에, 민규는 바닥에 널린 개다 만 이불 위에 다시 드러누워 버렸다. 소파 귀퉁이에 다리가 걸려 민규의 얼굴 근처에서 발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점심 어쩔 거야?"
"나 생각 없는데."
"웃기지 마세요. 그러다가 나 라면 끓이면 또 한 입만 달라고 할 거잖아."
그 말을 들은 순영이 마침 잘됐다는 듯 냅다 말꼬리를 잡았다. 소파 위에 늘어져 있던 몸이 반쯤 저를 향해 돌아눕는 것이 느껴졌다. 목소리가 한층 민규 쪽에 가까워졌다.
"어, 라면 맛있겠다. 끓여주라."
"아 싫어. 저번에도 내가 끓였는데."
"왜애. 쫌 끓여주라아~"
태평한 소리에 민규가 눈앞에서 흔들리던 순영의 발을 툭 쳤다. 처음엔 약간 심통이 나서 친 거였지만 살짝 미니까 그네처럼 멀어졌다가 다시 다가오는 통에 별 의미 없이 툭툭 밀기를 반복하게 됐다. 그러다 아주 조금 힘이 더 들어갔나 싶었을 때였는데.
"아."
그 소리와 함께 순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민규는 반사적으로 손을 뒤로 물렸다. 순영이 제가 건드리는 것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때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경험으로 아는 탓이었다. 물론 머리로 아는 것과 조심을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 꼭 이렇게 저쪽에서 뾰족하게 반응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곤 했다. 제 머리 위로 순영이 째려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쏟아지는 걸 알면서도 민규는 모른 척 시선을 돌리지 않고 딴청을 피웠다. 결국 소파 아래로 내려선 순영이 발끝으로 민규의 옆구리를 꾹 밀었다.
"야. 너 모른 척 하지 마라."
"아, 왜 발로 차!"
"이게 찬 거냐? 그냥 건드린 거지."
"저번에 형은 이렇게 건드린 거 가지고 친 거라고 뭐라고 했거든요?"
"니는 진짜 친 거였거든?"
결국 민규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대거리하기 위해서는 아니었고, 그냥 이 자리를 좀 피해 보기 위해서였다. 어차피 순영은 기분파라 이러다 또 라면이라도 끓이고 먹으라고 내놓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게 뻔했다. 물론 민규 입장에서도 더 따지고 싶은 것은 있었지만 쉬는 날에까지 서로 투닥거리기는 싫었다. 원래 저 형은 알기 힘든 이유로 제게 치댔다가 짜증을 냈다가 했으니까.
문제는 고작 열 일곱의 김민규는 성가셔서 피한다는 티를 숨길 만큼 능숙하지 못했다는 거였고, 오늘의 순영은 그걸 그냥 보아 넘길 만큼 너그럽지 않다는 점이었다. 순영은 저거 봐라, 하는 얼굴로 한참 그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다가 민규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손이 쑥 뻗어 나가 민규의 어깨를 잡았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권순영이 김민규에게서 눈을 뗀 순간이라곤 자연스럽게 눈이 깜빡이는 순간, 그 찰나의 시간밖엔 없었다.
하지만.
저보다 큰 키 때문에 살짝 위로 뻗어 나간 손이 잡은 어깨의 감촉이 조금 이상했다. 이상하다? 고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평소와 달랐다. 어제는 물론이고 그 전에도, 하여튼 한두 번 잡아본 게 아니었기에 그 두께감 자체를 모를 수는 없었다. 손을 가득 채우는 그 부피감이, 어쩐지.
아니 그보다, 김민규가 이렇게나 컸던가? 아까까진 물 다 빠진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지금은 왜 갑자기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지? 왜?
어깨를 잡힌 남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그건 김민규였다. 정확히는 김민규로 생각할 만큼 똑 닮은 얼굴이었다. 다만.
"누구, 세요……?"
열 여덟의 권순영이 아는 것보다 훨씬 크고, 누가 봐도 좀 더 어른인 김민규가 거기에 있었다. 그게 스물 일곱 살짜리 김민규라는 걸 열 여덟 권순영이 알 도리는 없었다.
"어? 호시……형?"
"예?"
"어?"
"네?"
"아?"
으와아아아아아아아악.
좁은 숙소를 두 사람 분의 비명이 가득 채웠다.
#2. 2023
그리고 2023년의 어느 날, 스물 여덟 권순영의 집에서도 비슷한 소란이 벌어진 상태였다. 스물 여덟 권순영은 제 눈앞에 뚝 떨어진 소년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겪은 상황은 2013년의 순영과 민규가 겪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민규와 사정이 있어 아침부터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는데, 현관으로 나가려던 김민규를 붙잡은 순간 거기 있었던 건 그가 아주 예전에 보았던 열 일곱짜리 어린애였다.
난데없이 처음 보는 곳에 떨어지고 만 민규는 당황한 얼굴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잘 아는 누군가와 닮았다는 사실조차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채였다.
"여, 여, 여기가 어디예요? 이거 납치… 아니, 저 뭐 찍어요? 저 왜 여기 있어요?"
물론 순영이라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해 줄 수는 없었다. 저 김민규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는 순영도 몰랐다. 그냥 눈을 감았다 떴더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린 민규가 순영이 누군지 바로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과는 달리, 지금의 순영은 어린 민규가 김민규라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내 보고, 함께 자랐으니까. 그 변화의 과정 속에 같이 있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내가 널 어떻게 납치하냐?"
"저 아세요? 그…… 어?"
그제야 민규는 제 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쁘던 눈이 그제야 멎었다. 얼굴의 생김새는 익숙했다. 스케쥴이 없는 날이라 순영이 맨얼굴인 채라 더더욱 그랬다. 좀 더 어른스러워졌고, 더 다듬어졌고. 미묘하게 다른 부분들은 있었지만 그건 분명히 권순영이었다.
"권순영?"
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질문을 되돌려 줄 뿐이었다.
"너 계속 거기 서 있을 거야?"
그 말에 민규는 제 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은 맨발로 현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순영이 눈짓하자 민규는 주춤주춤 집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순영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는 얼굴이지만 다르다는 것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중인 게 빤히 보였다. 그 생각이 빤히 읽히는 것이 조금 신기하긴 했으나 순영은 굳이 티를 내지 않고 민규를 소파에 앉혔다. 자기는 그냥 그 앞에 냅다 주저앉았다.
"여기 어디예요?"
"넌 몇 살이야?"
"제가 먼저 물어봤는데요. 열 일곱 살요."
먼저 물어봤다고 따지려던 민규는 순영의 시선에 저도 모르게 냉큼 자신의 나이를 불어 버리고 말았다. 절대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진짜로.
그저 눈앞에 있는 게 권순영이다보니 이런 상황에선 괜히 심기를 거슬러서 제게 좋을 게 없다는 일종의 생존본능 비슷한 게 빠르게 작동했을 뿐이었다. 묘하게 군기가 바짝 든 것 같은 그 모습이 순영에게 어떻게 보였을지 열일곱의 김민규가 알 도리는 없었다.
그리고 그 대답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엔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순영이 아무 말도 없이 민규를 빤히 쳐다보고만 잇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김민규가 열 일곱 살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중은 아니었다. 다만 이 상황 자체를 머리로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좋아. 저게 열 일곱 김민규야. 근데? 그럼 원래 있던 김민규는 어디 갔는데? 걔가 안 돌아오면 어떡하지? 그럼 우리 활동은… 아니, 그것보다 나는…
"형은 몇 살이에요?"
"어?"
