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몇 시지. 순영은 밤새 울어서 팅팅 부은 눈에 힘을 줬지만, 잘 떠지지 않았다. 팔라스 지금 몇시야. 순영이 물어보자 인공지능 팔라스가 띠링하며 소리를 냈다.
- 지금은 오후 1시 36분입니다.
벌써 오후인 시간에 순영은 몸을 일으켜 세우려다가 다시 풀썩 엎어졌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며칠 전 5년간 사귄 애인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순영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직 사랑하는데. 그를 붙잡으려고 한 순영은 그가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그를 오기로 잡을 수 없었다. 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둘은 헤어짐을 맞았다.
헤어졌어도 순영은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지라 매일 밤 울었다. 주말이 되자 증세는 더 심해졌다. 술이 약한데 술을 몇 병을 마셨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술을 마시고 토하고 울다가 쓰러졌다. 종일 생산적인 일을 하나도 못하고 그저 시간만 축냈다. 내일이면 다시 회사에 출근해야 했다. 회사에 가면 그 녀석의 얼굴을 봐야 했다.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그 녀석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로 도망가지? 갈 수 있는 곳이 있나?
순영은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봤다. 저 멀리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이 보였다. 도망친다면, 금방 찾을 수 있는 다른 도시가 아닌 우주로 가게 되면 못 찾겠지. 진짜 우주여행을 갈까? 순영은 우주여행 상품을 찾아봤다. 하루 이틀이면 다녀오는 달 특급여행을 보다가 할인판매하는 상품을 눌러보았다.
[초호화 특급 우주여행]
- 6개월간 대형 우주 유람선 닉스와 함께 떠나는 우주여행.
- 중요 스폿마다 AI 닉스의 설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티켓 값에는 숙소와 3끼 식사, 유람선 내 시설 이용이 포함 되어있습니다.
※ 불포함 사항: 선내 시설에서 판매하는 물품은 값을 추가로 지불해주셔야 합니다.
순영은 화면을 응시하다가 출발 일자를 확인했다. 대략 1달 후에 출발하는 일정을 특별할인 중이었다. 6개월치고 싼 금액에 순영이 화면에 바싹 다가갔다. 6개월이면 회사를 그만두고 가야 했다. 여행하기 위해서 퇴사...? 순영은 조금 더 고민해보기로 하면서 화면을 종료했다. 고민이 무색하게 다음날 회사에서 돌아오자마자 순영은 무이자 할부로 여행 상품을 구매했다. 거지 같은 회사를 탈출하기로 마음 먹었다.
-
시간이 빨리 흘러 1달 후 순영의 마지막 근무일이었다. 순영은 제 서랍과 책상에 있던 짐을 가져가기 위해서 상자에 넣었다. 순영씨 퇴사하다니 너무 아쉽네. 친하게 지내던 직원들이 짐을 싸고 있는 순영에게 다가와 인사를 하는 동안 순영의 전 애인은 겉치레인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끝까지 더럽구나 너는. 순영은 제가 5년간 저렇게 찌질한 사람을 좋아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가기 전까지 자신을 투명인간 그에게 잘 살라며 한마디 건네주고 나왔다. 인사하는 순간 어정쩡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순영은 차에 제 짐을 싣고 펑펑 울었다. 차가 주차장에 도착했다고 신호가 제 아무리 울려도 한동안 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했다.
퇴사 후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우주여행이 내일이었다. 순영은 창고에 있는 큰 캐리어를 끌고 왔다. 번호 다이얼을 돌리고 순영의 지문을 인식하자 캐리어가 열렸다. 여행을 갔던 친구의 조언을 듣고 필요한 물품들을 캐리어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옷이 대부분인 캐리어를 모두 싸고 순영은 침대에 풀썩 누웠다. 조금은 설레는 기분에 잠을 설쳤다.
무인 택시를 타고 우주 발사 게이트에 도착했다. 순영은 택시에서 캐리어를 내리고는 게이트에 들어가기 전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은 우주여행을 하는 6개월 간 볼 수 없겠지. 순영은 지구와 제 전 애인에게 작별을 고하며 게이트로 들어섰다.
- LightSpace 우주항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생각보다 캐리어 내부 짐을 꼼꼼히 확인하는 탑승수속을 끝내고 순영은 드디어 우주비행선에 탑승할 수 있었다. 커다란 내부에 순영이 감탄했다. 몇 번 방이었지? 순영은 티켓을 보며 방 호수를 확인했다. 105호. 105... 백호... 오, 백호! 순영은 제 방 번호를 외우는 방법을 터득하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순영은 자신이 예매한 방 번호를 되뇌며 한참 걷자 예매한 방 근처에 도착했다. 복도에는 제 방을 찾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순영이 105호 앞에 서서 카드키를 대려는 순간 제 머리보다 한참 위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105호예요?"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순영이 고개를 젖혔다. 키가 꽤 큰 남자가 옆에 서 있었다.
"어, 네... 그쪽도 105호...?"
"네네, 만나서 반가워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사내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순영은 캐리어를 잡고 있던 손을 뻗어 사내의 손을 마주 잡았다. 두어번 흔들린 손이 놓이자 순영이 객실 문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키 큰 사내가 먼저 내부로 들어갔다. 뒤따라서 들어간 객실은 화장실 1개와 커다란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개인적인 공간은 없구나... 순영은 돈을 더 주고서라도 1인실을 끊을 걸 그랬나 후회했다. 양쪽 방 끝에는 침대와 개인 옷장, 책상이 있었으며 바깥이 보이는 적당한 크기의 창문 앞에 자리 잡은 3인용 소파와 그 옆에 2인 식탁이 있는 공간도 있는 나름 원룸치고는 알찬 구성이었다. 나름 퍼스널 스페이스를 만들어주려는 듯 침대 사이 가운데 공간이 꽤나 넓었다.
방에 들어와 서로 본격적으로 통성명을 하기 시작했다. 순영과 함께 방을 쓰게 된 남자의 이름은 김민규로 순영보다 8살이나 어린 대학생이었다. 나름 어른을 존중할 줄 아는지 민규는 순영에게 먼저 쓰고 싶은 침대를 고르라고 했다. 사실 큰 차이는 없었지만, 순영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오른쪽에 있는 침대를 골랐다. 그러자 민규는 왼쪽 침대에 제 짐을 올려두었다.
복도 바깥에서는 각자 방을 찾는 소리로 분주했다. 둘이 어느 정도 대화를 나누자 둘 사이에 홀로그램 안내 도우미가 나타났다. 안내 도우미는 이륙 전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우주에 진입하기 전까지 짐은 풀지 않은 상태로 현관문 옆 진공 보관함에 넣어두라는 말에 민규와 순영은 짐을 보관함에 넣었다. 그 후 안내 도우미는 침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대 더블 침대로 변경이 가능한 침대는 총 3가지 모드가 존재했다. 이착륙, 또는 비상시 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캡슐 모드, 싱글 모드, 더블 모드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운데 공간이 넓은 이유가 있었네. 순영은 싱글 모드인 침대 위에 걸터앉으며 생각했다. 앞으로 10분 후 승객 확인이 모두 끝나면 이륙할 예정이라는 말과 함께 안내 도우미는 사라졌다. 조용한 적막감과 함께 순영과 민규의 시선이 맞부딪혔다.
"형, 혹시 제가 지킬 사항은 있나요?"
"어?"
"같이 앞으로 6개월을 한 방 쓸 건데, 서로 지켜주면 좋겠다는 거 없어요?"
민규의 말에 순영이 고민했다. 크게 없는 것 같은데. 순영의 말에 민규도 잠시 고민하다 본인도 없다고 했다. 둘은 서로 지켜줄 만한 것이 생각나면 말하기로 결정지었다.
"형은 왜 우주여행을 온 거예요?"
민규의 말에 순영이 침묵했다. 애인과 헤어져서 마음 정리하기 위해 왔다고 말하기엔 묘하게 쪽팔린지라 순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전부터 오고 싶어서 이직하기 전 시간이 남아 우주여행에 왔다는 식으로 둘러대었다.
"이게 진짜 어른이구나... 멋있다."
민규의 말에 순영의 가볍게 헛웃음을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거짓말로 칭찬을 받는 것이 뭔가 부끄러웠다.
"너도 나중에 뭐...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어른이 되어있을 거야."
순영의 말에 민규가 고맙다고 덧붙였다. 민규가 다른 무언가를 말하려는 순간 다시 안내 도우미가 나타나 이륙을 알렸다. 캡슐 모드로 전환해주세요. 민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침대에 누웠다. 순영도 그런 민규를 보다 따라서 침대에 누웠다.
분명 아까 잘 설명해줬을 땐 알 것 같았는데, 막상 직접 해보려니까 순영은 침대 옆 패널을 찾지 못해 한참 헤매었다. 민규는 이미 캡슐 형태로 만들어서 누워있었지만 어려워 보이는 순영의 모습을 보고 그냥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민규는 침대를 원래대로 돌려서 순영에게 다가갔다.
"형, 제가 도와줄게요."
집중하면서 찾는 사이 불쑥 다가와 말하는 민규에 순영은 살짝 놀랐지만 빠르게 고마움을 표했다. 민규는 앞으로 함께할 사이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면서 벽 패널의 위치를 알려주고는 순영에게 다시 사용법을 설명해주었다. 다시 한번 들으니까 알 것 같은 느낌에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해보라고 하자 다시 벙쪄있는 순영에게 민규는 화를 내지 않고 말로 옆에서 보조해주며 순영이 직접 해보도록 유도했다. 순영이 민규가 가르쳐준 대로 꾹꾹 누르자 침대가 움직이며 캡슐 형태로 바뀌었다.
형, 허리 쪽에 있는 안전벨트도 매야 해요. 민규가 캡슐 벽 너머로 순영에게 설명했다. 순영은 민규의 손짓을 보고 안전벨트를 찾아 맸다. 순영이 제대로 착용한 것을 보자 민규도 제 침대에 다시 누워 빠르게 조작했다. 조작이 끝난 뒤 민규는 순영을 살피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투명한 벽 너머로 조금은 긴장되어 보이는 순영이 보였다. 괜찮으려나. 민규는 걱정되는 표정을 지었다. 순영이 고개를 돌려 민규를 마주 보았다.
"도와줘서 고마워."
순영의 말에 민규가 미소를 지었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륙 안내가 들리고 캡슐에 몸을 맡기자 몸에 큰 부하 없이 이륙하기 시작했다. 캡슐 안 모니터에서 실시간으로 이륙함에 따라 바뀌는 외부 풍경을 보여주었다. 초반에는 비행선과 다를 바 없었지만, 대기권을 뚫고 우주 궤도에 진입하는 모습에 순영은 새삼 자신이 정말 우주로 나왔음을 깨달았다. 새까만 풍경을 달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림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제 자유롭게 내부를 돌아다녀도 된다는 안내 음성이 나왔다. 안내 음성이 끝나자 민규는 침대에서 일어나 보관함에서 자연스럽게 제 짐과 순영의 짐을 가지고 왔다. 그 동안 순영은 여전히 캡슐 형태의 침대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형 뭐해요?"
"어? 어, 혹시 이거 어떻게 여는지 알아?"
"아니까 나왔죠?"
민규는 캡슐 창 너머로 열심히 순영에게 설명해주었다. 아, 반대로 하면 되는구나 고마워. 순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속으로는 엄청 쪽팔렸다. 그걸 아는 건지 민규는 처음엔 다 어렵다는 위로의 말과 함께 순영에게 캐리어를 건넸다. 그런가... 순영은 캐리어를 받아 들고는 민규는 왠지 처음에도 잘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둘 다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순영은 긍정적으로 생각을 바꾼 뒤 옷장에 옷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잠깐 봤지만 나쁘지 않은 룸메이트 같았다. 옷을 다 정리하고 순영이 몸을 일으키며 민규에게 다시금 인사를 건넸다.
"6개월 동안 잘 부탁해."
"저도 잘 부탁해요. 형."
민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규의 배에서 엄청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얼굴이 새빨개진 민규는 제 배를 부여잡고는 순영의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라서 겨우겨우 고개를 숙이고 웃음을 참았다. 형... 솔직히 말해요. 지금 웃고 있죠. 민규의 시무룩한 말투에 결국 웃음이 완전 터져버린 순영은 웃다가 비틀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 형! 끙끙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민규를 한 번 올려다보다가 순영은 다시 웃음이 터졌다. 어느 정도 진정된 순영의 앞에 민규가 쭈그려 앉았다.
"형, 점심 같이 먹을래요? 우리 둘 다 혼자 온 거 같이 다녀요."
"그게 뭐가 어렵다고. 가자."
순영이 영차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민규가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객실을 나와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우주선 내부를 구경하느라 순영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천천히 걸었다. 그에 비해 민규는 배가 엄청 고픈 건지, 아니면 전에 우주선을 타본 건지 선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한참 걷다 보니 제 옆에 있던 순영이 안 보여서 뒤를 돌아보았다. 우주선 내부에 푹 빠진 건지 천천히 걸어오는 순영을 재촉하고 싶었지만, 처음 우주선에 탔을 때 뭐든 신기했던 제 어릴 적을 생각하며 걸음을 조절하며 순영과 함께 나란히 걸었다. 조금 늦게 밥을 먹는다고 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와... 와...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선내를 구경하는 순영이 그저 민규의 눈에 귀엽게 비춰졌다.
걷다보니 식당이 코앞이었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순영의 어깨를 치며 민규가 식당을 가리켰다. 얼른 가요. 민규의 말에 순영이 정신을 차리고는 민규를 따라 식당 내부로 들어갔다. 커다란 식당에는 여러 테이블이 있었는데 2인에서 많게는 6인까지 앉는 테이블이 있었다. 민규는 적당한 2인석에 앉았다.
"형, 여기 버튼을 누르면 이렇게 홀로그램이 뜨거든요? 이게 메뉴들이고 원하는 거는 이렇게 담고 방 카드키를 대면 주문돼요."