그렇게 영원히 확장되어 가던 순영의 사고를 틀어막은 것은 한참 눈치를 보고 있던 민규의 조심스러운 질문이었다. 그 사이 민규는 소파에 앉은 채 집을 꽤 세세히도 훑어본 뒤였다. 넓은 집, 좋아 보이는 가구. 누가 봐도 혼자 사는 듯한 모습… 아직 브랜드니 뭐니 하는 것을 제대로 알 때는 아니었으나 적어도 좋아 보이는 걸 알아볼 눈 정도는 있었다. 저게 정말 권순영이라면.
"형 여기 혼자 사는 거죠? 그럼 우리 데뷔했어요?"
그렇다. 그게 가장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연습생 생활. 오직 바라는 것은 데뷔 하나뿐이었다. 근데 지금 상태를 보면 데뷔만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사실 민규는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부터 조금씩 들썩거리는 몸을 소파 위에 억눌러 놓기가 힘들었다. 아직 열 일곱, 한참 천방지축일 때였다. 볼이 점점 발갛게 상기되어 가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열기를 담은 채 반짝거리는 눈도 함께였다.
"우리 잘 돼요?"
그 질문에 순영은 아주 짧은 시간 고민했다. 저 때의 김민규한테 과연 우리가 잘 된다고 미리 말해주는 게 괜찮을까? 그러나 고민이 짧은 이유는 그걸 말해준다고 해서 변할 게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존재하는 탓이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론, 자랑이 하고 싶었다. 지금의 성공을 가장 알려주고 싶은 것은 아마 과거의 자신일 것이기에.
"야."
"넵."
"보면 모르겠냐."
순영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우리 슈퍼스타야."
그 말을 들은 민규는 잠깐 큰 눈을 껌뻑거리다가 두 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 하아아, 하고 밀려 나오는 한숨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아직 다 여물지 않아 조금 가냘픈 느낌마저 드는 어깨가 위로 솟았다가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 모습에 순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올렸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건데, 그 때는 덩치만 커다래가지고 별로 귀여운 구석 없다고 생각했던 김민규는 이제 와서 보니 그냥 어린애였다.
"뭐야, 너 울어? 아니지?"
순영이 저도 모르게 그 머리통에 손을 얹으려 했을 때, 민규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볼은 여전히 발갛게 물들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눈물의 흔적 같은 게 보이지는 않았다. 생각해 보면 김민규는 그렇게까지 잘 우는 애도 아니긴 했다. 자기가 직접 이룬 것도 아니고 미래의 가능성을 엿본 것만으로 울 애는 아니기도 했고. 그러한 면을 어떤 단어로 정의해야 할지는 잘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결과를 점칠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걸 알고 있음에도 민규가 울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건…
그저 권순영이 지금 눈앞의 김민규를 한없이 약한 존재로 인식한 탓이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아니…그냥 긴장 좀 풀려서요."
순영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꿈에도 모르는 민규는 그저 얼굴을 몇 번 제 손으로 쓸다가 헤 하고 웃을 뿐이었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송곳니며 이모저모가 눈에 자꾸 콕콕 들어와 박혔다. 제가 왜 이렇게 저 얼굴의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들여다보고 있는지 순영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했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랬다. 자기가 김민규 좋아하는 줄 몰라서 모른 척 흘려 보냈던 어떤 시간의 김민규를.
"진짜 다행이다. 잘 되는구나. 그럼 우리 잘 지내겠네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민규의 얼굴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던 순영은 그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어?"
"형, 안되면 어떡하나 싶어서 맨날 화냈잖아요."
맨날 화를 냈었나? 원래 제가 한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 법이라 순영은 입술을 조금 내밀었다가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는 자기 객관화는 제법 잘 하는 편이었고 그 당시의 자신이 김민규의 사소한 것을 모두 다 거슬려했다는 사실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덕에 치대 오는 민규를 저 멀리 치워 내느라 짜증도 많이 내고 화도 많이 내긴 했다. 제가 내는 화가 정당하지 않다는 걸 알 때도 있어서 그 끝에 붙이는 말은 매번 우리 잘 돼야 할 거 아냐, 였다. 뭐라 답해야 할지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저를 바라보는 민규의 시선이 애매해지는 게 느껴졌다. 긴 침묵은 저 어린 애에게 불길한 생각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야, 우리 잘 지내."
"그렇겠죠? 그것도 진짜 다행이다."
냅다 그렇게 말해두긴 했는데 순영은 약간의 찝찝함을 느꼈다. 물론 두 사람은 표면적으로는 아주 잘 지냈다. 내막을 따져 봐도 그렇게까지 나쁜 사이는 분명 아니었다. 다 같이 한데 모여 있으면 잘 웃고 떠들고, 그러는 데 아무 문제 없으면 잘 지내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 속을 한 꺼풀만 들여다봐도 시원스럽게 그렇다고 말하기엔 여러 문제가 있었다.
애초에 김민규가 굳이 권순영 혼자 사는 집에 행차했다가 애를 집에 두고 뒤돌아 나가려던 것에는 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순영은 고민했다.
이 열 일곱의 김민규에게 어디까지 말해도 좋은 걸까. 어디까지 숨겨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걸 하나하나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그들은 같이 연습생으로 죽어라 구르고 또 데뷔해서도 갖은 고생이란 고생은 함께 해 가면서 커 온 직장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남에게 말할 수 있는 선의 일이었고, 두 사람만 아는 사정이 따로 있었다.
김민규와 권순영은 한 번 사귀었다가 헤어진 사이다. 죽이네 살리네 하면서 헤어진 것도 아니고 얼굴 안 보고 살 수 있는 사이도 아니라 지금은 애초에 사귀었던 적이 없던 것처럼 살고야 있었지만 어쨌든 그런 사이인 건 맞았다. 절대 편할 수만은 없는 사이.
일단 쟤가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김민규는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까 쟤한테는 그걸 비밀로 하자. 순영이 그렇게 딱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이게 뭐야?"
"혀, 형도 이거 보여요?"
그들의 앞에 정체 불명의 스크린 같은 것이 떠올랐다.
[Mission!]
[시간을 넘어온 '김민규'를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자!]
[2023년의 두 사람에게 주어진 미션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민규' 가 잃어버린 반지를 찾기]
글씨를 찬찬히 읽은 열 일곱의 김민규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순영을 돌아봤다. 그럴 만도 했다. 순영이야 그 반지가 어떤 반지를 뜻하는 건지 알지만 김민규는 당연히 모를 테니까. 그 바보 같은 얼굴을 보며 순영은 정말 혀라도 깨물어 버리고 싶었다.
"X됐다."
속마음이 입밖으로 고스란히 새어나와 버리고 마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3. 2013
스물 일곱의 민규가 별안간 날아가게 된 2013년이라고 2023년과 크게 다르게 흘러가진 않았다. 한동안 비명을 지르다가 서로의 정체를 확인하고는 얼떨떨하지만 일단 주섬주섬 자리에 앉은 채였다. 그 상태로도 순영은 한참 민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순영이 절 그렇게 보고 있을 땐 할 말이 있다는 걸 아는 민규는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렸다. 어차피 오래지 않아 참지 못하고 질문할 것을 아는 탓이었다.
"근데 그럼 뭐 물어봐도 돼? 요?"
"그냥 말 편하게 해…"
"아니, 근데 안 그래도 원래 진짜 저보다 형 같아서…"
"그거 지금 내가 삭아 보인다고 욕한 거지?"
그 말엔 대답 안 하고 모른척 하는 것만 봐도 그건 진심이었다. 순영이 가끔 농담처럼 아 난 너 처음 봤을 때 형인줄 알았잖아 소리 한 게 한 두번도 아니라 민규는 더 캐묻지 않고 한숨만 내쉬었다. 그걸 보면서도 순영은 결국 제 호기심부터 해결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민규는 순영이 뭐, 우리 잘 되느냐… 그런 걸 물어볼 줄 알았다. 하지만 그가 정작 물어본 건 민규 기준에선 영 뚱딴지 같은 소리였다.