순영이 민규에게 먼저 고르라고 하자 민규는 고민하더니 음식을 총 세 가지를 주문 후 카드를 태그했다. 띠딕하는 소리와 함께 메뉴가 결정되었다. 순영도 민규가 하는 것을 유심히 보더니 메뉴를 한 가지 주문했다. 저거 다 먹을 수 있을까 순영이 속으로 걱정했지만, 그 걱정이 무색하게 음식이 나오자 민규는 깔끔하게 세 그릇을 비웠다. 배를 문지르며 만족스러운 감탄사를 내뱉는 민규가 신기하면서도 웃겼다.
"형, 곧 포인트에 도착한대요!"
방 카드키 뒤편에 스폿이 접근한다는 식으로 반짝거렸다. 민규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벌떡 일어나 순영의 손을 잡았다. 순영은 잠시 민규의 표정을 눈에 담았다. 카드키의 뒤편처럼 웃는 민규의 모습이 반짝거렸다. 응, 가자. 순영이 몸을 일으키자 민규가 발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이런 우주선에서 바깥 포인트를 관찰하는 방법이 몇 가지 있어요. 하나는 우주선 최상층 통유리 전망대에서, 둘은 우주선 중간부에 있는 통창 포인트에서, 마지막은 객실에서 보는 방법이에요. 제가 가장 추천하는 건 첫 번째 전망대에서 관찰하는 거예요. 진짜 멋있거든요. 어디로 갈래요?"
"그럼 전망대로 갈까?"
"좋아요!"
너무 첫 번째를 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이는 민규에 순영은 그의 추천을 따르기로 했다. 제 결정을 따라서 좋은 건지 민규에게서 들뜬 감정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좋네. 순영은 행복해 보이는 민규를 바라봤다. 행복은 전염된다. 민규의 행복감에 슬픔에 절여져 있던 순영도 전염되기 시작했다. 순영은 민규와 잡은 손을 꼭 잡은 채 전망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넓은 공간의 통유리로 된 공간은 모든 우주를 담고 있었다. 제 객실의 작은 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새까만 하늘 사이에서 행성 하나가 보였다. 닉스는 해당 행성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설명은 행성의 이름부터 대략적인 정보였지만, 그렇게 순영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행성의 거대함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순영의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 커다란 우주에서 자신과 헤어진 애인은 정말 작은 존재 같았다. 헤어짐에 너무 목매고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순영은 다음 스폿이 기대되었다.
"민규야, 좋다."
순영의 말에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던 민규가 순영을 바라보았다. 순영이 자신을 보더니 눈을 접으며 웃었다. 민규는 그런 순영을 보며 같이 미소를 지어줬다.
다행이다. 민규는 순영의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객실 문 앞에서 제 룸메이트로 순영을 만났을 때, 순영의 표정은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나름 무표정한 얼굴을 짓거나 대외용 미소를 짓곤 했지만 그럼에도 사람의 기분을 잘 파악하는 민규는 그가 조금 힘들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계속 기분이 안 좋으면 그 기분이 제게도 전염되니까. 민규는 제 여행을 기분 좋지 않은 사람과 함께해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순영은 제 행동에 불쑥불쑥 웃음을 터트리면서 점점 완화되는 게 눈에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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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규와 지내는 생활은 생각보다 잘 맞았다. 처음에는 순탄할 줄 알았더니 묘하게 안 맞는 부분이 있지만, 둘 다 쿨하게 서로를 위해서 맞춰줄 줄 아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민규는 비행선에 오른 첫날부터 운동을 하러 선내에 있는 헬스장에 갔었다. 헬스장에서 다녀온 민규에게 순영은 운동이 재밌냐고 물었다. 민규는 그리 재밌지 않지만, 하다 보면 잡생각도 사라지고 건강해진다고 말했다.
순영도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제 애인을 지우고자 민규와 함께 헬스장으로 향했다. 민규와 헬스장을 다니게 되면서 애인 생각은 조금 줄어들었다. 헬스장에 가면 민규는 종종 순영에게 운동을 자주 알려주곤 했다. 운동을 하도 잘해서 순영이 체대생이냐고 묻자 민규는 웃으며 우주항공학과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우주에 왔구나. 민규는 벌써 우주여행이 6번째라고 했다. 대부분은 짧게 다녀오는 여행이어서 아쉬움이 컸기에 길게 우주여행을 해보고 싶어서 학교를 휴학하고 이 여행길에 올랐다고 민규는 말했다. 순영은 민규가 우주비행선 내부의 환경에 익숙해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했다.
우주여행은 길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바깥에 나가지 못하고 같은 선내만 돌아다니는 생활은 어떻게 보면 지루하고 나른하기도 했다. 가까운 거리에서 우주의 산물을 구경하는 것은 하루에 고작 1~2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의 시간은 다음 장소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우주여행을 하며 정신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너무나도 여유로웠다.
그 여유로운 시간에서 순영은 민규와 함께 운동이나 주에 한 번 선내에서 하는 이벤트를 참여하곤 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남았다. 그래서 순영은 한동안 못 본 드라마와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주로 좋아하는 장르가 로맨스 코미디였기에 그걸 보다 보면, 자연스레 전 애인이 생각나곤 했다. 주인공들은 싸우고 잘만 다시 행복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왜 자신은 아닌 건지. 주인공에 이입해서 재밌게 보다가 흥미가 뚝 떨어져서 관둔 영상도 한무더기였다.
그러다보니 볼 만한 영상이 남지 않았다. 영상을 보는 것도 지쳤다. 그렇게 생긴 여유는 다시금 여러 가지 생각을 몰고 왔다. 앞으로의 삶과 직장을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져나간 생각은 전 애인으로 귀결되었다. 이 정도면 악몽 같았다. 확실히 5년이란 세월은 그리 쉽게 한 두 달의 시간으로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우주여행을 하면서 문득 전 애인과 함께 여기 왔으면 무엇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음식을 먹을 때 이거 전 애인이 좋아했지라는 생각이 아무렇지 않게 떠올랐다. 과거를 되짚어보는 시간도 길었다. 언제 뭐 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순영은 과거의 제 행동 중 하나를 다르게 했다면, 그러면 헤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감이 밀려왔다. 그럴 때마다 순영은 객실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바깥을 바라봤다. 새까만 우주를 보다 보면 소란이 일었던 마음이 가라앉았다.