"우리 혹시 짐승돌 컨셉으로 데뷔해?"
"뭐?"
그 말을 들은 민규는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비집고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짐승돌이라니, 들은 지 너무 오래 된 단어였다. 물론 지금은 10년 전이었고, 이 때만 해도 몸을 조금만 볼륨감 있게 키워도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곤 한다는 걸 알기는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질문하는 순영의 얼굴에 어떤 불안감 비슷한 것이 잔뜩 서려 있어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볼 때마다 다시 웃음이 터졌다. 짐승돌, 짐승돌이래. 이 이야기를 돌아가서 다른 멤버들에게 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듣는다면 비슷한 반응을 보일 게 분명했다.
"왜 웃어. 이게 웃겨?"
"아, 너무 오랜만에… 아. 아니야. 그냥 우리 다 운동해서 그래."
그 말을 들은 순영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른 질문을 던졌다. 민규가 생각하기에도 이 때의 저와 지금의 저는 덩치에 차이가 있었으니 눈에 보이는 것에 약한 순영에겐 그것부터 신경이 쓰인 모양이었다.
"나도 그럼 막… 형, 아니 너… 처럼 그래?"
"그런 게 뭔데요."
"아니 막 그렇게 몸도 크고 어…"
겨우 웃음을 잠재워가던 민규는 그 질문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 몸이 크냐고… 지금에 비하면 그렇기야 한데 절대적인 기준으로 따지자면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애초에 권순영 본인이 그렇다고 인식한 적이 없다는 걸 알기에 민규는 그저 좋게 돌려 대답해주기로 했다. 저 권순영도 운동을 시작하고 나면 제 몸이 어떤지는 직접 깨닫게 될 것이다.
"형도 운동 많이 했지."
"나 키도 좀 더 커?"
그건 진짜 아니라서 민규는 그냥 애매하게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순영은 그 침묵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는 뾰족하게 대답했다. 새삼스럽지만 이 때의 권순영에겐 지금의 권순영보다 훨씬 날것의 거칠거칠함이 남아 있었다. 기분이 나쁘면 나쁜 티가 확실하게 났고, 아쉬우면 아쉬운 티도 더 확실하게 났다. 이 형이 새삼스럽게 시간이 지나며 많이 둥글어진 거라는 걸 반응 하나하나를 볼 때마다 느낄 지경이었다.
"아니구나?"
"미래의 일은 스포일러 하면 좀 그러니까 말 안 할게. 근데 우리 데뷔하냐고는 안 물어보네."
그 말에 순영은 잠시 입을 삐죽거리다 툭 내뱉었다.
"그건 당연한 거고. 데뷔는 당연히 해야지."
민규는 잠시 그런 순영을 빤히 바라봤다. 이 형은 이런 점이 한결같았다. 하지만 아주 오래 보아 왔기에, 똑같은 결의 말에서도 아주 작은 차이를 짚어낼 수 있기도 했다. 불확실함을 억지로 덮기 위한 자기 최면. 불안함을 스스로 숨기고 다독이기 위한 말들. 어떻게 보면 그 나이라서 부릴 수 있는 만용이기도 했다. 그 때는 그냥 저 형은 독하단 생각만 했던 것 같은데, 커서 보면 다르게 와닿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만약 지금의 순영이 과거의 자신을 마주하는 중이라면, 그는 저를 보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졌다.
"왜 그렇게 봐?"
"아니, 좀 새삼스러워서. 형도 되게 어렸네."
민규의 그 말을 뒤로 침묵이 흘렀다. 분위기가 묘하게 어색해지는 중이었다. 그게 순영이 지금 미래의 저와 묘하게 낯을 가리기 때문이라는 것을 민규는 잠시 뒤에 깨달았다. 그래도 김민규라고 생각해서 낯을 안 가리고 있다가 새삼스럽게 또 잘 모르는 누군가 같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잠시 아무 말도 없던 순영이 작은 한숨과 함께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다 좋은데, 어떻게 해야 원래대로 돌아가?"
"나라고 알겠어? 눈 떠보니까 갑자기 여기 와 있었던 건 나도 마찬가진데… 내일부터 또 연습이라 못 돌아가면 쫌 많이 곤란하긴 해."
"회사에 연락하면 안되겠지?"
"음… 아마? 그런다고 해결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어디로 잡혀가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미래의 정보를 알고 있는 인간이라니, 회사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차원의 문제가 될 것은 분명했다. 진짜라고 밝혀지는 날에는 어딘가로 끌려가서 아는 것을 전부 실토해 낼 때까지 다시는 못 나올 수도 있었다. 가장 비극적인 상상을 해 보자면 그랬다.
잠시 영화적인 상상력을 발휘했던 민규는 고개를 탈탈 털어 버렸다. 그런 생각은 지금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갑작스럽게 비현실적인 상황을 마주하긴 했지만 뭐가 됐든 방법은 있을 것이다. 갑자기 바뀌었으니 또 어떤 이유에서든 갑자기 돌아갈 수도 있었고… 뭐라도 해 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민규는 눈 앞에 갑자기 떠오른 메시지 때문에 깜짝 놀라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
"뭐야, 너도 보여?"
[Mission!]
[시간을 넘어온 '김민규'를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자!]
[2013년의 두 사람에게 주어진 미션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두 사람은 오직 '진실'로만 대답할 수 있습니다.]
[고의적인 거짓 대답이 다섯 번 이상 누적될 시 실패로 간주됩니다.]
[5분 이상 침묵 금지 룰을 어겼을 시에도 거짓 대답으로 간주됩니다.]
[제한시간 : 2023년의 미션이 끝날 때까지]
[실패 패널티 : 귀환 불가!]
한참 허공에 뜬 글씨를 내내 읽던 두 사람은 나란히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뭔데. 이거 니가 한 거야?"
"이걸 내가 한 거겠어?"
"미래에 그런 기술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있겠냐고!"
"5분 이상 침묵 금지는 또 뭐야… 계속 떠들어야 돼?"
"뭐라도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근데 그냥 아무 이야기나 하면 되니까… 뭐 점심 먹었어? 같은 이야기나…"
"먹었어."
민규가 그렇게 질문 아닌 질문을 던졌을 때였다. 순영이 냅다 대답했다. 10년 전이라 세세히 모든 게 기억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들의 평소 생활 패턴을 생각해 봤을 때 절대 그랬을 리 없다는 것 정도는 민규도 알았다. 그의 눈이 경악에 커지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또 알림창 같은 게 뿅 하고 떠올랐다.
[거짓 대답 1회]
"진짜 되네."
"아니 좀 말 좀 하고 하자."
"되나 안 되나 알아보려고 그랬지."
"대책 없는 건 여전… 아니지, 이 권순영이 자라서 그렇게 된 거니까 그냥 원래 그랬던 거지…"
미쳤나봐! 민규가 어이없어 하든 말든 순영은 뒤통수를 긁적이면서 이게 진짜 되네, 하는 소리나 하고 있었다. 물론 민규도 이게 정말로 거짓을 판별해내긴 하는 걸까 궁금해했던 건 맞았다. 하지만 그걸 이런 방식으로 합의도 없이 냅다 저질러 버리는 게 너무나 권순영이라 힘이 빠졌다. 궁금하던 걸 알게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건지 앞으로 조심하라고 주의부터 줘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순영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아마 눈앞에 떠 있을 글자를 계속 좇고 있는 게 보였다. 한참 그렇게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그는 민규를 슬쩍 바라봤다. 그게 뭔가 급발진해서 발사되기 직전의 눈이라는 걸 먼저 알았어야 했는데.
"어쨌든 그럼 우린 계속 떠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렇기야 하겠죠? 뭐, 어쨌든 그럼 아무 말이나 하면 되겠네. 크게 문제 없을 만한 걸로…"
언제나 잠깐의 방심이 재앙을 부르는 법이었다. 눈앞에 떨어진 미션에 신경을 쓰느라 권순영이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하는 걸 잠시 놓친 대가로 민규는 지금 이 순간 받기 가장 곤란한 질문을 마주하게 됐다.