민규는 제 룸메이트인 순영이 묘하게 걱정되었다. 평소에 순영은 밝고 투명한 사람이었다. 너무나도 투명해서 민규는 순영의 감정들이 눈에 보였다. 새로운 우주 광경을 볼 때마다 눈에 비치는 황홀함이, 재밌는 얘기를 나눌 때의 행복함이, 이동할 때의 지루함이, 운동할 때 힘듦이 모두 보이는 것이 순영이었다. 그래서 종종 순영을 덮쳐오는 우울함과 슬픔도 민규의 눈에 보였다. 왜 슬픈 걸까. 직장을 관두어서 슬픈 걸까, 오히려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까. 민규는 순영의 그 알 수 없는 우울과 슬픔이 어디서 오는지 궁금했다. 언뜻 떠보았지만, 순영은 절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민규는 그저 순영을 데리고 이리저리 선내를 쏘다녔다. 제가 조금이라도 순영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중에 자주 하는 것이 제 전공지식을 동원해서 순영에게 이것저것 설명해주거나 아니면 자신이 잘하는 운동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오늘은 구경할 장소가 그리 멀지 않아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를 구경했다. 민규와 순영은 약속이라도 한 듯 카드키가 깜빡이면 가장 높은 전망대로 향했다. 커다란 행성을 구경했다. 지구보다 크대요. 민규의 말에 순영은 행성을 바라보았다. 저기도 사람이 살까. 순영의 말에 민규도 행성을 바라봤다. 생명체가 살 수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푸르른 행성 앞에서 한참을 바라보다 우주선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항상 새까만 하늘인 우주는 우리가 떠나온 곳의 시간을 따라 움직였다. 생체리듬을 잃으면 몸에 큰 무리가 가는지라 사람들은 그 시간을 따르곤 했다. 벌써 7시가 다된 시간에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민규와 순영은 저녁을 먹은 후 잠시 쉬었다가 오늘 미처 하지 못한 운동을 했다. 운동이 끝나고 땀에 젖은 채 객실로 들어온 둘은 가위바위보로 먼저 씻을 사람을 정했다. 순영이 보자기를, 민규가 주먹을 내밀었다. 순영은 펼친 손 그대로 흔들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땀에 절어서 어디 앉지도 못하고 민규는 서서 에어컨 바람만 쐬고 있었다.
"아, 김민규 에어컨 틀었지."
몸에 물기가 있는 상태로 나온 순영이 춥다는 듯 민규를 째려봤다. 더운 걸 어떡해요. 민규가 시무룩 해하자 순영이 에어컨을 끄며 찬물로 씻고 나오라고 했다. 민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제 옷을 챙겨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민규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정말 마시고 싶은지 침을 꿀꺽 삼키는 민규에 순영은 민규가 지금까지 많이 도와줬으니 보답하는 마음으로 술을 사주겠다며 일어섰다. 헐, 진짜요? 민규는 순영의 말에 신이 난 듯 따라붙었다. 형 진짜 고마워요. 바에 가는 내내 민규는 신이 났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바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없었다. 음식과 달리 바에서 주문하는 안주와 술은 직접 돈을 내고 사야 했는데, 확실히 우주비행선을 타서 그런지 몸값이 높아져서 집 근처에서 파는 금액보다 훨씬 비쌌다. 민규는 메뉴판을 보더니 순영의 눈치를 살폈다.
"형, 가격이 좀 비싼데..."
"야, 내가 이 정도 술도 못 사주진 않아. 맘대로 시켜. 마시고 싶다며."
민규는 고민하다가 500 cc 맥주 2잔을 시켰다. 안주까지 시키고는 둘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비행선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다가 어느새 서로의 취향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민규는 맥주를 마시는 속도도 빨랐다. 순영이 반도 못 마셨을 때, 벌써 다 비운 민규의 맥주잔을 보며 하나 더 시켜주었다. 밥만 잘 먹는 줄 알았더니 술도 잘 먹네.
잔을 기울이며 나누는 이야기는 점점 무르익기 시작했다. 어느새 연애 이야기까지 도달해버렸다. 살짝 취기가 돈 순영은 말하지 않으려던 애인과의 이별을 말하고는 울컥해서 욕을 하며 소주를 시켰다. 소주까지 들어가니 순영은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처음에는 애인의 욕을 하다가 끝에서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제야 민규는 깨달았다. 권순영이 종종 슬퍼 보이는 것은 전 애인 때문이라는 것을. 순영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직도 헤어진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후회였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 애인은 다른 사람이 좋다고 떠나갔는데, 왜 제 앞에 있는 권순영은 그 사람을 잊지도 못하고 있는지. 심장이 아팠다. 민규는 그저 그 사람 때문에 순영이 울지 않았으면 했다.
"형, 울지 마요."
민규는 펑펑 눈물을 쏟는 순영을 보다가 의자를 끌고 옆으로 자리를 옮겨서 순영을 끌어안아 주었다. 순영은 그런 민규에게 순순히 제 몸을 기대었다. 새삼 끌어안으니 순영은 훨씬 덩치가 작았다. 술을 사주는 멋진 어른이라고 아픔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순영이 서럽게 울었다. 민규는 제가 만약 순영의 애인이었다면 이렇게 서럽게 울지 않게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굴도 모르는 상대가 싫었다. 활짝 웃는 순영의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데.
민규는 순영을 위로해주기 위해서 더 꾸욱 안았다. 제가 형의 애인이었다면, 애인이었다면? 왜 자꾸 애인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민규는 제 품에 안긴 순영을 보았다. 한 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모든 게 다 의식되기 시작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순영의 체온이 뜨거웠다. 순영이 눈물을 닦으려는지 몸에 얼굴이 맞닿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순영을 보며 순간 민규의 등줄기에서 소름이 쭉 끼쳤다.
"이제 괜찮아 민규야. 고마워."
순영이 진정된 듯 코를 훌쩍이며 민규를 손으로 살짝 밀었다. 이상한 기분에 민규도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새빨개지고 퉁퉁 부은 눈의 순영이 나타났다.
"아이씨... 안 그래도 눈 작은데, 눈 부어서 떠지질 않네."
뜬지 감은지 알 수 없는 눈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귀여웠다. 퉁퉁 불은 만두 같은 얼굴이 귀여웠다. 이 사람 8살이나 나보다 많은 거 맞지? 말랑한 볼살을 꼬집고 싶어졌다. 볼살을 따라 시선이 입술에 머물렀다. 입술이 저렇게 통통했나. 삐쭉 내민 입술이 붉었다. 입술도 따끈할까. 무슨 생각하는 거야 김민규! 형이잖아! 룸메잖아! 민규는 제 머리를 뜯었다. 뭐해? 순영의 말에 민규는 멈추고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진짜? 머리를 막 쥐어뜯던데. 뭐, 아니면 말고."
순영은 훌쩍이다가 코가 간지러웠는지 팔로 문지르고는 빈 잔을 민규에게 내밀었다.
"민규야 술 좀 따라주라."
새빨개진 얼굴과 울어서 그런지 많이 마셔서 그런지 모를 풀린 눈에 민규가 술을 따라주려다가 멈췄다.
"너무 많이 마신 거 아니에요? 물 마실래요?"
"아니이... 물 말고 술! 알코올!"
커진 순영의 데시벨에 민규는 고개를 저으며 순영의 잔에 술을 따랐다. 소주다 소주. 순영이 작은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한바탕 민규에게 제 마음을 쏟아놓고 나니 기분이 좀 풀렸다.
"고마워. 얘기 들어줘서."
순영은 고개를 푸욱 숙이며 민규에게 인사했다. 민규는 그런 순영에게 술 사줬으니까 당연하다며 웃어넘겼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되는지 순영이 울컥 다시 울음이 차올랐다.
"진짜 내가 너무 고마워서... 사실, 나 힘들어할 때 옆에서 챙겨줬잖아. 선내도 구경시켜주고 막... 일부러 선내에서 하는 이벤트도 데려가 주고 방 안에서 내가 우울해하고 있으면 슬쩍 와서 말도 걸어주고 기분 환기 시키려고 해주고. 네가 옆에서 도와주는 거 다 알고 있었어. 그때마다 너무너무 고마웠어."
순영이 다시 얼굴을 찌푸리더니 제 가슴을 치면서 울기 시작했다. 민규는 당황해서 가슴을 치는 순영의 손을 잡았다.
"아파요 형."
얼마 안 있다가 훌쩍이던 순영은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정말 오늘 너무 좋다며 박수치기 시작했다. 민규는 오락가락하는 순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주사가 막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건가. 갑자기 순영은 헤실헤실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하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되는 레퍼토리에 민규는 정말 제게 많이 고마워했다는 사실을 듣고 감동했다.
"형, 진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 더 열심히 챙겨줘야겠다고 민규가 다짐했다. 순영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포옹하자고 손을 뻗었다. 민규는 순영의 말에 감명받고 같이 일어났다. 순영이 민규를 안고 등을 세게 치면서 다시 고맙다고 인사하기 시작했다. 저도 고마워요. 민규가 대답하자 이번엔 다시 앉아서 순영이 고맙다며 인사하기 시작했다.
아, 설마 주사가 반복인가? 민규가 순영을 보자 서로 눈이 마주쳤다. 순영은 다시 민규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기 시작했다. 반복 맞네. 빨리 가서 재우자. 민규는 순영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제 앞에 남은 안주와 술을 먹기 시작했다. 비싼 음식을 남기는 것은 안 좋으니까. 민규가 먹기 시작하자 순영이 민규의 손목을 확 붙잡았다.
"음식 먹지 말구... 나 보면서 얘기 들어줘. 진짜 민규야 너랑 같은 룸메이트해서 너무 고맙구..."
제 손목을 잡은 채로 순영이 베싯베싯 웃으며 같은 레퍼토리로 아양을 떨기 시작했다. 으응, 민규야아. 순영이 의자를 끌어오더니 민규 옆에 밀착했다. 이 형은 왜 이러는 거야. 민규가 큰 반응이 없자 순영이 민규를 쿡쿡 찔렀다. 애교 어린 목소리로 달라붙는 순영에 민규는 몸이 굳었다. 귀엽네 진짜. 제게 달라붙는 순영이 귀여웠다. 민규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순영의 양 볼을 아프지 않게 꼬집고 흔들었다. 순영이 방긋 웃으며 말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 씨... 생각해보니까 그 새끼도 나한테 귀엽다고 했는데."
갑자기? 다시 또 전 애인 얘기로 돌아온다고? 진짜 이 사람이랑 술은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민규는 피 같은 술만 들고 남은 걸 다 들이키고는 안주를 입에 욱여넣었다. 입안에 음식을 가득 넣고 일어나 가자고 민규가 말했지만, 입안에 음식 때문인지 순영이 알아듣지 못하고 민규를 보았다.
"화장실?"
엉뚱한 말을 하는 순영에 민규는 고개를 젓고 입 안의 음식을 삼킨 뒤 다시 말했다.
"가요, 형. 다 먹었어요."
"그래...? 더 있고 싶은데. 알겠어."
순영이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크게 휘청였다. 넘어지기 전에 민규가 순영을 다급하게 안았다.
"어우... 확 오네."
"형 괜찮아요? 너무 많이 마시긴 했어요."
그치, 순영은 민규의 품에 안긴 채 저희가 먹은 테이블을 바라봤다. 술병이 많았다. 순영은 병을 보다가 민규를 바라봤다.
"너는 왜 안 취해?"
"네?"
"너는 왜 안 취하냐구우..."
갑자기 차이 나는 주량에 순영이 민규의 몸을 손바닥으로 찰싹하며 때렸다. 순영의 손이 엄청 매웠다. 맞은 곳이 화끈거려서 민규가 신음하며 제 팔을 문질렀다. 순영은 그 모습을 보고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같이 문질러주었다. 병 주고 약 주고 난리였다.
"형 걸을 수 있겠어요?"
민규의 말에 순영이 고개를 저었다. 나 못 걷겠는데. 민규는 순영의 말에 의자를 끌어서 순영이 잡게 했다. 업고 갈 테니까 넘어지지 않게 꽉 잡아요. 민규의 말에 순영이 의자를 꾹 쥐었다. 민규는 손을 확인 한 뒤 순영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순영은 민규의 등에 제 몸을 뉘었다. 그러자 민규가 읏차하는 소리와 함께 일어났다. 흔들리는 몸에 속이 갑자기 확 울렁였다. 순영은 민규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토할 것 같으니 천천히 가달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민규는 피가 싹 식는 기분이 들었다. 형, 형 토하면 안 돼요. 저 천천히 갈게요. 민규의 말에 순영이 알겠다고 빨리 출발이나 하라고 했다. 이랬다저랬다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취한 게 자기가 아니라 순영이라서 다행이라고 민규는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취했으면, 어떻게든 스스로 방까지 기어가거나 바에 버려졌을 터였다.
"고마워 민규야. 너한테 신세를 많이 지네."
상관없다며 민규가 발걸음을 옮겼다. 새삼 업히니 민규가 크긴 크다고 느꼈다. 제가 평소에 보던 시야보다 더 높은 시야에 순영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가까이 있으니 민규가 뿌리는 향수의 향이 느껴졌다. 체향과 절묘하게 섞인 향이 좋았다. 순영은 향이 더 잘 느껴지는 목에 얼굴을 묻었다. 민규의 목에 순영의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민규는 그 감촉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오! 향 좋다 민규야."
"그래요?"
"응, 너랑 잘 어울려. 시원하면서도 포근해."
객실까지 반쯤 걸으니 민규가 더운지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순영은 왠지 미안해져서 제 손으로 민규의 땀을 쓸어줬다. 샤워 또 해야겠네. 아직 반이나 남은 거리에 순영은 고민하다가 내린다고 했지만, 민규는 그냥 가자고 하며 순영을 업은 채 걸었다. 늦은 시간이라 대부분의 사람이 잠들어서 그런지 복도는 조용했다. 고요한 복도에 민규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제 어떤 말을 할까 싶던 와중 민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이제 저에게 털어놨으니까 그 사람 때문에 울지 마요."
"어?'
"형이 그 사람 때문에 우는 거 보기 싫어요.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서 주제 넘었다면 죄송해요."
순영은 파묻고 있던 고개를 살짝 들어 민규의 옆모습을 살짝 봤다. 묘하게 경직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더는 그 녀석 때문에 울고 싶지 않았다. 고마운 것만 가득하네. 순영은 민규가 제 룸메이트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루한 우주여행에서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사람. 제가 힘들 때 옆에서 털어낼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애인이 되지 않을까.
"민규야 넌, 인기 많겠다. 좋은 애인이 될 거야."