"방금 전… 그니까 여기 오기 전까지 뭐 하다 왔어?"
방금 전까지.
그는 권순영의 집에 있었다. 정확히는 권순영을 집에 두고 나가려던 참이었다. 당사자 이야기가 아니면 그냥 쉽게 이야기해주겠지만 눈앞에 있는 사람은 이 사건의 당사자…의 과거였다. 게다가 그 장본인이 한 번 호기심이 발동되면 못 말릴 인물이라는 점에, 자기 이야기라면 절대 못 참을 사람이라는 점에서 정말 최악의 주제였다.
"아니, 물어봐도 왜 하필 그런 걸 물어보냐…"
"뭐야. 애인이랑 있었어?"
"아니야!!"
민규가 반사적으로 버럭 소리를 쳤다. 그 바람에 깜짝 놀랐던 순영은 미간을 팍 찌푸렸다. 애인, 애인은 아니긴 했다. 그것은 확실히 진실로 처리되는 모양인지 거짓 대답이라는 알림은 뜨지 않았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소리를 쳐? 누구랑 있었는데?"
"…너, 그니까 호시…아니, 순영이 형이랑 있었다 왜."
"나? 둘이? 어디에?"
이럴 줄 알았다. 제 이름자를 듣자마자 순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이런 반응을 보일 걸 알아서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게다가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지금, 조금이라도 잘못 둘러댔다간 큰일이 날 게 뻔했다. 말 그대로 지뢰밭에서 탭댄스를 추는 기분이었다. 리허설 하나도 안 하고 무대 올라가기 1분 전인 기분인 것도 같았다. 5분 침묵 룰이 있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없었다.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거 하나 없이 돌발적인 상황의 연속은 민규에겐 제법 스트레스이기도 했다. 순영과 있는 순간의 많은 부분이 그런 편이긴 했는데 오늘은 한층 더한 것도 같았다.
불확실성의 결집체. 통제되고 제어되지 않는 변수. 그게 권순영이긴 했다. 그래도 세월이 쌓아준 짬이 어디 가지는 않아서, 민규는 일단 적당히 말을 돌리기 위한 물꼬를 틀 수는 있었다.
"아니, 그걸 왜 캐물으려고 하는데. 꼭 알아야 돼?"
"니가 말하기 싫어하니까 궁금해졌어. 어쨌든 나랑 같이 있었던 거면 내 이야기인 거잖아. 뭔데, 말 좀 해 봐."
"형네 집에… 둘이."
"아, 나 집 샀어?!"
"지금 그게 중요… 하지. 그래. 중요하지."
"근데 우리 집에 왜?"
그냥 놀러갔어. 라고 대답을 하고 싶었다. 보통 같은 그룹의 멤버란 그렇게 대답해도 문제가 없을 사이니까. 하지만 민규는 그것 때문에 간 게 아니었다. 여전히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거짓은 아니지만 자세한 것을 이 청소년에게 말하지 않아도 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가 시간이동의 역설에 대해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저런 매체에서 본 걸로만 가늠해 보자면, 그가 기억하는 과거엔 이런 사건은 벌어진 적 없었기에 이건 어쩌면 그놈의 멀티버스인지 뭔지의 권순영일지도 몰랐다. 그가 미래의 일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게 과연 이 권순영에게 좋은 일일까?
그리고, 원래 이 시간에 있을 김민규에게는?
"왜 대답을 못 하는데?"
"그게."
하지만 순영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채자마자 민규를 채근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지 민규가 알 도리는 없었다. 다만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인 그 모양새가 퍽 진지해 보인다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처음 이 말도 안 되는 진실게임을 시작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집중도였다. 관심 있는 것과 아닌 것에 대한 태도 차이가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화제가 본인 이야기라는 걸 떠나서 왜 지금 이 때의 권순영에게 흥미로운건지에 대해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형이 불러서 갔어."
"내가 불렀어?"
"그랬지."
"왜?"
"제발 그 왜? 좀 그만 하면 안 돼?"
"내 일인데 왜 못 말하는데?"
당사자 일이니까 더 말을 못 하는 거였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를 두고 어젯밤에 그 둘 사이에서 헤어진 연인 간에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또 그리 쉽게는 벌어지지 않았을 어떤 일이 벌어졌다는 걸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얘기 좀 하자 그래서 갔어. 이 질문 더 안 받아. 끝."
#4. 2023
다행히 민규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열심히 읽느라 순영이 읊조린 욕을 반쯤 흘려 버린 모양이었다. 그 망했음의 이유를 잃어버린 걸 찾으라는 말도 안 되는 요구에 대한 반항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도 같았다. 못마땅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로 어린 민규가 투덜거렸다.
"반지? 잃어버린 반지를 어떻게 찾아?"
그렇게 중얼거리던 민규가 고개를 들어 순영을 바라봤다. 그 시선엔 한치의 의심도 없었다. 그냥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의견을 구하고 있을 뿐이었다. 묘하게 맹해보이기도 하는 그 표정이나 얼굴이 정말 어린애라서 기분이 이상하긴 했는데. 순영은 그런 감상에 젖어있을 겨를이 별로 없었다.
"무슨 반진지 형도 알아?"
"알… 지…"
순영이 대답을 애매하게 하자 다시 눈을 내리깔았던 민규가 조금 초조해진 건지 손톱을 깨물어대기 시작했다. 이젠 꽤 교정된 버릇이지만 저때만 해도 정말 자주 그랬었다는 게 문득 생각났다. 그거 그만 하라고 팔을 잡아 끌어내리자 아, 하고 머쓱해져 손을 슬쩍 뒤로 숨기는 게 보였다. 제법 여전하다 생각했는데 그 손가락에서 세월의 흐름을 읽게 될 수 있을줄은 몰랐다. 단정하게 관리된 손이 아닌… 그냥 덜 자란 감자 손이었다.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순영은 사실 아까부터 자꾸 울렁거리는 기분을 꾹꾹 억눌러야만 했다. 제가 왜 그러는지 몰랐다. 아니, 알고 있었다. 알았지만 모르고 싶었다. 저맘때의 김민규를 보고 있자면 꼭 그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분명 비슷한 시기에 처음 들어와서, 한참 저와만 잘 지내는 것 같다가 어느 새 다른 사람들과도 똑같이 친해져 버리는 김민규를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이나 그 미묘한 긴장감 따위가 일시에 몰려들었다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가끔 연습생 시절의 사진을 보거나 할 때 느꼈던 것과는 확연히 다른 감정의 깊이였다.
"설명을 해줘야 찾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찾을 수 있으니까 미션 준 거 아냐?"
"나도 몰라. 그냥… 니가 어느 날 잃어버렸다고 말한 걸 들은 게 다야."
"무슨 반진데."
그래서였을지도 몰랐다. 쟤한테 솔직하게 다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는데, 어차피 이야기를 안 해서 뭐 어쩌나 싶기도 했고… 불쑥 솔직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2023년의 김민규가 제게 답하지 못하는 것을 2013년의 김민규라면 답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가 니 생일 선물로 준 반지다, 왜."
"어? 형이 반지를 사 줬어?"
"그래."
"언제? 왜?"
그렇다고 해도 제 입으로 이걸 털어놓는 건 생각보다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순영은 그제야 자신이 이 일에 대해 다른 누군가와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두 사람이 그 때 그런 사이였다는 것을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같은 멤버들에게도 숨겼다. 아니, 오히려 같은 멤버들이라서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곤 생각했지만 본인들 입으로 그렇다고 말하지 않으면 모른 척 해주는 게 그들 사이의 의리이기도 했다.