순영은 제가 생각한 대로의 감상을 털어놨다. 민규는 부끄러운지 그런 말 하지 말라며 투덜거렸다. 투덜거리는 민규는 너무나도 대학생 그 자체여서 순영이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네. 순영의 말에 민규는 심장이 쿵 바닥을 찍었다. 귀엽다는 말이 이렇게나 파괴력이 큰 걸까.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제야 민규는 제가 하는 것이 질투임을, 사랑임을 깨달았다. 깨닫고 나니 순영과 맞닿은 제 등이 신경 쓰였고 제 목에 걸쳐진 얼굴과 팔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저 멀리 객실의 문이 보였다. 민규는 걸음을 늦췄다. 잠시라도 맞닿아 있는 순간이 길었으면 했다.
실수한 걸까. 오히려 주제 넘은 건 자신이었나. 느려진 발 걸음에 순영은 민규의 눈치를 살폈다. 저 멀리 객실이 보였다. 벌써 다 왔다. 민규야 고마워. 순영은 민규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을 내려달라 했다. 민규는 약간 멈칫하더니 문 앞에서 내려준다고 했다. 순영은 차마 내리지 못한 채 민규에게 업혀있었다.
'105'라고 적힌 숫자 앞의 문에 다다랐다. 민규는 다리를 수그려 순영이 내리기 편하게 만들었다. 고마워. 순영이 한 번 더 인사했다. 민규는 괜찮다고 웃어 보였지만 순영은 평소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많이 힘든가? 술 먹은 상태에서 이 정도 거리를 걸어오면 힘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민규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야, 괜찮아? 내가 너무 많이 무거웠지?"
순영은 아직 몸을 일으키지 않은 민규에게 다가가 땀을 소매로 훔쳐주었다. 제 이마에 닿는 순영의 손길에 민규는 일어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됐다. 순영이 말하자 민규가 일어나더니 카드를 꺼내 방문을 열었다.
"고마워요 형. 저 먼저 씻어도 되죠?"
"어, 먼저 씻어."
민규는 고맙다며 신발만 벗고 바로 욕실로 들어갔다. 그렇게 더웠나. 순영도 제 신발을 벗고 들어가 잠옷으로 옷을 먼저 갈아입고는 제 침대를 2인용으로 바꾸었다. 제 침대에 앉아있다가 순영은 절 도와준 민규의 침대도 2인용으로 바꾸어주었다. 가운데 널찍한 공간이 줄었다. 민규의 침구에서는 민규의 향이 났다. 순영은 제 침대에 앉으려다가 옷도 갈아입었겠다. 민규의 침대에 앉았다. 늦은 시간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양치만 하면 됐는데, 먼저 한다고 할 걸. 순영은 화장실 안에서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혀를 찼다. 그렇다고 씻고 있는데 들어갈 수도 없고. 순영은 민규의 침대를 바라봤다. 민규의 침대에서 자면 깨워주겠지. 에이 몰라. 순영은 그냥 드러누웠다. 울어서 그런지 눈도 무거웠다. 샤워 물소리가 꼭 ASMR 같았다. 눈을 천천히 끔뻑거리다 순영은 눈을 감았다.
민규는 새빨개진 얼굴로 샤워했다. 왜, 왜 이마에 땀을 닦아주는 건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순영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으니 이것저것이 다 생각났다. 범람하는 순영의 모습들을 민규는 애써 떨쳐내려고 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가려는 순간 제가 빨리 들어오느라 옷을 가져오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민규는 욕실 문을 열고 빼꼼 바깥을 내다봤다. 불이 다 꺼진 방 안이라 잘 보이지 않았다.
"형... 혹시 옷장에서 제 옷 좀..."
민규는 아무 말이 없는 것에 슬쩍 문을 다 열었다. 욕실의 빛이 퍼지며 제 침대에 누워있는 순영을 보았다. 왜 제 침대에 누워있는지 의문이었지만 민규는 다시 순영의 이름을 불렀다. 몇 번을 불러도 대답 없는 순영에 민규는 순영이 그제야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규는 욕실 바깥으로 나와 스스로 옷을 챙겨입었다. 제 움직임에도 순영은 꽤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움직이질 않았다.
드라이기 못 쓰겠네. 민규는 수건으로 제 머리카락을 문질러서 물기를 털은 뒤 순영에게 다가갔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차마 불은 다 킬 수 없어 문 열어둔 욕실 불에 의지해서 민규는 순영의 얼굴을 바라봤다. 이렇게 세세하게 순영의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감은 두 눈, 동그라면서 오똑한 코, 피어싱한 두 귀, 그리고... 시선이 입술에 머물렀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우물거리는 입술이 귀여웠다.
민규는 가만히 입술을 보다가 손을 뻗어서 톡 건드렸다. 우응... 순영이 인상을 쓰고 끙끙거리다 곧 다시 새근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었다. 닿아도 잠에서 깨지 않는 순영에 민규는 몰래 선을 넘기로 했다.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순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뱉었다. 민규는 순영을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순영의 얼굴을 바라보다 그냥 순영의 침대에 누웠다. 이불에서 은은하게 순영의 향이 느껴졌다. 사람이 체향이 각각 있긴 있나 보다. 민규는 눈을 감았다.
민규가 잠들자 순영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민규가 침대로 다가오는 발걸음에 살짝 깼는데 제 앞에 자리를 잡고 자신을 바라보는 민규에 분위기가 이상해서 순영은 제 작은 눈을 이용해 실눈을 뜨고 민규를 보았다.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민규가 언제 즈음 자신을 깨울까 싶었다. 깨우면 자다 깬 척하자. 순영은 속으로 다짐했다. 하지만 민규는 깨우는 대신 자는 줄 아는 자신에게 입을 맞추었다. 순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민규가 자신을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그냥 친절하게 자신을 대하는 줄 알았는데. 순영은 꿈지럭 움직이며 침대 끝으로 이동했다. 조금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민규가 잠을 자고 있었다.
순영은 민규를 바라봤다. 24살이면 너무 어린데. 어른스럽지만 여전히 아이의 태가 묻어있었다. 8살 어린 동생이었다. 앞으로 민규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서 순영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일단 오늘의 일은 없었던 일로 자신은 잠들어서 모르는 일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제게 다가오던 민규의 얼굴이 떠오르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미쳤어, 진정해 권순영. 순영은 제 가슴에 손을 올렸다. 소리가 너무 컸다. 아냐, 아닐 거야. 좋아하는 건 아닐 거야. 순영은 일어나서 양치를 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다음날 알람 소리가 울려 순영이 눈을 떴다.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아팠다. 순영이 뒤척거리다가 침대 끝자락에 도착했다. 민규가 스르르 눈을 떴다. 민규는 저를 보고 있는 순영을 확인하자 푸스스 미소를 짓더니 잘 잤냐고 물었다. 순영의 가슴이 아침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순영은 멍하니 민규를 바라봤다. 멍한 순영의 모습에 민규가 꿈틀거리며 침대 끝자락에 다다랐다. 한 명이 지나갈 정도밖에 남지 않은 폭이었다. 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까운 거리였다. 민규가 손을 뻗어 그 틈새를 메꿨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순영의 눈앞에서 흔들거렸다.
"계세요~? 순영이 형, 형 영혼이 어디 간 것 같아요."
민규가 장난스레 말하자 순영도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형, 해장할래요? 민규의 말에 좋다고 일어났다. 그래, 거창할 거 없이 그저 민규와 평소와 같은 일상을 보내다 보면 좋아하는 마음이 정리되겠지.
"어제 형이 곤히 자길래 그냥 여기서 잤어요."
"어어, 그렇더라. 중간에 입이 너무 찝찝해서 깨서 양치했잖아."
순영은 스무스하게 거짓말을 했다. 오, 양치했어요? 민규가 일어났다. 아침에도 할 거죠? 순영의 루틴을 아는 민규가 일어나서 먼저 칫솔에 치약을 묻혀서 가져다주었다. 순영은 고맙다며 칫솔을 받았다. 칫솔을 입에 넣고 문지르자 거품이 일었다. 양치와 세수가 끝나고 나오자 민규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티셔츠를 벗고 있었다. 분명 평소에 많이 봤는데, 좋아하는 걸 알고 난 뒤에 보니까 다른 느낌이었다. 얼굴에 확 열이 오르는 느낌에 순영이 다급하게 옷장으로 향하다 무언가를 밟고 휘청였다.
"조심!"
민규가 재빠르게 뒤를 돌아 순영을 잡아서 넘어지지 않게 제 품에 안았다. 바닥을 보니 순영이 어젯밤 술 마실 때 입고 있던 티셔츠였다. 술에 취해서 제대로 넣어두지 않고 바닥에 두었는지 다른 옷가지들도 방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와, 민규야 고마워."
순영은 제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지 않음을 감사했다. 넘어졌으면 제대로 넘어졌겠는데. 순영의 시선이 바닥에 머물러 있다가 고개를 돌리자 아래를 내려다보는 민규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순영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얇은 반팔 너머로 민규의 맨살의 감촉과 온도가 너무 생생하게 느껴졌다. 순영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벗어나기 위해 순영이 몸을 비틀었지만 꽉 안은 민규의 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형, 얼굴이 빨개요."
"어? 어 나 세수 원래 뜨거운 물로 해."
민규의 말에 당황한 순영이 막 내뱉었다.
"너무 막 뱉는 거 아니에요? 형 아침엔 찬물로 세수하는 게 최고라고 전에 그랬잖아요."
그건 또 왜 기억하는 거야. 순영은 입술을 앙다물었다가 술 마시면 뜨거운 물로 한다고 둘러대었다. 거짓말 같은데. 민규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으아악! 순영이 민규의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어깨를 밀었다고 하기엔, 민규가 안 밀려서 순영의 허리가 뒤로 밀린 것에 가까웠지만.
"너, 너무 가까워!"
"아... 미안해요."
민규가 그제야 팔을 풀었다. 순영은 갑자기 올라간 체온에 손을 휘적거렸다. 더워요? 에어컨 틀어줄까요? 민규의 말에 괜찮다며 얼른 나가자고 하고는 옷장 문을 열고 얼굴을 파묻었다. 민규는 아무것도 안 하고 옷장에 박혀있는 순영을 보다가 옷을 갈아입었다. 진짜 가까웠다. 민규는 숨을 파르르 내쉬었다. 너무 가까워서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래도 넘어질 뻔한 걸 구했으니 순영에게 점수를 좀 얻지 않았을까. 민규는 순영이 이미 자신을 좋아하게 된 줄도 모르고 은은하게 챙겨줘서 순영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들자는 다짐을 했다.
옷을 다 갈아입고 해장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뜨끈한 국물 있는 음식을 시켜 먹자 속이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음식을 먹으면서 민규는 어제 술 먹고 기억이 남아있냐고 순영에게 물었다. 순간 떠오른 어젯밤의 기억에 순영은 사레가 들렸다. 쿨럭이는 순영에 민규는 다급히 냅킨을 뽑아서 순영에게 건네줬다. 기침을 여러 번 하고는 순영이 입을 열었다.
"어? 어... 당연히 다 기억나지. 나 필름은 잘 안 끊겨."
"그래요? 그때 형이 엄청 고맙다고 했잖아요. 혹시 뭐가 제일 고마웠어요?"
아, 그거? 순영은 입술이 닿았던 객실의 밤이 아닌 바에서 술 마실 때라는 걸 알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운 거라... 순영은 제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 보았다.
"아, 운동, 운동 가르쳐준 거 고마웠어."
순영의 말에 민규가 눈을 빛내면서 밥 먹고 소화 좀 되면 운동하러 가자고 말했다. 순영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운동을 하러 가자 급속도로 후회하기 시작했다. 걸친 얇은 민소매 사이로 보이는 근육들과 자세를 잡아주는 민규의 손길이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도 한 번 신경 쓰니 도미노처럼 퍼져갔다. 큰일이었다. 평소와 같은 생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로 순영은 민규와의 접촉을 슬슬 피했다. 민규는 자신을 피하는 순영에 더 다가갔다. 피하면 도망가고 피하면 도망가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민규는 제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서 순영에게 무슨 잘못인지 물었다. 그럴 때마다 순영은 너의 잘못이 아닌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민규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심지어 어느 날은 좋다고 아무렇지 않게 민규에게 팔짱을 끼거나 웃으면서 어깨에 기대다가도 또 어느 날은 한 올도 만지지 말라는 고양이처럼 굴었다. 민규는 그럴 때마다 미칠 것 같았다. 이게 어른의 밀당인 건가. 순영이 밀었다 당기면, 민규는 밀리고 당겨졌다. 하지만 마냥 밀리고 당겨진 것이 아니라 한 발짝 한 발짝 순영을 향해 전진했다.
"오, 형 이번 이벤트는 술을 공짜로 준대요!"
민규가 금주 이벤트 내용을 순영에게 말해주었다. 사람들이 지쳐가는 4개월 차 끝물에 하는 이벤트는 사교 파티 행사였다. 이전까지 이벤트는 그림그리기나 AI가 사회를 보며 하는 레크리에이션 등 취향 타는 것들이었기에 사람들이 별로 없었지만 이번 이벤트는 정말 일부의 사람을 제외하곤 대부분 참석할 것 같았다. 심지어 이번 행사에서는 샴페인과 핑거푸드를 제공한다니 더 많은 사람이 몰릴 것으로 예상되었다.
사교파티라는 이름하에 순영과 민규도 제가 가져온 것 중 가장 포멀한 옷차림으로 갈아입었다. 꽤 갖춰 입은 셔츠차림을 하고 무료 샴페인을 먹기 위해 파티가 열리는 전망대로 향했다. 탁 트인 우주 전경을 두고 선내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 친한 사람들이 모여 다녔기에 서로 잘 모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기회로 사람들과의 안면을 틀 수 있을 것 같았다. 민규는 순영에게 샴페인을 집어서 건네주며 파티장에 관한 얘기를 하던 도중 처음 보는 사람이 민규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민규는 제게 인사하는 사람에 순영과 하던 대화를 멈추고 대화를 시작했다. 외향적이어서 그런지 금세 그 사람과 대화가 깊어지기 시작했다. 순영은 멀뚱히 대화하는 민규를 바라보다가 슬쩍 자리를 옮겼다. 순영에게도 몇몇 사람들이 와서 인사를 건넸지만, 낯가림이 있는 순영은 가볍게 인사만 받으면서 혼자 외롭게 서 있었다. 민규 주변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들이 꼬여있었다. 진짜 인기 많네. 한숨이 푹 나왔다. 젊고 인기 많은 사람을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다. 몇몇 사람들은 민규를 좋아하는지 서로 견제하거나 민규에게 환심을 사려고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으으, 김민규. 순영은 민규가 준 잔을 비우고 새 잔을 집어 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둘러싸인 민규를 보자 질투심이 울렁였다. 좀처럼 민규를 향한 마음이 잠재워지지 않았다. 싫어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밝은 에너지를 나눠주고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이렇게 떨어져 있으면, 힘들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슨 고민 있어요?"