그 당시 그들은 은연중에 관계가 끝난 뒤를 먼저 생각했다.
서로 어색해질 일은 없게 하자. 헤어지던 때도 둘은 그런 이야기부터 먼저 했다. 응어리진 감정이며 수많은 할 말들이 그 한 마디로 정리가 되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하면 사실 정리된 건 하나도 없었을지도 몰랐다. 엉망진창으로 시작한 연애는 정말 엉망진창으로 흘러갔다. 당연히 그게 지나간 자리도 온전할 수는 없었다.
"너… 몰라. 좀 됐어. 잃어버렸다 그런 것도 좀 됐고."
"어디서 잃어버렸다고 했는데?"
"인터뷰에선 촬영장."
"인터뷰에선? 그럼 형한텐 다르게 이야기했어?"
"나는 못 들었지."
반지를 끼지 않게 된 건 그들이 헤어진 것보다 좀 더 먼저의 일이었다. 이미 한참 관계가 삐걱거리던 중이었다. 너 그거 왜 안 끼고 다니냐고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 때는 스스로의 일로 허덕이느라, 반지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김민규가 과연 순영이 그 반지의 행방을 먼저 물어주길 바랐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2023년의 김민규가 돌아와도 그걸 물어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고.
"형이 선물해 준 건데 왜 형한테 이야기를 안 해? 나 혹시… 싸가지 없어졌어?"
"아니. 넌 그냥 똑같지. 그걸…"
하지만 그런 사정을 모르는 2013년의 민규는 순영의 말을 듣고 조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자기가 잃어버려놓고서 말을 안 했다고? 미안하다고 사과라도 한 번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물론 평소의 김민규였고 저들이 단순히 형동생 사이였으면 바로 이실직고를 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런 사이가 아녔으니까. 잃어버렸다는 말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했다. 직접 한 것도 아니고 지면 인터뷰로 알았다. 순영이 그 인터뷰를 본 건 아주 우연한 일이었기에 그러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수도 있었다. 잃어버렸는지, 버렸는지.
어쨌든 자기도 모르게 그게 김민규 잘못이 아니라는 걸 변명해 주려다 순영은 이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제 머리를 벅벅 긁어 헝클어 놓은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하, 모르겠다 나도."
고개를 푹 숙였던 순영이 눈만 들어 민규를 바라봤다. 조금 바뀐 분위기에 순영을 보고 있던 민규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어쨌든 쟤가 내내 제 눈치를 보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야. 김민규야. 잘 들어."
민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오묘한 표정에서 제 미래에 대한 수만 가지 악담을 들을 각오도 엿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순영이 할 말은 민규 흉 보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걸 흉이라고 한다면 흉이겠지만, 그렇다면 그건 순영 본인의 욕이기도 했기에 별로 죄책감 같은 건 없었다. 미래에 대한 스포일러니 뭐니, 순영은 그런 것까지 신경쓰지는 않았다. 어차피 쟤도 본인인데 어쩔 거야.
"일단 너랑 나랑 사귀는 사이였어."
김민규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입만 떡 벌렸다. 머리 위에 거대한 물음표가 수십 개 떠다니는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자신이 들은 게 말 그대로의 뜻이 맞는지 곱씹는 듯도 했다. 하지만 순영은 민규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나머지를 주워섬겼다. 처음부터 설명하거나 뜬금없이 중간부터 뚝 끊어 설명하는 것밖에 못하는 그는 제 설명이 좀 부족할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너랑 내가 지금 너때쯤부터 슬슬 서로 묘하게 의식하다가, 어쩌다가 눈이 맞아서 진짜 사귀게 됐는데… 부터 시작하는 대서사시를 여기서 풀고 앉았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귀는 사이였다고. 그래서 내가 반지를 줬고. 너 그거 한참 잘 끼고 다녔고. 근데 뭐, 좀 이런저런 일 있어서 헤어졌는데… 너 같으면 헤어진 사람이 준 반지를 끼고 다니겠냐."
지독한 침묵이 흘렀다. 정말 지독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순영은 입을 몇 번 다시다가 말을 한 번 다시 맺었다.
"그렇게 된 거야."
"뭐가 그렇게 된 거…아니 진짜, 진짜 하나도 못알아듣겠는데요. 내가 형이랑 뭐?"
"아 사귀다 헤어진 사이라고!!!"
고…고…고…
결국 답답해진 순영이 버럭 외치는 소리가 너른 집을 웅웅 울렸다. 메아리처럼 퍼져 나가는 소리에 민규는 얼이 빠졌다가 급하게 되물었다. 우리 사귀는 사이라는 소리도 이걸로 남에게 처음 해 봤다. 여기 김민규는 어쨌든 김민규지만, 남이긴 했으니까.
"우, 우리가 왜요?"
"니가 묻냐, 그걸?"
"근데 그럼 왜 헤어졌어요?"
"그러게."
물론 그 때는 헤어질 만 했다.
그냥, 뭐든 안 좋은 시기였다. 서로 의견도 안 맞았고, 마음도 안 맞았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사실마저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또 그것도 별 거 아니었는데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크게 느껴졌을까. 순영에게 있어 김민규와의 관계란 대체적으로 그러했다. 그 별 거 아닌 게 이상하게 쟤랑만 엮이면 엄청 큰일처럼 느껴져서, 그게 너무 거슬려서 참을 수 없는 관계. 그러다 또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게 다르게만 보였다. 어떤 사람을 모른 척 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지독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깨닫기까지도 좀 시간이 걸렸다.
말 그대로 삽질의 연속이었다.
한참을 충격에 허우적거리던 민규는 서서히 그 사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또 손톱을 물어뜯으려다가 아차 하고 손을 내리고선 순영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어떤 표정인지는 잘 모르겠어서 순영은 괜히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손바닥에 제 뺨이 눌렸다. 묘하게 뜨끈했다.
"그럼 잘 지낸다 그랬던 건 거짓말이에요?"
"아니, 뭐. 그렇지는 않아. 잘 지내지."
"우리 굉장히 이상한 어른이 됐나봐…"
"야. 우리가 헤어졌다고 그룹이 끝나겠냐 뭐 어쩌겠냐. 그냥 헤어진…거지."
심지어 웃고 떠드는 것도 잘 할 수 있었다. 여럿 사이에 끼어있다 보면 그게 그렇게 이상하진 않기도 했다. 가끔 무대에서 눈이 마주치면 신이 나서 웃을 수도 있었다. 헤어져도 아무 것도 끝나지 않았다.
"제가 그게 괜찮았을까요?"
김민규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걸 순영은 그 질문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 왜냐면 김민규는 저보다 훨씬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헤어진 뒤에 어색한 분위기를 뚫고 먼저 말을 걸어 오는 것도 김민규였다. 너무 티 내지 말자. 그런 소리를 지나가면서 언뜻 했던 것도 걔였으니까, 괜찮지 않았을까. 그게 또 괜히 열받아서 한 번 대차게 성질을 벅벅 긁어 놓은 적도 있었다.
그 때도 김민규는 둘의 사이가 어떠한지에 대해 토로하지는 않았다. 그냥, 조금 지친 표정을 했던 것도 같았다.
"…글쎄. 김민규한테 물어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어."
"그럼 형은?"
"괜찮았겠냐? 엄청 거슬렸지. 헤어졌는데 자꾸 봐야되고. 뭐… 못 지내지도 않긴 했는데 신경은 쓰이고."
"형 진짜로 나 좋아했구나."
방금 자기가 한 말의 어디를 그렇게 받아들였는지 순영은 따라갈 수가 없었다. 김민규는 종종 순영에게 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때가 있었는데, 그건 순영 입장에서도 사실 좀 비슷했다.
"갑자기 그건 왜."
"아니, 그냥. 형은 왠지 같은 그룹 내에서 그러는 거 아니라고 딱 자를 것 같은데 사귀었다고 하니까. "
"니가 뭔데 날 판단하냐."
일단 그렇게 대꾸는 했는데 또 뱉어놓고 나니 저 어린 민규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순영이 웅얼거리는 털어놓았다. 같은 그룹 내에서 그러면 안 되지 않냐. 애초에 권순영이 처음 김민규에게 했던 말이기도 했다. 근데 그래 놓고 결국 너 좋아해서 안 되겠다는 말을 한 것도 저라서.
"근데… 실제로 그렇게 말하긴 했네…"
그 말을 듣고 있던 민규가 조금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선이라도 그어둔 것처럼, 기다려 소리 들은 강아지처럼 내내 얌전히 있었던 민규지만 왠지 지금은 그래도 된다는 약간의 용기라도 얻은 것 같았다. 약간 얄밉게 웃고 있는 그 얼굴이 사실은 좀 잘 보이고 싶은 표정이라는 것도 지금은 알았다. 어렸을 때는 그냥 그게 얄밉기만 했지만 이젠 알았다. 너무 늦게 안 게 문제였다.
"다시 잘 해볼 생각 없어요?"
"니가 그걸 왜 신경 써."
"싫었으면 형이랑 다시 말 안 했을 걸? 아마… 그게 진짜 저라면. 아. 모르겠네. 어쨌든 그렇단 거지."
저 싫었으면 사귀지도 않았을 거예요. 형이 먼저 사귀자 그러진 않았을 거 같은데 그럼 내가 더 좋아했을 거고… 그럼 정말 좋아했던 거겠지. 저도 그룹 내에서 그런 문제 만드는 건 싫거든요? 근데 그래도 그랬던 거면 형 진짜 좋아했을 거야. 그, 형이 아는 김민규가 지금 저랑 똑같은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그렇지 않을까요? 어쨌든 그게 저라면 그렇게 생각할 거 같은데.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아는 순영이 형은 나 별로 안 좋아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됐지…
어느 시점에 반박하기 위해 끼어들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보고 있는 순영에게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던 민규는 잠시 무언가 떠올린 건지 아, 하고 말을 멈췄다. 안 되는 걸 하라고 할 리 없잖아! 그렇게 외친 민규는 갑자기 냅다 순영의 손을 덥썩 붙들었다. 갑자기 닿은 손길에 순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뒤로 휙 빼지는 않았다. 그랬다간 저 어린 민규가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형. 저 지금 어디 사는지 알아요?"
"알지. 원우랑 같이 숙소 사는데."
"들어갈 수 있어요?"
"어? 어. 뭐. 갈 수 있지."
"그럼 좀 데려다 줘요. 반지,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아."
"아, 어. 야. 잠깐만."
묘한 확신에 찬 얼굴을 보고 있던 순영이 어, 어어. 하고 자리에서 끙끙대며 일어났다. 상황이 상황이라 별 생각 없이 바닥에 주저앉긴 했는데 몸이 좀 힘들긴 했다. 끙 소리를 내서 일어난 순영은 제 옷장을 들어 엎었다.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모자에, 약간 차이가 날만한 몸을 가릴 만한 옷가지 등을 꺼내 왔다. 순영을 따라 엉거주춤하니 일어선 민규에게 옷을 죄다 들어 안긴 순영이 갈아입으라 하자 민규는 금세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하나둘 옷을 받아 입었다. 모자까지 다 씌워놓고 나니 아주 똑같지는 않아도 대충 얼굴 가린 지금의 김민규라고 우겨볼 수 있을 정도는 됐다.
민규가 옷 입는 동안 순영도 마찬가지로 외출복을 대충 걸쳐 입었다. 현관으로 민규를 내몰고 신발은 저거 신으라고 가리키자 민규는 별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 신발을 신었다. 그게 제 발에 맞는 사이즈라는 것을 알아차린 민규는 조금 묘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들었다.
"옷은 그렇다 치는데 신발은… 형이랑 나 사이즈 다르잖아?"
"그거 니 신발이야."
그게 자기 신발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민규는 멍한 얼굴로 자기 발을 내려다봤다가 다시 순영을 바라보았다. 헤어진 사이. 그렇지만 신발은 여기에 있고… 헤어진 지 좀 됐다고 했던 거 같은데 예전에 두고 간 걸 여즉 뒀을 리는 없을 것 같고. 근데, 그러면?
"나 여기 있었어? 지금 아침… 인데?"
순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긍정이라는 것은 자명했다.
"나 여기서 잤어?"
또 다시 침묵.
"우리 헤어진 사이라며?"
"야. 어린애가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 마."
"아, 다 알게 해놓고 뭘 알려고 하지 마!!! 나 진짜 미쳤나봐!!!"
그렇게 외치는 민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입만 뻐끔거리던 그가 거의 꺄아악, 에 가까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 진짜 싫어! 뭐하는 짓이야! 아! 현관 앞에 선 민규가 거의 그 자리에 주저앉을 듯 굴었다. 솔직히 순영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는 처지라 그냥 그 모습을 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정말 김민규는 자기 필요한 부분에서만 눈치가 귀신같이 빨랐다. 그냥 그렇게만 말했는데도 어젯밤에 제가 여기서 자고 갔고, 그게 정말로 그냥 '자고' 만 간 게 아니라는 것까지 알아챈 모양이었다.
물론 어제 왜 그렇게 된 건지 변명이라도 해 보라 그러면 할 말은 많긴 했다. 둘 사이에 있었던 약간의 응어리가 해소된지 그리 오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 응어리가 그들의 구 연인 관계 때문은 아니긴 했지만 굳어 있던 관계가 살짝 말랑말랑하게 풀어진 뒤이기도 했다. 이럴 거면 술 한잔 더 해, 말아. 그런 이야기를 몇 번 주고받다가 단체 술자리가 이어진 뒤 이럴 거면 우리 집 가잔 이야기를 김민규한테 했었다. 정확히는 니가 무조건 우리집에 가야 한다고 권순영이 우겼다. 실제로 좀 취해 있긴 했는데 자기가 좀 더 많이 취한 것처럼 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김민규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따라는 왔고.
그게 그렇게 됐다.
배 맞댄 적이 많았던 사이라는 건 원래 좀 그런 법이기도 했다. 약간의 계기랑 흐름만 있으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그게 꼭 다시 사귈 수 있다는 뜻은 아니기도 했다. 그랬으니까 애초에 오늘 아침에 김민규가… 하지만 순영의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제 앞에 있는 어린 김민규가 투덜거리듯이 물은 탓이었다.
"우리 진짜 헤어진 거 맞아?"
"맞다니까. 니가 뭔 생각 하는지는 나도 모르고… 너도 내가 뭔 생각 하는지는 모르겠지. 일단 빨리 가기나 하자. 원우한텐 미리 말 해 놨어. 지금 없대."
#5. 2013
"진짜 치사하다."
"치사해도 어쩔 수 없어."
"김민규가 이렇게 큰다고 생각하니까 짜증나."
"이렇게 크는 걸 몰랐어도 짜증냈잖아."
질문을 차단해버린 민규 때문에 순영은 입술이 댓발 튀어나왔다. 아직도 묻고 싶은 게 잔뜩 남은 모양이었으나 민규는 정말로 그 화제에 대해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권순영은 정말 어디로 튈지 몰라서, 미래의 자신들이 그런 사이인 데다 헤어진 뒤에 어쩌다보니 또 자 버리기까지 한 사이라는 걸 알고 나면 전력질주해서 그 반대방향으로 달려나갈지도 몰랐다.
내가 그랬다고? 야, 말도 안 돼. 난 절대 안 그래.