누군가 순영에게 말을 걸어왔다. 순영이 고개를 들자 한 남자가 순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숨을 내쉬길래. 이런 자리는 별로예요?"
"조금요?"
그러면, 제가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남자의 이야기는 너무 재밌었다. 순영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몇차례 웃음을 터트렸다. 알고 보니 그는 인터넷 개인 플랫폼에서 방송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구독해달라고 순영에게 말했다. 순영과 남자가 서로 핸드폰을 꺼내 들고 플랫폼을 공유하려던 순간 옆에 그림자가 졌다. 누구지 싶어 순영이 고개를 들자 그 앞에는 불퉁한 표정의 민규가 서 있었다. 민규가 순영의 손목을 잡았다.
"형, 저랑 얘기 좀 해요."
"잠깐만. 나 얘기하고 있잖아 민규야."
순영의 말에도 민규는 남자에게 죄송하다고 하며 순영을 제 쪽으로 끌었다. 완력에 비틀거리며 민규에게 딸려간 순영은 반항하고자 몇 걸음 걷다가 멈추어 섰다. 자신을 당기는 손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야, 김민규 잠깐 놔보라고. 왜 그러는 건데."
"저쪽으로 가서 얘기해요."
민규는 전망대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어이가 없었다. 대체 왜 갑자기 이러는 건지 순영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기선 안 되는 거야?"
"네."
"그럼 손목 놔줘. 아파."
순영의 말에 민규는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셔츠 아래로 순영의 손목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죄송해요. 민규가 몸을 쭈그리며 사과했다. 순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먼저 전망대를 나가는 문을 향해 걸었다. 민규는 그 뒤를 따라서 졸졸 쫓아갔다. 사람들이 없는 쪽으로 이동한 뒤 멈춰서서 순영은 방금 민규가 한 행동에 대해서 물었다. 민규는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형이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는 거 싫어요."
"왜? 너도 엄청 많은 사람이랑 얘기했는데. 왜 나는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면 안 되는 건데?"
순영은 민규의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민규는 몇 번 입을 뻐끔거리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순영은 불러놓고 제대로 말하지 않는 민규가 답답했다.
"말 안 하면 갈게."
순영이 뒤돌려고 하자 민규가 입을 열었다.
"질투 나요. 형이 다른 사람이랑 얘기하면 질투 난다고요."
"질투 난다고? 질투는 좋아하는 사람한테 나는 거잖아."
순영의 말에 민규가 숨을 고르더니 순영을 쳐다보며 한 발자국 다가왔다.
"맞아요. 좋아해요. 형 좋아한다구요 제가."
민규는 잔뜩 웅크린 어깨로 말했다. 고백하는데 왜 무서워 해. 순영은 민규를 보았다. 생각해보니 무서울 만도 했다. 저도 틀어져 버릴 관계에 두려워서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고 지냈다. 8년이란 시간의 벽을 두고 고민했다. 하지만, 뭐든 부딪히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변화는 없다. 민규는 먼저 제게 발을 내디뎌서 변화를 꾀했다. 제 옆에 창밖이 빛났다. 작은 창 너머 먼 곳에서 반짝 별이 빛났다.
민규는 제게 대답이 없는 순영에 더 몸이 작아졌다. 없었던 걸로 해달라고 할까. 질투심에 의해 튀어나온 고백이었다. 볼품없었다. 그렇다고 물리기엔 또 자존심이 상했다. 민규가 입을 열고 순영에게 대답해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순영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민규야, 솔직히 말해서 아직 두려워. 또 헤어질까 봐 두려워. 그리고 너랑 나랑 나이가 적게 차이 나는 건 아니잖아."
민규는 순영의 말을 가만히 들었다. 순영이 말한 것을 보았을 때 순영은 자신을 싫어하진 않았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다시 상처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과 많이 차이 나는 나이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 감정 때문에 자신에게 다가오기가 어렵다면 확신만 그에게 주면 되는 거 아닐까. 민규는 순영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전해지는 온기에 순영이 고개를 들어 올려 민규를 바라보았다.
"시작하기 전부터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요. 8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사실 적은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지내면서 8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크게 느낀 적 있어요? 나이 차이 때문에 불편한 적 있었어요? 저는 없었는데."
민규의 말에 순영이 생각했다. 생각해보니 이곳에서 있는 시간 동안 민규와 나이 차이를 크게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많이 챙겨주는 민규가 가끔은 저보다 형 같았다.
"나도 없었어."
"그쵸? 일단 나이는 해결이네요."
으응, 그렇네. 순영은 민규의 말에 동의했다. 순순히 동의하는 순영에 민규는 다시 입을 열었다.
"헤어진다는 두려움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즐거움을 모를 거예요. 저는 형 행복하게 해줄 자신 있거든요. 너무 고민하지 말고 사랑에 뛰어들어요."
민규가 순영을 잡은 손을 고쳐 잡으며 얘기했다. 순영은 저를 맞잡은 민규의 손을 바라봤다. 괜찮을까...? 의구심이 여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규의 말대로 가보지 않으면 제 앞날을 모른다. 가봐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예전에 사람을 사귈 때를 떠올렸다. 길게 재고 따지는 건 영 제 성미에 안 맞았다. 좋아하면 몸을 던졌다. 시간이 좀 지났다고 왜 이렇게 어영부영하고 있었을까.
"아... 씨... 그래 뭘 고민하냐. 좋아."
"네?"
"좋다고, 한번 시작하자고."
형...!! 감격한 민규가 순영을 와락 안았다. 얜 힘이 왜 이렇게 세. 순영은 민규의 등을 마주 안고는 힘들다고 말했다. 순영의 말에 민규가 힘을 풀며 사과했다. 뭘 또 이런 것 가지고 사과해. 순영이 민규의 멱살을 잡고 끌어내려 입을 맞췄다.
"사과 안 해도 돼."
"형, 사과하면 또 입 맞춰줄 거예요?"
"미쳤냐? 아니?"
"그럼 제가 할게요."
민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순영과 입을 맞추었다.
파티를 뒤로한 채 둘은 105호로 뛰어갔다. 순영이 조심스레 제가 방 번호를 '백호'로 외웠다는 것을 어필했다. 그럼 우리 백호의 방에서 사는 거네요? 민규는 카드키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셈이지. 순영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문이 닫히고 둘은 민규의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 이후 지구에 돌아올 때까지 순영의 침대는 쓰이지 않았다.