대충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을 상상하는 게 어렵지도 않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말을 한 번 하고 나면 마치 스스로 주문이라도 건 것처럼 그걸 지키려고 애를 쓸 것도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이 세계의 김민규와 권순영은 영영 사귀지 않게 될 수도 있었다. 그게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의 미래에는 더 좋은 일일수도 있겠지만… 김민규는 잠시 생각했다. 그래도 역시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권순영과 사귀던 중 김민규가 그렇게 행복하기만 했냐면 그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을 없던 일로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가끔은 너무 짜증나고 왜 이런 기분을 겪어야 하는지 영 모르겠다 싶기도 했지만 너무 행복해서 죽을 것 같았을 때도 있었다. 땀에 푹 젖어서 따끈따끈해진 권순영이 밍숭맹숭한 얼굴로 절 올려다보다가 너무 기분 좋다는 듯 꽉 끌어안을 때. 냉큼 일 다 보고 나면 침대 바깥으로 굴러 나갈 것처럼 굴었으면서도 정작 제가 자는 줄 알고 그 얼굴 한참 들여다보면서 만지작거릴 때도 그랬다. 그러다 가끔은 좋아한다고 중얼거리는 때도 있었다. 직접 말해주는 일도 있었다. 권순영의 최대 장점은 솔직하다는 거여서 한없이 벅차오를 땐 네가 너무 좋아서 죽을 것 같다고 연거푸 되뇔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김민규는 그 때의 권순영이 자길 사랑했음을 의심해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무르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5분 침묵 룰도 있었으니 이대로 아무 말도 안 할 수는 없었다. 민규는 이번엔 질문의 주도권을 제가 가져 오기로 했다. 순영에게 마냥 맡겨 두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하에서였다.
"그래. 그럼 나도 뭐 물어볼테니까 그거 대답해주면 나도 하나는 대답해 줄게."
"어른이 쪼잔하네."
"형도 쪼잔한 어른 될 거거든요."
그 말에 한참 민규를 째려보던 순영이 뒤로 몸을 기울였다. 어디 하고 싶은 질문이 있으면 마음대로 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어차피 니가 뭘 물어봐봤자 별 상관도 없다는 듯한 태도였다.
"알았어. 뭐 물어볼 건데?"
"나 왜 싫어했어? 아. 지금이면 싫어해? 인가?"
하지만 준비라도 된 것처럼 냉큼 튀어나오는 민규의 말에 순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솔직히 민규도 제가 꽤 짓궂은 질문을 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이 간혹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 때 너 나 싫어했잖아요~ 이렇게 물어보면 순영은 매번 대답을 회피하곤 했다. 요새는 날 좀 좋아해주는 거 같기도 해~ 이런 말에 어 알았어. 이러고 넘겨 버리기도 했다. 그게 진짜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솔직하게 대답하기엔 스스로 켕기는 게 많아서 보이는 반응임을 민규도 알았다.
민규는 순영이 아예 대답을 못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 또 한 번 횟수가 차감될 수도 있다 생각했다. 아직 횟수가 몇 번 남았으니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순영이 뱉어놓은 말은 제법 의외였다.
"안 싫어해."
"거짓말… 이 아니구나?"
거짓말 판정이 뜨지 않은 게 가장 놀라운 지점이었다. 진짜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이거 시스템이 잘못된 거 아니야? 하지만 아까 거짓 판정이 뜨는 걸 본 뒤라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민규가 얼떨떨한 얼굴을 하고 있자 순영이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뒤이어 부연설명을 했다.
"짜증나는 거랑 싫어하는 건 다르지."
"아. 짜증은 나는구나."
"니가 맨날 툭툭 치잖아. 그러면 진짜 아프다고 했는데도 툭툭 치고."
"그거는… 됐다. 마저 말해봐."
"들어온 지 좀 오래 됐으면 장난도 좀 덜 쳐도 되는데 자꾸 장난치고. 나는 뭐 애들한테 뭐라고 하는 게 좋아서 그러는 줄 아냐?"
"못 하는 거 싫어하는 건 맞잖아…"
그렇게 말을 툭툭 주고받고 있자니 뜬금없이 그 때 그 연습실 좁은 방 안에 앉은 기분이었다. 마주앉아서 서로 니가 잘했네 내가 잘했네를 따지던 때를 말하던 것이었다. 그 때는 순영이 뭐라고 지적하는 게 좀 욱하기도 하고 저 형이 또 저런다 싶어서 저도 하나하나 따지듯 대답했던 게 떠올랐다. 순영이 자길 영 마음에 안 들어해서 그런다 싶기도 했고… 물론 이제 와 생각하면 그럴 일도 아니긴 했다. 그 때 순영이 왜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그 때의 김민규는 몰랐지만 지금의 김민규는 적어도 그가 보는 방향을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오기로 남아 버티고 있었던 때와는 다르기 때문에.
"못 하는 데 잘 할 생각도 안 하는 게 싫은 거지."
"그건 그렇긴 해. 열심히는 해야지. 근데 나한테 이런 거 다 말해도 돼?"
문득 민규는 걱정이 됐다. 순영이 이렇게 시원스럽게 털어놓는 것도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민규가 그런 걱정을 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순영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고민은 처음 대답하기까지 짧은 순간에 전부 끝낸 모양이었다. 어차피 이야기할 거 화끈하게 하지. 뭐 그런 태도였다.
"어차피 김민규는 모를 거잖아. 상관 없어."
"미래의 형은 어쩌라고."
"나보다 어른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뭐."
"그냥 내가 미래의 형한테 이런 소리 들은 거 비밀로 해 줄게…"
결국 좀 더 어른이라 좀 더 조심스러워진 민규가 감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린 순영을 당황하게 하려고 한 질문에 결국 먼저 당황하게 되는 게 저인 것도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10년 전의 권순영은 분명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어리숙하고 속이 빤히 보이는데도 제가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저 형 때문에 어이없어 하고 당황하는 건 아마 앞으로도 내내 그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권순영 저거 또 저러지, 또 저럴 거야 싶을 때 영판 다른 답을 내놓는 게 그라서. 예측 가능할 정도로 한결같은데 또 예측 불가능할 정도로 지멋대로라서.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순영은 칭찬같지도 않은 칭찬을 주워섬겼다.
"너 디게 어른스러워졌다."
"하, 하하… 고마워. 어른한테 어른스럽다고 해줘서… 그거 말곤 짜증나는 이유 더 없어?"
이번에는 조금 더 침묵이 길었다. 민규는 차분하게 기다렸다.
"나만 너 신경 써서."
"어?"
"나만 너 신경 써서 짜증나. 너는 맨날 나 만지기나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건드리고. 그래 놓고 또 다른 애한테 가서도 똑같이 그러고. 근데 나만 그거 신경 써서 짜증난다고."
아까보다 좀 더 날것의 감정이 실린 말은 얼핏 날카로웠다. 짜증난다는 말에 강세가 실려 있어 자칫 잘못 알아듣기 쉬웠다. 너는 진짜 눈치도 없고 사람 짜증나게 해. 그 말까지 덧붙이고 나니 한층 더 그러했다. 그러나 그 말에 담긴 속내를 좀 더 파악할 수 있는 건 그가 10년이라는 세월을 지금의 순영보다 더 먼저 살았기 때문이었고, 권순영이 어떤 사람인지 더 많이 겪어보았기 때문이며…
"형, 너 이때부터 나……"
그가 결국 저를 좋아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됐지. 이제 내가 물어본다. 내가 마지막으로 너한테 한 말이 뭐야?"
이럴 줄 알았지. 민규는 순영이 결국 여전히 그들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거란 걸 알았다. 질문은 뜬금없는 것 같으면서도 제법 핵심을 꿰뚫었다. 저게 머리를 열심히 굴린 결과가 아니라 그저 감으로 짚어낸 최적의 질문이라는 게 가장 무서운 점이기도 했다.
가장 마지막에 한 말. 그건 순영이 문 밖으로 나서려는 저를 붙잡으며 한 말이었다. 직전에 저는 그렇게 말했다. 다음엔 실수 안 할게. 순영은 제가 신발을 신으려 나설 때까지도 대답 않은 채 저를 빤히 보고만 있었더랬다. 그러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뱉은 말이 그거였다.
"나 실수한 거 아냐."
대답하기도 전에 2013년으로 날려와 버려서 뚝 끊어져 버리긴 했지만 민규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르진 않았다. 실수한 거 아니야. 어젯밤의 그 일은 그러고 싶어서 한 거야. 너는 실수였을지 몰라도 나는 실수가 아니었어. 민규는 그 순간 문득 2023년에 남아 있을 권순영이 많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말했어."
"그렇구나."
의외로 그 말을 듣는 어린 순영의 태도는 시원스러웠다.
"그거 말곤 더 안 궁금해?"
"안 궁금해. 알 거 같아서."
그거면 됐다는 듯한 그 담백함은 일종의 자기 확신이기도 했다. 순영의 시선이 민규를 똑바로 향했다. 2013년의 권순영을 통해 2023년의 권순영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나, 너 좋아하지?"
그리고 그 때, 또 다시 그들의 시야에 메시지가 가득 떠올랐다.
[Mission Complete!]
[시뮬레이션 종료.]
[사용자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보냅니다]
[Now Processing…]
글자의 마지막 부분이 깜빡였다. 시야가 점멸하는 것이 느껴졌다. 눈앞에 앉아 있는 어린 권순영의 모습이 점점 흐려지는 것이 느껴졌다. 민규는 직감했다. 이 꿈인지 뭔지 모를 것이 끝난다는 것을. 미래의 사실을 먼저 알려주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이 사실만큼은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 때의 김민규라고 권순영을 남들과 아주 똑같이 생각하지만은 않았다고.
"몰라. 근데… 내가 형을 좋아하긴 해! 지금도, 그 때도."
#6. 2023
김민규는 제 집에 들어서서 한참을 어색해 했다. 그 집의 대부분을 제가 꾸몄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자 한층 더 이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내가 이런 취향… 이구나. 아직 취향이라는 게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기라 그런지 약간 의아해 하는 것도 같았다. 반쯤은 그럴 만하다 생각하는 것도 같았고, 반쯤은 이걸 왜 이랬지? 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으나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라 순영은 그의 등을 방으로 떠밀었다.
"뭐 알 거 같아서 온 거 잖아. 한 번 잘 봐."
"아니. 그냥… 다른 건 아니고. 잃어버린 거 아닌 거 같아서."
그렇게 말한 민규는 낯설어하는 손길로 자신의 소지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그걸 정리해 놓은 게 자기 자신이라 그런지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대충 뭐가 어디 있을지는 알 거 같은 모양이었다. 금세 악세서리가 놓인 위치를 찾아낸 그가 이것저것 끄집어 내놓기 시작했다.
"잘 봐봐. 나는 그거 무슨 반지인지 모르니까…"
순영은 고개를 끄덕이고 민규가 하는 모습을 구경했다. 하나하나 민규가 손에 잡히는 걸 끄집어 낼 때마다 순영은 기대했다가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얘가 김민규니까 믿고 온 거긴 한데 정말 여기 있을까 싶긴 했다. 버렸을 수도 있고 정말 잃어버린 걸 수도 있었다. 잃어버린 게 그렇게 이상하지도 않았다. 김민규인 걸. 그렇게 악세서리 칸이 거의 바닥이 날 때쯤이었다.
"어."
짧은 소리를 낸 민규가 좀 더 손을 쑥 밀어넣었다. 그의 손에 끌려 나온 건 작은 벨벳 주머니 같은 거였다. 어쩐지 순영은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민규가 꺼내 놓은 주머니를 순영이 먼저 집어들어 열었다. 잘 오므라든 주머니를 열어서 손바닥에 뒤집어 털자 잘 아는 반지가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아.
순영은 잠시 그대로 멈췄다. 그 모습을 보고 민규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게 이 반지라는 걸. 순영이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자 민규가 먼저 말을 열었다.
"그. 흠집 나는 거 싫었나봐. 안에 굴러다니면 흠집 생기니까…"
"그러게."
"형. 그러니까요."
순영은 민규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모습이 문득 그들이 처음 사귀기 시작했을 때의 민규 같았다. 자기가 말을 꺼내 놓고도 이게 맞나 싶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게 제일 그랬다. 아, 귀엽다. 순영은 문득 터져나오는 제 마음의 소리를 들었다. 문득 뽀뽀라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적어도 상식 있는 어른이기에 꾹 참았다.
"왜 헤어졌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어제… 형이 부른다고 간 거였으면. 나는 형 좋아하고 있을 거야."
정말 못 참겠네. 순영이 피식 웃었다. 순영은 정말로 얘가 강아지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몇 번이고 기대를 배신했던 거 같은데, 쟤는 어느새 그걸 또 까먹고 돌아오는 게 그런 거 같아서.
"내가 널 엄청 서운하게 했는데?"
"그래도 좋아하니까 서운해 한 거 아닐까…요? 어른들은 무슨 생각 하는지 잘 모르겠네 나는."
그 와중에도 또 투덜거리는 게 애다워서 귀여웠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해줬다.
"맞아. 나 너 좋아해. 다시 잘 해보고 싶어서 너 불렀어."
그 말을 하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알림 메시지가 떠올랐다. 2013년의 그들 앞에 메시지가 뜬 것과 동일한 순간이었다.
[Mission Complete!]
[시뮬레이션 종료.]
[사용자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보냅니다]
[Now Processing…]
"어어. 자, 잠깐만. 물어볼 거 있는데…"
민규는 갑작스럽게 원래 상태로 돌아가려 하는 주변 풍경에 당황해 허둥거렸다. 하지만 순영은 그걸 보면서 그저 웃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의 제가 알면 미래의 자신을 한 대 치고싶어할지도 몰랐지만, 여기 와서 고생해준 어린 민규에게 그 정도는 해줘도 되지 않나 싶었다. 책임은 걔가 지겠지.
"그리고 니가 아는 나도 너 안 싫어해. 가서 물어봐."
그렇게 시야가 어둡게 물들었다.
#. Outro
두 사람은 암막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에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은 한없이 무거웠고, 머리도 약간 띵했다. 방금 자신이 잠들다 깨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직전에 꿨던 꿈이 꿈답지 않게 지나치게 생생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눈을 몇 번 깜빡였을 때, 그들은 서로의 코앞에 상대방의 얼굴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간밤에 그들은 헤어진 연인 간에 쉽게 벌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하고 싶다면 해서는 가장 안되는 일을 저지른 뒤였다. 그리고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정답게 끌어안고 한 침대에서 자고 일어난 채였다. 맨살과 맨살이 바짝 맞닿아 이불 안에서 엉켜 있는 것이 생생하게도 느껴졌다.
순영은 코앞에 있는 민규의 얼굴을 보고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어서, 일단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부터 꺼냈다. 내가 10년 전의 너를 만나는 꿈을 꿨다고 설명하기엔 너무 길어서 중간을 뚝 잘라낸 말이었다.
"나 방금 꿈을 꿨는데."
"형도?"
"너도?"
두 사람은 또 한참 눈만 깜빡거렸다. 같은 꿈을 꿨는지 아닌지는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봐야 알 일이겠지만, 어쩐지 그럴 거라는 직감이 어렵지 않게 들었다. 그리고 또 같은 꿈이 아니었으면 어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침대에 늘어져 있던 손을 조심조심 움직인 순영이 민규의 손끝을 톡 건드렸다.
"나 미리 말할게. 나 실수한 거 아냐."
아주 살짝 얽혀 있던 손가락이 마주 얽혔다. 민규가 입을 열었다. 대답은, 원하는 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